소란으로 고요를 짓는 일_비아니, 곽철안: Black Echo

비아니, 곽철안 《Black Echo》 전경 5. 14~6. 14 아줄레주갤러리

고요는 소란을 딛고 일어선다. 소란에게는 고요를 길러낼 힘이 있고, 결국엔 기척도 없이 고요가 등 뒤에 따르리라는 믿음은 견고하다. 그러나 이 말을 비가 오고 땅이 굳는다는 흔한 교훈으로 입에 담을 생각은 없다. 여윈 바늘이 떨고 있는 한 우린 나침반 가리키는 방향을 믿을 수 있다. 모두가 잠든 밤이 지닌 적막은 사실 별과 개울, 풀벌레의 낮고 작은 웅성거림으로 빚어진다. 그렇다면 고요는 소란과 나란히 놓인다. 소란의 끝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서부터 시작된다. 소란이 고요의 형식일지 모른다는 것. 나는 비아니(Viani)와 곽철안의 《Black Echo》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두 작가의 세계는 고요하다. 완주를 마친 원과 제 길이를 모두 펼친 선. 그러나 여전히 분출하는 빛무리와 그치지 않는 선율. 누구보다 완연한 고요가 그럴 수는 없는 것. 오히려 조형 곳곳은 소란하여 고요를 생생하게 불러내는 것은 아닐지. 이들의 파동을 여기 옮긴다.

비아니는 불안이 평온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다. 고요는 완성됐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원은 자신의 운동을 마쳤고, 단일한 색은 사소한 변화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수상한 기색이 있다. 그의 화면에 다가섰을 때, 우리는 고요를 만나러 갔다가 무수한 소란을 경험하고 돌아온다. 작가는 “작품의 원은 일부러 완벽하지 않게 표현되었다. 평온함은 완벽함을 뜻하지 않으며 오히려 결점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이는 캔버스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적막한 검은 표면 아래 흔들리는 빛, 그리고 늘 어긋나기에 어떤 중복도 없이 변화를 낳는 궤적. 노이즈처럼 흩뿌려진 흰 점은 화면을 뒤덮지 않으면서도 형식의 균일함을 깨뜨리는 파문을 새긴다. 정지한 원을 생성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완주가 아니라 끝없는 회전을 왕복하는 선이다. 내부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움직인다. 붓은 아직 질주하고 있다. 고요를 유지하는 소란. 이 역설이 비아니 회화가 도달한 적막의 풍경이다.

비아니 〈Inner Mind> 캔버스에 아크릴릭 140×110cm 2025

곽철안은 침묵의 언어로 생의 충동을 조각에 새긴다. 조각의 무언은 그가 언제나 끝내 완성되지 않은 몸, 토르소의 상태로 드러난다는 데 기인한다. 서예를 모티프 삼았지만 획을 완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말은 못내 삼켜진다. 자연을 재현하려는 유선流線은 그 신체가 절단되었기에 운동이 시작도 전에 멈춘다. 문자의 미완과 육신의 결핍이 조각의 고요를 환기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형상은 도리어 깊이 분주하다. 작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드리워진 이슬 등 자연이 정지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로서 생성을 도모하는 ‘자발적’ 에너지”로 가득 차있다면서 그의 조형이 이 힘을 향한다고 밝힌다. 일상의 육안에서 자연은 정지해 있다. 그러나 조각의 형안은 그 표면 아래 형태를 빚어내는 무수한 연쇄를 발견해 낸다. 완결되지 못한 획은 어떤 문자로도 향할 수 있다. 토막난 몸은 생략된 만큼 더 많은 운동을 상상하게 만든다. 요동치는 생의 충동을 응축한 절대적인 씨앗. 곽철안 조각의 고요는 정지를 통해 가장 북적인다.

고요는 소란을 품고 일어선다. 고요에 기대고 나서야 간신히 출발할 수 있는 소란스러운 생. 이들이 빛과 소음 안에선 쉬이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때 고요는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이는 것이 혼자만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번진다. 또다시 고요는 적막 속에서 말을 삼키고 있는 이에게 귀 기울이기 위해 흐른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을 위한 작업”(비아니) 그리고 숨죽인 존재 사이로 “생성을 도모하는 자발적 에너지”를 굽어살피는 눈길(곽철안). 이 고요는 소란을 디딘 고요라서 더 귀하다.

좌 · 곽철안 〈Cuboid Stroke_Coral Buff〉성형 합판, 무늬목, 바니시 마감 100×81.5×45cm 2021 / 우 · 〈Cuboid Stroke_Seafoam〉 성형 합판, 무늬목, 바니시 마감 50×83×32.5cm 2025

◼︎ 아줄레주갤러리 《Black Echo》 오프닝 리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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