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순택: 실루엣의 정치학

학고재갤러리, 사진가 노순택 개인전 《검은 깃털》

노순택 ⟨검은 깃털 #CHL0701⟩ 아카이벌 잉크젯 피그먼트 프린트 108×162cm 2017

노순택은 분단 체제가 야기하는 ‘파열음’을 사진으로 포착한다. 그가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인전 《검은 깃털》(6. 22~7. 17)을 개최했다. 역광을 이용한 사진 19점을 선보였다. 5년 만에 신작 발표지만, 작가는 그동안 사회, 정치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뜨거운 현장에서 어김없이 자리를 지켰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규탄 텐트 농성,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김진숙 복직 투쟁, 비정규직 노동자 쉼터 꿀잠 건립 운동 등 연대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카메라를 들었다. 이번 작업 역시 이러한 현장에서 느낀 문제의식의 연장선이다.

전시명이자 출품된 연작의 제목이기도 한 ‘검은 깃털’에는 노순택의 작가 의식과 매체론이 축약돼 담겼다. 1997년 IMF 청문회 당시 홍인기 전 청와대 총무수석은 “나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깃털에 불과하다”는 말을 남겼다. 작가는 반은 풍자로, 반은 진심으로 ‘깃털론’을 수용했다. 그의 사진 에세이집 제목 역시 『사진의 털』이었다. 깃털은 신체 일부일 뿐, 몸통이라는 핵심을 지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반대로 깃털은 핵심으로 가는 실마리이자 출발점이다. 깃털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진실이란 몸통에 접근할 수 있다. “깃털이 윤곽에 갇혔다 해서, 무게가 달라졌는가. 무엇으로 무게를 가늠하는가.” 사진은 세계의 편린에 불과하지만, 프레임 너머를 암시하고 상상하도록 주선한다. 이런 과정이 사진을 단순히 찍고 보는 것이 아니라 쓰고 읽는 것으로 만들어, 예술과 정치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는다.

노순택 〈좋은 살인〉 아카이벌 잉크젯 피그먼트 프린트 162×108cm 2016

한편 깃털을 수식하는 ‘검은색’은 노순택이 이번 전시에서 테마로 삼은 역광을 은유한다. 역광이란 빛을 피사체 뒤에 두고 촬영하는 기법. 역광으로 사진을 찍을 경우 상은 실루엣으로 드러나며, 세부는 어둠에 가려진다. 남은 것은 농담(濃淡)뿐이다. 흑백만이 존재하고 그사이의 회색은 사라진다. 작가는 역광으로 극단주의자의 화법이 지배하는 세태를 겨냥했다. 체제에 대한 비판이 종북주의자의 선동으로 왜곡되고, 약자의 목소리가 혐오에 덮여 들리지 않는 기울어진 현실은 흑과 백 사이 중간 지대가 사라진 역광 사진과 같다. “극단주의자의 ‘아무 말 대잔치’에 환호하는 세상사 풍경은 동서고금에 널려있다. 오늘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가 아닌가. 극단주의의 매력과 마력은 연구 대상이다. 그것에 빠져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그러나 역광 사진이라고 해서 그 안에 들여다보아야 할 대상이 실루엣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얼핏 보면 윤곽이 전부인 노순택의 사진은 가까이 섰을 때 비로소 흑과 백, 두 개의 색을 상회하는 디테일을 관객에게 건넨다. 극단주의자는 세상을 간편하게 네 편과 내 편으로, 빨갱이와 애국시민으로 갈라놓는다. 분열된 세계에서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선 사건 가까이에 다가서는 수밖에 없다. 사진과 마찬가지로 사건에 가까이 접근하면 흑백의 세상엔 인간의 표정과 주름, 목소리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정치적인 맥락이 강조되지만, 노순택은 사진의 미감을 외면하지 않는다. 혹자가 말하듯 노순택은 미술관과 광장 거리전, 그 어느 곳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작가다. 정치를 소재로 삼은 예술이 아름답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예술과 정치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하고, 이 거리감을 잃을 때 예술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노순택은 긴장을 놓지 않으면서 아름답고, 정치적인 예술에 도달한다.

노순택 <검은 깃털 #CGC2401> 아카이벌 잉크젯 피그먼트 프린트 162×108cm 2016

작가의 사진엔 특정한 사건을 지시하는 구체적인 맥락이 자주 프레임 밖으로 밀려난다. ⟨검은 깃털 #CHL0701⟩은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 방한 당시 세종문화회관 옥상에서 반대 집회를 감시하는 경찰을 촬영한 사진이다. 그러나 배경이 전제되지 않으면 작업은 기하학적 추상으로 인식된다. ⟨좋은 살인 #CGJ2401⟩에서 조형성은 더욱 강조됐다.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전략 폭격기 B1B 랜서는 몸체와 날개를 생략한 덕분에 자연의 세부를 대담하게 데포르메한 산수에 접근한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담은 ⟨검은 깃털 #CFM2601⟩은 인간과 자연의 형상을 유희하는 인지적 착시를 노린 것처럼 보인다.

노순택은 정치적 현장을 기록하지만 그 장면을 낱낱이 기록하려 분전하는 저널리즘 언어에 종사하지 않는다. 사진의 포커스는 가장 정치적인 순간에 가장 일상적인 풍경으로 물러난다. 노순택의 정치성은 도리어 정치를 일상의 미감에 희석함으로써 선명해진다. 작가의 사진을 경험한 관객은 이제 보통의 사물에서 정치를 감각한다. 우리는 경찰의 낯을 확인하지 않아도 도처에 널린 도형으로 사회에 뿌리박힌 감시 체제를 상기하고, 곡선만으로도 전쟁이 미화되는 사회의 모순에 다가가고, 평범한 자연을 지나며 살 곳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가 시인 김남주를 인용해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듯, 정치는 특수한 상황과 장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순은 모든 곳에 있다. 이를 인식할 때만 깨어있을 수 있다고 작가의 사진은 말한다.

노순택에게 작가란 공동체를 일치시키고 화합하게 만드는 중재자가 아닌, 사회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고 질문을 던지도록 요청하는 트러블 메이커다. 그를 현장으로 이끌었던 동력 역시 그 물음표였다. 매스 미디어가 보여주지 않는, 그곳에 담기지 못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찾고자 집회 장소 곳곳을 누볐다. 어떤 사태의 정면을 주시하는 저널리즘과 달리, 노순택은 뒷면을 다루는 포커싱으로 조명되지 않았던 사태의 입체적인 면모를 들춰냈다.

첫 개인전 《분단의 향기》(김영섭화랑 2004)부터 정치 현실을 꾸준히 작업화해 온 노순택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그래서 대안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노순택은 자신이 옳은 답을 갖고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 외려 그가 지닌 것은 옳은 물음이다. “때로는 질문이 답이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 조재연 기자


『아트인컬처』 202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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