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하는 미학_파레르곤과 이코노미메시스 이래로 칸트 ‘미학’ 읽기

, movi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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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큼 많은 소설, 전시, 공연, 음악 등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을까. ‘이미’ 많은 시가 쓰여졌고, 많은 노래들이 불려지고 그리고 많은 전시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예술가들은 차고 넘치고 또 생성되며, 예술에 유례없는 화폐가 삽입된다. 아 이거슨 인류 역사에는 절대 없었던 존나 아름다운 세계다. 그리고 비로소 이 세계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도록 요구하고 명령하지만, 동시에 세계는 너무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든지 충분하게 존재할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세계가 아닐 것이며, 또한 그것들이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힘도 절대 가지고 있을 수 없음을.

이 ‘아름다움’이 스스로만을 빛낼 뿐 ‘세계’와의 관계에서 정작 맥이 없는 이유는 멀지 않은 곳에서 예술이 스스로 ‘세계’를 염두하는 것을 포기한 까닭이다. 이에 한 편에서는 역사의 종말과 함께 찾아온 ‘미(beauty)의 부활’의 축하연이 열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역사로부터의 명백한 도피 속에 ‘미학의 종말’-그리고 동시에 미(감각적인 것, aesthetic)의 종말-의 애도가 진행된다. 1789년으로부터 역사가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 아름다운 것(beauty)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때의 ‘진짜’ 아름다움은 권력∙지배∙착취를 ‘색출’해내는 것이었으며 미적인 것으로부터 유토피아와 해방된 것을 ‘찾는’ 것이었다. 러시아 구성주의, 바우하우스 그리고 아방가르드의 이름으로 예술은 색출과 찾음을 일상과 결합했다. 그래서 한동안 예술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함유성에 대한 타자로서 외부에 존재했고 도구성에서 벗어난 존재일 수 있었다.

반면, ‘노동’의 개념이 폐쇄되어지고, ‘동구권’이 몰락한 이후 예술은 정치적인 족쇄로부터 해방되어 ‘미(beauty)의 귀환’을 환대했다. 더 이상 예술은 OO파로 스스로를 칭하며 영토를 건 전투-‘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할지 같은 미(beauty) 이상의 논쟁-는 하지 않게 되었고 예술가는 OO파가 아니라 스스로 ‘명사(名詞)’가 되거나, 브랜드가 되어 오직 자기 자신의 ‘이름’만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게 되었다. 정치적인 것 외에도 예술이 스스로를 창안해 나간다는 것은 분명 유의미한 일이었지만 예술은 도통 어려운 것으로만 여겨지게 되었고, 가장 예술적인 것은 오히려 전(前) 예술이 타자로 취급했던 ‘시장(market)’이었다. 어떻게 느낄지, 어떻게 입고 또 들을지 등의 감각은 현재 누구보다도 시장이 잘 다루게 되었다. ‘순수 예술’이라는 조악한 조어만큼이나 전(前) 예술은 지성화되거나 엘리트화∙지식인화되어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오늘 애도와 축하연을 동시에 여는 인물이다. 데리다는 『회화 속의 진리』에서 「구두한 켤레」를 관찰할 때, 그것이 오로지 ‘정치적인 것이나 세계’하고만 관련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다양한 의미들로 미끄러지며 해체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는 데서 ‘미의 귀환’은 환대받아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을 실종시키는 것 또한 옳지 못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데리다는 끊임 없는 해체 속에서 결국 만나게 될 ‘평등’과 ‘해방’을 기획하기에 그가 해체 또한 세계를 염두한다는 데서 그는 기꺼이 비장하게 ‘애도’를 표한다. 그러나 그가 지금의 실종의 기원으로 지목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포스트모던의 조류가 아니라 ‘칸트’다. 애초에 ‘세계’의 다른 이름일 감각적인 것 안의 보편을 주장하고, ‘미’로써 윤리와 진리를 매개하고자했던 기획은 사실 애초부터 정치적인 것의 실종을 내포했다는 것. 데리다는 그렇게 칸트를 유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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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에게서 미적인 것은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진리(진, 『순수이성비판』)와 윤리(선, 『실천이성비판』)와, 미적인 것(미, 『판단력비판』)이 갖는 차별점이자 본래성이다. ‘장미꽃이 빨갛다’는 것은 객관적인 판단이지만 ‘장미꽃이 아름답다’는 것은 주관적인 쾌∙불쾌 판단(취미판단)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판단이 표상(상상력)과 오성을 거쳐 개념일 인식(이성)에 도달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과정에서 상상력과 오성은 개념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오직 주관적인 불명확함 속에서 조화로이 유희하다가 조우해 감성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래서 이 ‘주관적인’ 감각적인 것은 결코 객관(진리나 이성)에 속할 필요도 윤리(실천 이성)에 부역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칸트는 미적인 것에 진리와 윤리와는 독자되는 것으로서의 예술의 자율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칸트는 동시에 주장한다. ‘장미꽃이 아름답다’는 언표가 나타날 때 그것은 결코 ‘장미꽃은 내게 아름답다’라든지 ‘내게만 장미꽃은 아름답게 드러난다’고 말해지지 않는다. 존재는 어디선가 남들이 좋게 느낄 거라고 생각하며 좁거나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서 음악을 틀고 그 감정을 공유하길 바란다.-그것이 등산로이든 카페이든- 이때 취미 판단은 누구도 그러할 것이라는 보편타당성을 염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보편타당성은 장미꽃과 특정한 음악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미’가 아니라 인간의 주관의 구조가 보편적이라는 것에 의존한다. 칸트는 이를 ‘공통감(common sense)’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로부터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 안에서 진리를 추구해야한다면서 『순수이성비판』 내내 거리를 두었던 ‘세계’의 불명확함과, 정작 윤리에 관하여 『실천이성비판』 내내 명확했던 ‘세계’라는 간극-즉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미’로써 하여금 메꾸고자 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은 ‘세계’-물자체-를 알 수 없으므로 존재 내부로 진리를 한정 지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리를 존재 내부로 한정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인식 밖의 보편타당성에 속하는 시간과 공간을 염두하는 공백 지점이 존재한다. 반면에 『실천이성비판』에서 선의지는 앞서 『순수이성비판』에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한 걸음 물러났던 ‘세계’의, 윤리에 도달할 수 있는 공식을 획득한 ‘체’ 결착한다. 한 곳에서는 알 수 없던 것을, 한 곳에서는 아는 체 실천한다. 『판단력비판』은 그 사이에서 존재 내부-특히 공통감이라는 예로-를 보편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격상시키고는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메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철학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해 물음하고 윤리학이 ‘무엇이 선한가’에 대해서 물음한다면 여기에 간극은 이것이다. ‘나는 아는 것을 바라는가’, ‘ 진리는 선한 것인가’, ‘나는 선한 것을 바라는가’. 미학의 기원적 물음인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는 이들 사이에서 열일한다.

그리고 한정된 것과 주관적인 것을 가지고-혹은 한정되어 있으며 주관적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으로의 이행하고자 함은 칸트가 이룬 경험론-한정된 것과 주관적인 것-과 합리론-보편적인 것-의 용해라는 의지와 업적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동시에 그가 대표하는 ‘계몽주의’의 기획이었다. 암흑시대가 만든 파국의 종교 안에서 피폐해진 주체의 자율성을 복원하고, 그 자율성이 근대가 생성하고자하는 거대한 ‘보편적’ 기획에 결국 닿을 것이라는 것. 칸트에게는 혹은 칸트의 시대에서는 지식을 넘어서는 그런 믿음이 요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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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여기서 칸트의 미학 이론이 간극을 채우기 보다는 모순을 다른 ‘모순’으로 메우려고 한다고 지적한다.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의 모순은 『판단력비판』으로 채워지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그것은 『판단력비판』이란 모순으로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 뿐이다. 개념-화 될 수 없는 ‘미’가 어떻게 실천-보편-과 이론-개념-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가. 이것이 『판단력비판』이 함유한 모순이다. 이 모순은 미의 자율성으로 해소되고 싶어하지만 그렇게 되면 미는 무의미를 초래하거나 비개념적인 것으로만 남은 아래에서 세계를 여전히 염두에 둘 수 없다. 데리다가 보기에 칸트는 그런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정박해있다. 그 아래서 자율성이 보편(타당)성에 닿을 것이라는 기획과 이론은 그저 믿음 수준이므로 오히려 그것은 계몽 철학의 무능함을 다시 한 번 드러낼 뿐이다. 데리다가 이러한 비판을 하는 데 사용하는 중요한 두 개념은 파레르곤(parergon)과 이코노미메시스(economimesis)이다.

파레르곤(parergon)은 작품(ergon)을 둘러싼 주변∙외부를 의미한다. 그것은 “작품(ergon)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품 바깥(hors d’œuvre)도 아니고,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니고,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대립을 뒤흔드나, 그렇다고 비결정적인 것으로 남지 않고 작품을 발생”하게 만든다. 이는 어떤 저자의 부수적인 저작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작가가 주작을 만들기 위해 제작하거나 비치한 작은 소품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미술에서라면 작품을 감싸고 있는 제일가는 주변적 요소인 액자를 가리키겠지만, 액자가 없는 그림이라면 프레임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예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파레르곤은 때때로 비의도적이거나 겨우 비의(非意)적이다. 작가는 작품 주변에 무엇을 넣고자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 무엇을 넣을지나 의미로 무엇을 선택할지를 고름으로써 주변에 놓인 것을 남길 수 있다. 이 경우 주변은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지는 것이다. 칸트가 예술-혹은 미학- 안으로 넣은 것은 다음과 같다. 예술은 자유로부터 출생할 것. 이 자유는 자연과 배치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동시에 자연처럼 보이기도하고 결국 자연을 재현-미메시스-함일 것. 그리고 또 오직 자유이기 때문에 어떤 목적도 없이, 심지어 임금이나 가격도 요구할 수 없는, 노동보다 더 인간적인 일일 것. 이제 예술은 자유와 자연이 배제하는 ‘목적’이 있는 것들을 주변화한다. 어쩌면 주변화가 아닌 타자화한다해야 옳을지 모른다.

여기서 타자화되거나 주변화된 ‘목적’ 있는 것들은 이미 우리에게 알려져있는 ‘진리’와 ‘윤리’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모순은 여전히 다른 모순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진리’와 ‘윤리’의 간극을 메우는 ‘미’는 ‘진리’와 ‘윤리’를 타자화한다. 그런 식으로 예술은 비개념적일 수 있고, 비개념은 진리와 윤리가 늘 매개하는 ‘세계’와 ‘정치’ 따위의 부재에 어떻게든 알리바이를 댈 수 있기에 오늘 예술이 처한 ‘세계’의 실종은 일찍이 명분을 얻는다. 후에 칸트가 이를 계몽주의의 기획을 대표하며 보편적인 것과 이음지으려는 노력은 반박이 되기엔 모자른 일이다. 그 이음은 설명되지 못하거나 않았기 때문에.

사진이든 그림이든 작품은 세계를 염두에 두었을 때 하나의 세계였다. 그것의 질료가 무엇이든 작품으로 드러났을 때 존재는 세계를 생각했다.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기괴하거나 괴랄한 스케치임에도 그것은 어디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읽기’를 전해주었다. 그래서 사진과 그림은 애초에 읽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건은 그림 안에서만 특수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것은 세계의 일부나 전체를 그린 것으로 액자 안에 갖혀있으면서도 밖과 늘 교섭하고 소통했다. 그러나 현재 그것은 액자 안에서만 일어난 특수하고 특별하고 또 각별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칸트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술은 비개념적인 것 아니던가. 목적 없이 인상과 정서만이 전달되면 그 뿐, 개념적으로 존재가 받아들이는 세계와 무관계임은 당연히 결정된다. 서두에 언급한 ‘색출’이나 ‘찾음’은 목적있는 것으로 예술의 형식에서 가장 멀리 쫓아내야할 일이다. 그러나 에르곤에서 파레르곤을 배출하고 배제한다고 해서 파레르곤 없는 에르곤은 가능할까. 에르곤은 이미 파레르곤으로 기피할 수 없이 오염된 곳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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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메시스는 미메시스가 개념과 목적을 타자화한 순수한 미의 영역이 아니라 이미 미메시스 자체가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의 미에서 ‘자유’는 그냥 명사인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늘 OO에 관한 자유다. 특히 OO은 대체로 ‘목적’과 ‘자연’로 채워진다. 그리고 이때 ‘자유’는 일반적인 용례하고는 다르게 위계없이 부유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목적’과 ‘자연’으로부터의 자유가 제일의 서열을 차지하는 위계있는 포착으로 사용된다. 즉, ‘목적 없음’, ‘자연과 같지 않음’이 예술의 형식인 미메시스의 제일 우선인 서열이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자연과 같지 않음’에서 자연은 ‘유추’된다. 그리고 자연은 곧 ‘보편’이기에 보편으로 가는 토대가 ‘유추’를 통해서 마련된다.

감성은 개념화될 수 없다. 나는 네가 어떤 커피를 맛있다고 하는지 ‘아는 것’이 가능하고. 네가 어떤 남자(여자)를 좋아하는지 ‘알’고, 어떤 종류의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알’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그것은 개념이다. 나는 느낌 즉 감성을 알 수 없다. 나는 네가 쓰디 쓴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의 그것이 너의 혀를 감싸는 것을 통해서 천천히 너를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그를 먼발치서 바라보면서 콩닥거림을 멈출 수 없었던 그 느낌을 모른다. 또 네가 좋아하는 그 영화가 네게 어떤 기억을 상기시키는지 그래서 네가 어떤 느낌에서 울었는지 그것이 네게서 무엇을 바꾸었는지 나는 도통 모른다. 그래서 예술은 어떻게 하면 그 비개념적인 감성에 개념적이지 않게 다가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비개념적인 것으로 표현한다. 그림과 사진, 음악 그렇게 예술들은 감성을 전혀 다른 것으로 미메시스한다.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미메시스하는 것, 우리는 이를 ‘유추’라고 부르고 ‘유추’는 예술의 정확한 표현 형식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시’는 ‘유추’라는 형식을 경유하면서도 전혀 물질적인-자연적인- 것을 거치지 않은 오직 ‘인공미’만으로 ‘자연미’-비개념적인 것-를 통과하는 유일한 것이기에 칸트에게 있어서 최상의 예술로 격상된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감성이 “얼굴 하나야/손바닥 둘로/폭 가리지만/보고 싶은 마음/호수만 하니/눈 감을 수 밖에”(정지용, 「호수」)라고 표현될 때, 사랑을 잃은 처연함이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기형도, 「빈 집」)으로 유추될 때 그것은 어떠한 물질적인 질료를 결코 필요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롯이 인공미로 가득차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비개념적인 자연미를 향하여 다른 예술과 동등하거나 더 나은 상태로 도달한다고 칸트는 믿었다.

데리다는 이러한 ‘목적 없음’과 ‘자연과 같지 않음’의 최우선 서열에서 시를 격상시킴이 언어 혹은 담론에 대한 순박한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사용되는 데리다의 개념은 이그잼플오랠리티(examplorality)인데, 이는 하나의 개념의 ‘예’는 그 하나를 뛰어 넘어나는 사례성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는 입으로 나갈 때 권력과 관계된다.-정확하게 얘기하면 언어∙담론 스스로가 존재할 때부터 결코 물질성이 배제된 순수한 형태라 할 수 없을만큼 권력 관계의 반영이다- 최근에 격렬하게 형성하고 있는 여성혐오의 용례들은 분명 쓰임새와 본래 뜻∙개념 이상의 것으로 존재한다. 결코 본래의 뜻과 개념을 사전에서 찾는다고 해도 입 밖으로 내뱉어졌을 때 그것은 사전을 초과한다. 즉, 비개념적인 것에도 ‘목적’과 ‘자연’은 가미된다.-더 정확히는 사회(권력)가 반영된다.- 서열 제일 위의 예술로 내세운 ‘시’에서 조차 ‘목적’과 ‘자연’으로 오염되었을 때 칸트의 이론은 결정적으로 이율배반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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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미학 이론은 계몽주의 철학의 기획아래에서 보았을 때 예술의 자율성을 통해서 자율적인 주체를 근대적으로 복원함과 동시에 보편적인 공동체∙세계가 발생할 수 있도록 이끄는 매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예술의 자율성을 설명할 때 공동체∙세계는 서로 시차(Parallax View)를 갖는다. 지젝이 사용했던 이 개념은 단순히 관측 위치에 따른 물체의 위치나 방향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를 배제하는 차이다. 시점에 따라 꽃병과 얼굴을 오가는 착시 효과를 나타내는 그림은 결코 한 눈에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포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그것은 배제하는 시차이다. 칸트의 미학 이론에서 예술의 자율성을 주목할 때 세계∙정치는 보이지 않으며, 반대로 세계∙정치에 주목할 때 예술의 자율성은 오히려 왜곡에 빠질 가능성에 처한다. 자율성∙주관성과 보편성은 도통 종합될 수 없는 이미지만을 형성할 뿐이다. 그렇기에 데리다는 세계를 실종한 현재의 예술의 기원을 오히려 그 종합을 시도했던-그리고 결정적으로 실패로 받아들여진- 칸트에게서 읽어낸다.

한편으로 이런 데리다의 비판을 미학자인 데이비드 노먼 로드윅(David Norman Rodwick)은 현재의 예술-미적 이데올로기-은 애초에 칸트의 미학이 요청받았던 세계가 해방을 향한 계몽주의 시대인 동시에, 오히려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세계이기에 벌어진 일임을 찾아낸 것이 의의라 평가한다. 계몽의 시대는 동시에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생동감을 얻는 시기이기도 했다. 계몽 철학의 무능은 그것이 계몽을 향했던 것이 곧 결국 자본주의를 향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주의’ 혹은 ‘해체론의 예술’이 세계의 실종을 해소하고 ‘색출’과 ‘찾음’의 예술을 가능하게 할 것이냐라는 물음은 요원한 일이다. 데리다가 주장하는 의미의 미끄러짐을 통한 해체와 끊임 없는 관점의 창출은 다양한 미감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세계’는 이경우에도 불가능하다.

‘세계’는 늘 문제다. 문제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문제에 대해서 존재들은 얼마든지 구체적으로 사안을 해체하고 다양한 관점의 이유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이 해체될 수 있으며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사회적 존재들이 수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시시각각 현재 진행형으로 차이를 생성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차이들은 이제껏 주류로부터 타자화 되었으니 해체를 통해 차이들의 존중과 궁극적으로는 주체화와 평등을 완성하는 것이 데리다의 해체론의 기획일 것이다.

그러나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물음이 있다. 만약 문제가 다양한 차이를 반영한 ‘부분’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이면 어쩔 것인가. 다양한 차이를 반영한 ‘부분’은 그저 그 부분만 조정되거나 관리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그때 그 ‘부분’을 문제의 ‘이유’라 부를 수 있다. 지금의 빈곤과 양극화와 같은 경제 문제에서 다양한 ‘부분’을 차지 하는 ‘이유’는 발견된다. 그것은 대부분 공학적인 이유, 행정적 시스템의 이유, 경제 체질의 이유, 정치의 이유, 국제의 이유 등 수많은 분석과 진단으로 해체된다. 그러나 그것은 늘 사태를 온전하게 납득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이유를 초과하는 원인을 찾을 때까지 이해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정박해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오래된 용어로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따위의 ‘세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져 왔다. 빈곤과 양극화 등의 경제 문제는 사실 차이를 반영하는 다양한 부분인 ‘이유’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한 그림으로 포착되는 ‘세계’ 자체가 문제라는 것. 세계’의 문제는 때때로 세계를 조직하고 관리하는 데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때때로 ‘세계’ 자체를 문제시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 데리다의 해체론에서 하나의 그림으로의 포착은 불가능하다. 오직 단면들을 관찰할 수 있을 뿐. 그래서 결론적으로 ‘세계’가 염두될 수 없거나 극단적으로는 ‘세계’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이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데리다가 칸트에게 표하는 유감에도 또다시 유감을 전할 수밖에 없다. / 조재연

*참조
–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 손부경 역, 「불순한 미메시스, 혹은 미적인 것의 목적」, 2013

/ 산책자의 정원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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