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A MEMO 01

11년 10월 16일, 월가 점령 시위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68혁명을 언급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 그는 그곳에서 대중들과 작게는 변하지 말 것을 크게는 더러 더 순수하고 아름다워지기를 약속했다.

저 약속을 때때로 상기할 때면 작년 이맘때 즈음이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철도 민영화 이야기로 열을 내고 있었다. 단순한 어떤 대상이 존재하는 투쟁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안부를 물으며 스스로를 반성에 열을 냈던 시기였다. 그동안의 구태한 운동 방식을 정면에서 고치려고 했었고, 침묵과 외면이 부끄러워 남몰래 새벽에 대자보를 붙이고 사라졌던 우리에게 그전으로는 절대로 방향을 돌릴 수도 복구시킬 수도 없던 ‘사건’같은 시기였다.

나도 대자보 한편을 썼더랬다. 운이 좋아 화제가 되었었고, 미디어에서도 여러 번 보도가 됐었다. 너는 왜 안 나가냐라고 액션을 강조하던 친구에게도 이게 나의 운동이야라고 오래간만에 반박할 기회가 되기도 했던 때였다. 그건 정말 나의 운동이었다. 마르크스가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 운동. 그때 나는 글이 그 운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떤 달필이나 셀럽이나 이론가로부터 깨닫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검증했으니까.

이 회상이 끝나면 약속은 기억 속에서 불쑥 나와 묻는다. 더 순수하고 아름다워졌는가. 변했는가. 그러나 이 물음은 애초에 쉽게 답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순수함이라든지 아름다움이라든지의 따위는 전리품이 아님을. 그저 그 물음 속에서만, 묻는 동안에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임을. 그러므로 저 물음을 계속 갖고 있는 동안에만 겨우 그들을 갖는 것임을.

그래서 내가 반성해야 할 것은 가끔 자주 못나도록 물음을 잊는 것이다.

“TAKE A MEMO 01”에 대한 2개의 생각

  1. 안녕하세요.
    10년 전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시작으로 글을 풀어가던 대자보 글을 찾고 찾다보니 이곳 까지 발이 닿았습니다.
    다시 그 글을 읽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혹시나 그 글의 원작자가 아닌가싶어
    실례를 무릅쓰고 댓글 남깁니다.

  2. 안녕하세요. 아쉽지만 나그네 님께서 기억하시는 대자보의 주인공은 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10년 전에 쓴 대자보는 있겠지만, 그때는 아마 바디우의 이름을 모르거나 안다 하더라도 그의 생각을 짐작치 못했을 때였을 것이라 돌이켜봅니다. 부끄럽게도 지금이라고 그 무지가 나아졌으리라 생각하진 않지만요. 10년의 시간이 지나서도 찾게 만드는 글이라니, 쓴 이가 부럽기도 하고 어떤 문장으로 채워져 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시원하게 대답드리지 못해 면구합니다. 부디 오래지 않아 그 글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간 고운 시간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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