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바꾸려면’이란 조건절을 내달은 문장들은 지금 진부해졌다. 이 조건절을 만족시키기 위해 던졌던 물음에 이윽고 ‘세계란 없습니다’하고 수긍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수긍으로부터 가장 위기에 닥뜨린 것은 존재 자체이기보단 예술일지도 모른다. 이때 예술이란 인상주의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진실한 세계란 이렇다고 호령하며 세계를 규정짓던 것이자, 과거의 세계에는 없을 수밖에 없으나 미래에 도래해야만 할 것을 당기는 것으로, ‘지금’ 세계의 불충분함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상상력을 행사하던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전체 세계가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믿기보다는 사소한 부분의 장소들을 종용하고 있으며, 세계에 관한 입장을 지니기보단 스스로에 대한 입장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반대로 예술이 가능하기 위해서 예술이 할 것은 세계의 부분들을 상냥하게 포착하고 위무하기보다는 스리슬쩍 소실된 세계를 다시 창설하는 일에 나서는 것 아닐까. 그런 한에서 ⟪멀티탭: 감각을 연결하기⟫는 감각이 연결될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창설하는 데 모든 주의와 신경을 기울이는 기획이 된다.
두 그룹으로 나눠져 실행된 전시는 각각 연결의 의미를 재고하는 데 한편을, 그리고 그들이 마땅히 연결될 지평을 조물造物하는데 한편을 쓰고 있다. 먼저 <Happy Hour>의 주된 작업에 등장한, 좁은 구멍으로 바라보는 존재들은 오히려 서로 교류하지 않으며 차라리 서로를 외면하는 데 매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작업이 연결을 다시 사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연결’의 흔한 의미가 붙이고 또 묶는 것을 통해서 하나의 구성을 만드는 것일 때, 작업은 그것이 ‘연결’이 아니라 말한다. 종합된 것은 차이를 지닌 개체를 사납게 질식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긴밀히 연결될 수 없고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작업은 알고 있다. 연결은 종합과 통일이란 매혹을 애써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를 같은 감각으로 본다. 개체 간의 연결이 아닌, 개체가 동일한 지평에 함께 있음으로써 연결이 발생한다. 제가끔 다르지만 같은 감각으로 세계를 본다는 점에서 하나의 세계에 서 있다. 세계를 하나의 관점으로 보겠다는 선언, 그것은 세계를 하나의 그림으로 포착할 수 있다는 역량의 선언이자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으로서 세계를 창립시키는 물질적인 사유가 된다. 작업 안에는 좁은 구멍으로 세계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있다. 다시.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있는 그곳은 없었던 세계이다.
반면 <병풍풍경>의 세계의 창설은 정반대의 방향에서 착수된다. 다시 말해서 <Happy Hour>가 존재자들의 역량을 보여줬다면 <병풍풍경>은 지각地殼 자체의 힘으로, 즉 조물의 역량으로 ‘연결’을 만든다. 이때 작업이 선택한 방법은 나열을 통해 계열을 형성하는 것이다. 나열이란 같은 것들의 연속이거나, 연속적인 것을 같은 것으로 만드는 서술의 방식이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순서를 부여할 수 있는, 질적으로도 구분되지 않는 그래서 같은 것으로 취급되는 서수들의 계열이다. 영상, 회화, 조각의 무차별적인 나열은 그것들이 모두 같은 것에 속하거나 뻗어 나가는 벡터 공간의 지점들임을 알린다. 어떤 것을 중앙으로 보는 관점은 틀린 것이다. 그것들은 어디를 가리키든 모두 ‘중간’일 뿐이다. 어떤 조작도 가해지지 않은 것 같은 금속 물질 자체에서부터, 그보다 점진적인 형태의 조각, 급진적인 도시에 속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이질적인 것이기에 ‘세계’라는 이름을 제외하고는 달리 그들을 하나의 유類로 분류하지 못한다. 그렇게 스스로가 서로의 지평임을 현시하고 세계를 창립한다. 물질 스스로 세계를 창립할 수 있다는 것은, <Happy Hour>가 보여준, 세계가 존재한다는 선언으로써 세계를 창립했던 존재의 역량이 독단적인 것은 아님을 증언해준다. 같은 전시에 속한 양방향은 이렇게 교착으로써 세계의 창립을 확약한다.
‘세계를 바꾸려면’이라는 조건절로 돌아가자. 왜 예술이 가망 없는 이 조건절에 헌신해야 하는가. 인간과 정치는 이미 그것을 유예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예술의 다른 이름이 늘 가망없는 희망에 대한 헌신인 탓이다. 가능한 것에 대한 실천이 아니라, 불가능에 대한 상상을 그는 몫으로 갖는다. 그렇게 예술이 주선에 나서야 두 유예는, 그때 해소될 것이다. 제가끔 서 있어도 우리들은 세계다. / 조재연
-이 글은 『퍼블릭아트』 12월 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