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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사랑이 더 아름답다 그리는 병을 앓는 우리. 그럼에도 끝까지 당신을 미워하는 일이 가능하긴 한 걸까. 잔인한 기억 사이사이에 고운 말이 떠오르고, 용서 못 할 사건을 기어이 가볍게 만들 미련이 자라날 때면 과거는 도무지 다정을 면치 못했다. 받은 상처로 결별을 짓기보다는 다하지 못했던 미안함으로 희망을 이룩한다. 이 미력한 희망이 남아 ‘미래‘는 쉬이 연기된다. 만약에 좀 더 성숙해진 채로 우리가 다시 만나고, 만약에 과거의 잘못을 수정하며, 만약에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결론이 과연 다를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무결한 환상을 지탱하는 지지체 ‘만약에‘는, 어떤 노도怒濤도 우릴 미래로 끌고 가지 않도록 지켜준다.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가리켰던 미래라는 낱말의 신세는 희망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처량해지고 말았다. 잠든 모든 이의 얼굴이 선하다고 믿는, 진흙 위에서 무구한 것이 피어나거나 검은 비닐봉지조차 가끔은 주황 지느러미가 빛나는 금붕어를 쏟아내는 일이 여전히 있는 세상.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하루 또 하루 희망을 발견하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
비정규직, 취업난, 더욱 극심해진 빈부격차, 인류사 내내 지속된 전쟁, 동물 착취, 환경오염, 코로나19 등이 어떤 징표인지 이젠 누구나 알고 있다. 변혁에 가담하는 이뿐 아니라 시인도 교황도 심지어 기업인과 부호의 입에서조차 자본주의는 비판되고, 더는 세계가 유지될 수 없다 고백된다. 그러나 징표가 ‘부정‘으로 이행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마다 버젓이 희망이 고개를 들었던 까닭이다. 부조리가 범람하는 세계에도 합리적인 요소들이 꿋꿋이 잔여하고, 이 합리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존재가 있으며, 그를 바라보며 이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온 힘을 다해 믿는 이들이 비로소 희망을 지켜낸다. 절망 어딘가에도 사랑스러운 삶이 있어 세계를 이해하고 화해에 나선다. 그리고 그로써 종말은 연기된다. 희망이 증빙하는 것은 절망적인 징표에도 불구하고 존속을 그치지 않는 세계의 완고함이다. 그러니 뱃머리를 돌리기로 한다. 미래를 향하는 자에게 희망은 품어야 할 대상이 아닌 숙청肅淸의 대상이다. 김연재, 유지원(연신내 사는)의 <아포칼립스 모으기>는 희망을 질식시키기 위해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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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담긴 묵시록은 세계의 멸망을 예비하기 위해서 쓰이지 않았다. 외려 묵시록은 내일 없는 오늘의 지긋한 반복이 지금의 세계에 남겨진 전부임을 알리기 위해, 의연한 인류에게 비관을 안기기 위해 작성됐다. 두 작가는 각각의 묵시록을 지닌다. 하나의 묵시록은 오늘에, 다른 하나의 묵시록은 그보다 먼 곳에 위치한다. 유지원의 작업은 종말이 미래의 상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래해 우리 곁에 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비명이 영도零度가 된 시대에 공표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반면에 그 이후에 올 김연재의 종말은 앞서 나열한 징표 중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했음에도, 변혁 없이 그 징표와 더불어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는 역설 속에서 등장한다. 결국에 종말은 누구에게도 경각을 주지 못하거나, 오직 종말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세계의 최후를 무효로 만든다. 종말 뒤 종말, 그럼에도 오지 않는—극복 당하는— 종말은 두제곱된 종말의 형식을 가리킨다. 전시는 그렇게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한 번 더 사살을 가하는 일과 같이 도무지 희망을 남겨두지 않기로 한다.
재림을 기다려온 신학의 오래된 과제는 예수가 인류에게 다시 나타난다면 어떻게 그를 구주로 식별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 곤란은 종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지원이 언급한 1922년 다미선교회 시한부 종말론 사건에서, 종말이 거짓으로 밝혀진 다음날 뉴스 앵커는 말했다.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종말의 불착不着으로 여길 수 있을까. 외려 어느 것도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종말의 증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어느 시절엔 난과 매화와 같은 물체들의 비명이 그 증거가 돼줬다. 그러나 사물은 이제 서화로 옮겨진 이후에도 심상을 전파하지 않는다. 노예는 스스로를 노예로 인지조차 할 수 없기에 더욱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암묵만이 세계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므로 침묵에 영영 내포된 사람들. 언제부터인가 지금이 몇 시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시계와 지도를 지니고 있는 탓은 아니다. 두 연유는, 세계엔 지금을 넘어 미래로 이행할 시간도, 외부에 또 다른 곳이 존재한다는 목적지도 전부 사라져버린 데 있다.
충혈된 눈과 비대해진 머리, 외부 기관을 통하지 않으면 더는 숨 쉴 수 없는 폐, 오염된 대기로 인해 곳곳 수포로 가득한 피부. 보기만 해도 역겨운, 김연재의 묵시록 속 인류는 그럼에도 희망의 표본이다. 연민과 동정은 거절된다. 이 모습이 파국에도 어김없이 또 다행이도 살아남은 인류의 모습을 증언하는 까닭이다. 모든 괴기함은 괴기한 만큼 패배의 흉터가 아닌 승리의 훈장으로 기록된다. 외려 패배한 것은 종말이기에 모든 부정은 의심 속에 놓인다. 그러니 인류는 변천한 신체와 매달린 기관으로도 세계를 포기하려 하지 않을 테다. 오직 인류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비극 속에서도 눈 맞출 두 눈이 존재하고, 포개질 손이 남아 있어 우리에게 사랑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뿐. 그로써 생은 지속되고 세계의 비극을 야기한 징표들 역시 존속될 것이다. 김연재의 작업은 상상된 아포칼립스를 제시하는 것을 넘어, 그 파국 속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인류의 모습을 통해 종말의 경험으로 무언가 달라질 것이란 기대조차 종식시킨다. 종말의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묵시록이 어떤 교훈도 남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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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포칼립스가 모두 모인 뒤에도 종말은 실패로 남는다. 전시는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기대도, 이 빌어먹을 세상이 심판을 받을 것이란 울분도 모조리 저버리는 희망으로써, 어떤 ‘희망‘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러나 희망을 고갈시킨 이 비정함에 따뜻함이 없다고 여기진 않기로 한다. 도리어 도망치고 싶었던 곳에서 외로이 견디도록 만들었던 희망을 믿지 않기로 한다. 희망이란 말이 간신히 남아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이 가로막히고,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 못할 때면, 절망만이 끝까지 비관하는 자들을 품곤 했으니까. 전시는 우리에게 필요했던 절망을 건넨다. 중력과 싸우는 대신 편안히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는 비애에 따뜻함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까. 오로지 지옥만이 악을 벌하기에, 지옥문이 열리는 날 쏟아지는 염화만이 우리를 데울 것이라는 말을 우리는 믿을 수 있을까. 지나간 사랑이 더 아름답다 그리는 병을 앓는 우리. 그럼에도 끝까지 당신을 미워하려 한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이런 예언을 듣고, 모든 표정이 사라지는 한밤중에. / 조재연
참조
김승희, 「희망이 외롭다1」, 『희망이 외롭다』, 문학동네, 2012
진은영, 「모두 사라졌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서동진, 『변증법의 낮잠』, 꾸리에, 2014
이 글은 ⟪아포칼립스 모으기⟫ 전시 서문으로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