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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 이도 사랑받은 이도 결국 파멸로 끝을 맺는, 구원이라고 도대체 찾아볼 수 없는 비제의 <카르멘>에서 니체는 완전하게 구원된 무언가를 찾아내 소리 낸다. 그것은 다른 모든 인물들이 파멸했기에 오히려 구원될 수 있었던 혹은 파멸로부터 달성된 자연적 사랑이다. “결국에는 사랑을, 자연으로 다시 옮겨진 사랑을! ‘고결한 처녀’의 사랑이 아니고! 센타의 감상도 아닌! (…) 바로 그래서 그 사랑에는 자연이 깃들어 있는 겁니다.”(『바그너의 경우』) 인간이 진행하는 사랑보다 인간의 주검 뒤에 의미만이 남은 사랑은, 그리고 의미보다 ‘자연’이 강조된 사랑에서 이러한 증명은 반드시 인간으로 구성된 주체의 역사에서 주체인 인간을 패퇴시키고, 자연(적 사랑)이란 주체의 입회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란 주체에 종속된 ‘사랑’은 비로소 …의 사랑이란 소유격을 벗어나 오롯한 의미를 되찾으며 그로부터 자연은 소생한다. 그렇게 실천에서 주체가 해소될 때, 의미는 강조되며 억압되었던 것은 부활하거나 회생回生한다.
작가 손배영의 작업은 적어도 그런 과정을 경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Natural life: 전시하다 →>(2016)는 작품 안에 무엇도 담지 않으면서-뱉어내면서- 무엇이든 담는다. 각도에 따라서 검은 면이었다가 반사경이기를 반복하는, 또 오직 두꺼운 백색의 프레임만을 강조하는 그것은 작품의-혹은 작업의- 주체가 예술가라는 망령 같은 소문을 무너뜨리고, 예술이란 ‘안’으로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동시에 예술의 ‘외부’를 뱉어낸다는 주장만을 담는다. <목적어처럼 보이는 동사에 관한 연구>(2016)에서도 그는 예술가를 감각에 들어오게끔 남기지 않는다. 흰색의 벽에 백색의 페인트를 오랜 시간 동안 칠하는 행위가 반복될 때, 그곳에 남는 것은 예술가라는 주체가 해소된 예술 자체거나, 예술이 생각하는 예술의 존재 형식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그의 예술은 주체에도 목적에도 속하지 않고 세계와 관계한다. 그저 그의 작업은 두제곱된 예술, 즉, 예술 자체에 대한 예술로서, 작업은 대상이 되는 자료들뿐만 아니라 스스로인 예술의 존재 형식을 담는다.
그렇다면 예술에서 주체의 해소와 예술 자체에 대한 강조 그 후, 부활하거나 회생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때 몸을 일으키는 것은 ‘세계’이다. 작품이 굴곡과 제약 있는 거울로써 비췄거나, 모든 빛을 폐쇄하고 밖으로 뱉은 것으로서의 세계(<Natural life: 전시하다 →>, 2016), 아무 것도 남지 않아 세계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목적어처럼 보이는 동사에 관한 연구>, 2016), 가치와 무가치無價値라는 방황 사이의 세계(<한입만行>, 2017), 의미 과정과 의미 원천으로서의 세계(<마담의 주방>, 2017). 이 모든 것 안에서 마침내 등장하고야 마는 ‘세계’는 주체 없는 그의 작품 속에서 단일한 주체이다. 하나의 그림으로써 포착될 수 있는 하나의 세계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미시적으로 분절되고 파편된 세계의 일부만이 있거나 세계는 없다고 윽박지르는 오늘날의 세계-관觀에, 그는 기꺼이 대립항에 절박하고 섬세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의 서사가 <사소한 완강함을 위한 쇼룸>(2018)에 도달했을 때, 예술은 세계에게 했던 오래된 약속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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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예술 프로젝트 ⟪골목유랑기⟫에서 손배영은 <사소한 완강한 쇼룸>이라는 전시를 퍼포먼스(이윤희, <유랑하는 춤>, 2018)와 영화(최은, <술래잡는 골목>, 2018)에게 주어질 ‘상황’으로서 배열했다. 충남 공주의 한 골목에 위치한, 이제는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공간을 그는 전시 공간으로 택했다. 만약 골목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성격, 즉 아직은 자본과 문명 이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 너무나 인간적인 노스탤지어를 함유하고 있는 대상으로서 골목을 사유했더라면 전시는 한 편의 휴먼 드라마같이 지루하고 순진하게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골목은 불온하다. 골목이 도시의 여집합으로서 잔존된 장소를 넘어 적극적으로 형성하는 장소로서 사유될 때, 전시는 힘을 갖는다. 골목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남겨진 것, 이동의 과정 속에 밀려난 것”이지만 동시에 “환경에 변화와 상관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불온한 상태”(전시 리플렛)로 운동한다. 다시 말해서, 골목과 골목의 그들은 자본의 피해자이거나 잡아먹히길 욕망하는 제물이거나 혹은 자본으로부터 탈락한 주변부가 아니다. 오히려 골목들은 자본의 대립항이며, 인간을 패퇴시키고 사물들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공간이면서, 인간에 종속되지 않은 세계를 비장하게 드러내는 진지가 된다.
전시는 <사소한 완강한 쇼룸>이라는 제목 아래에서 동명同名의 배열과 <제자리에 있거나 제자리가 아닌 것들의 위치>라는 배열을 갖는다. 두 배열의 명명은 전시가 전제하는 골목의 개념을 뒷받침한다. 그는 골목이 대로(大路)와 차이를 일이키는 지점을 사물들이 제자리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가진 합목적성을 위배한다는 것에서 찾는다. 사물은 피투(Geworfenheit)된 존재이지만 인간의 피투성과 달리 그들은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에 던져질 때 늘 목적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문’이 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존재가 그것을 통해 공간을 연결시키는 목적과 합치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그 목적에서만 문이자 도구이다. 그러나 골목에서는 다르다. 사물들은 모두 목적을 위배한 채로 자리를 지킨다. 그들은 인간이 부여한 목적의 세계, 쓸모의 세계와 불화한다.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투기’된 쓰레기-도구라는 지위에서 탈락한-이지만, 전시의 관점에서 그것은 당당히 자연自然-도구라는 지위에서 탈출한-이 된다. 그래서 골목들은 피해자의 얼굴을 결코 하지 않는다. 그들은 목적 없이 내던져진 인간이 스스로를 미래에 기투(Entwurf)하듯 이미 기투성을 가진 주체다. 그래서 인간의 관점에서 골목과 골목의 사물들이라는 ‘사소함’은 자연이 된 사물들에게는 가장 비장한 ‘완강함’의 다른 이름일 것이고, ‘완강함’은 어떤 ‘사소함’에대한 절박한 표현일 것이다.
먼저 <사소한 완강함 쇼룸>에 들어서면 어디에도 없는 재봉틀 소리가 들린다. 움직이는 것은 미러볼과 조명뿐이고 그것이 재봉틀 소리를 낸다고 믿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재봉된 천들은 어김없이 도착해 여러 사물의 모양을 알린다. 이는 어디선가 마르크스가 말했던 무정부적 생산이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었는지 모르는-심지어 그 상품의 노동자조차도- 상품들은 마치 제 스스로 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상품은 사물이지만 사물 이상의 것이 되는 물신성을 갖는다. 이러한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에게는 자본이 만들어낸 인간에 대한 소외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지만, 전시에서는 사물이 가진 주체성을 증언하는 가장 신빙성 있는 증거가 된다. 이는 인간에 종속되지 않은 사물들이 기어코 ‘피투’라는 과거의 시원始原적인 시점까지 돌아가, 탄생조차 인간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선언하는 장면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시를 포함한 프로젝트의 첫 장면으로서 퍼포먼스와 필름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불어 넣는다.
다음으로 <제자리에 있거나 제자리가 아닌 것들의 위치>에서는 사물들의 배열만으로 구획된 공간을 골목으로 전환시켜 놓는다. 골목의 개념을 증명하듯, 원래 골목에 스스로만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사물들은 배치되어 하나의 골목을 형성한다. 첫 장면이 피투의 장면을 되돌려 놓았다면, 이 배열은 사물들의 ‘기투’를 재현한다. 인간이 목적 없이 내던져있다는 사실에 방황하다가 스스로 목적을 창립하는 것처럼, 여기서 사물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창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목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사물들을 다시 오독하게 될 것이다. 다만,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투쟁적으로 또 지사志士적으로 지금의 지배를 거스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플라스틱 병으로 만들어진 풍향계는 바람 없이 돌아간다. 바람 없이 돌아가는 풍향계는 바람의 방향을 알리기는커녕, 스스로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세상에 없던 바람을 만들어 낸다. 변색된 퍼즐 매트는 살아있음을 승인받기 위해서 오랫동안 요청한 것 같다. 그는 정말 태양으로부터 엽록소를 만들어낸 것처럼 선험적인 녹색을 향유한다. 그는 타인의 발자국을 새기는 것을 거절하고, 오직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발자국, 발자취를 지어낸다. 그뿐이 아니다. 솟아나고 포개져 차단을 말하는 문들, 날짜를 잊은 달력들, 표독한 이미지들, 이러한 모든 사물들이 제거할 수 없는 불변항으로서의 위치를 그리고 새롭게 창립한 목적을 선언하며 공고히 서있다. 그곳에 인간이 끼어들 틈이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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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리고 그것이 전체의 표현과 구성이 될 때, 작가가 개입한 여지-혹은 개입할 여지-는 은폐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소한 완강함을 위한 쇼룸>에서 예술가라는 주체는 작가의 서사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김없이 주체를 해소시킨다. 그러나 같은 해소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해소되는 것은 주체의 자리를 홀로 독점했었던 인간이라는 한 주체의 전체다. 그래서 주체의 해소에 따라서 강조되는 의미의 농도도 더욱 고약하게 짙어진다. 모든 혁명이 기껏해야 전체주의이거나 파시즘으로 종결되었을 때, 근대성에 대한 모든 비판이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었을 때 그러니까 모든 악의 출처가 반드시 인간임이 입증되었을 때, 인간은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인간을 믿어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적대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인간은 미련한 사랑의 주인공처럼 스스로에게 이별을 짓지 못했다. 그래서 그 후에 절박하게 마련한 예술이라는 해방의 약속 역시, 깊은 오해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예술이 약속한 해방이 인간의 해방이라고만 믿을 수 있을까.
예술이 해방을 약속한 것은 오히려 사물일지도 모른다. 뭐니뭐니해도 세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사물이기에, 패착을 되돌리는 것은, 다시 말해서 세계를 복원하는 것은 인간적인 방향이 아니라 사물적인 방향에서 시작할 수 있다. 골목이 따뜻해 보이는 것은 그것이 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사실 사물들이 우위에 선 것에서 기인됐을 것이다. 예술의 유토피아는 더 나은 세계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더 나은 세계를 말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세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선언해야만 한다. 예술은 그래서 지금의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사물은 세계를 복원하기 위해서 분투 중이고, 세계의 희망은 그곳에 지금 머무른다. 그러므로 주체의 해소가 불러일으키는 예술 자체에 대한 강조의 지점은 예술이 오래전에 세계와 했던 진실된 약속을 상기시키는 일이거나 해방이라는 약속의 실현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제 ‘세계’는 부활하거나 회생한다. 그것은 없다고 믿어왔거나 잃어버렸다고 여겨왔던 세계의 일부가-혹은 외부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일부가 돌아온다면 그것은 세계를 하나의 그림으로 이을 것이며, 외부가 돌아온다면 그것은 세계의 경계를 확실히 하는 것으로 한 편의 세계를 확정할 것이다.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온갖 개별성과 특수성들은 소실되고 오직 상품과 상품이 아닌 것으로 분별되었던 듬성한 세계에서-혹은 그런 세계이기에 세계란 파악할 수 없다고 의심되거나, 세계란 없다고 선언되었던 곳에서- 말과 이름을 잃었던, 자유를 잃었던 사물들이 제 말, 제 이름 그리고 자유를 가지고 귀환한다. 그리고 세계는 잃었던 파편을 되찾음으로써 그간 분절되거나 포기된 의미들을 다시 창궐시킨다. 이때 힘을 얻은 의미란 억압된 것들에 대한 해방의 가능성, 저항의 쇄신, 인간을 초과하는 세계에 대한 가능성 그리하여 결국에는 부정을 통한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가능성이다. 그렇게 끝끝내 약속은 진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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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적어놓고 작가 손배영에 대한 말을 할 수 있을까 몇 번을 망설였다.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생각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지우는 것으로써 작업에 헌시하는 바를 비평은 요약할 수 있을까. 그것이 비평에 몫에 맞을까. 그의 예술은 물리적 의미에서 가장 ‘순수’해져 예술의 목소리만 들린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사실, 예술이 만든 예술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이 그를 늘 좋아하게 만드는 점이지만, 그러나 그것 말고도 그가 좋은 이유는 어느 비장한 구석에서도 늘 ‘기쁨’을 담기 때문이다. 그의 골목의 모습이라면 인간의 종말을 필사적으로 막을 필요 없이, 감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쓸쓸함과 절망 속에서도 기쁨을 담는 그는 미련을 정지시키고 패배가 실패가 아니라는 역설을 전달해준다. 우리는 어쩌면 성공을 통해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패배를 인정하는 것을 통해 진보할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무릎을 세우는 것보다 꿇는 것으로써 무언가를 구원해오지 않았을까. / 조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