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케로서의 물, 원자, 수數 그리고 최근의 렙톤에서 쿼크까지, 더는 분할할 수도 가감할 수도 없는 원질에 대한 발견은 끊임없이 분할되고 가감되는, 즉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치않는 진실한 것을 탐색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 세계가 ‘진실’히 실재하는 것이라면 이 표면 아래 사무친 것 중에서 그 진실을 야기하는 물질이 있을 것이라는 태도는, 이제 가상에 접착된 미술에게도 받아들여진다. 가상이 아름다움을 지어내고, 그때의 아름다움이 진실한 것이라면, 가상의 표면 아래 사무친 것 중에선 마찬가지로 어떤 변치않는 원질이 있을 것이라는 것. ⟪정보의 하늘에 가상의 그림자가 비추다⟫는 분명 소문으로만 떠돌던 원질을 가상의 끝까지 다가가 발견해낸다.
끝까지 다가간다는 것의 가장 정면의 방법은 어떤 것을 셀 수 없이 확대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더는 확대될 수 없는 픽셀들이 발견된다. 물결치는 곡선에도, 거친 사포 위를 구를 수 있는 구에도, 그것이 평면이라면 그 끝에는 픽셀들이 있다. 저 굽어짐과 매끈함이란 가상이며 사실은 사각의 픽셀들로 구성된 것이기에 모두 거짓이라고 말한다면, 그 어떤 것도 구성하지 않은 픽셀이란 진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한에서 주슬아의 ⟨란마⟩는 평면의 진실이 어느 곳을 출처로 갖는지를 지정한다. 어떤 이미지도 ⟨란마⟩에서 보이는 단순한 하나의 점, 픽셀을 자신의 출처로 갖는다. 설고은의 ⟨Study on Four-Sided Polygons⟩ 연작은 이러한 픽셀들이 구성으로 떠나기 위해 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가상이 의뭉스러운 곳을 향해 가더라도, 진실한 가상이 언제나 존재함은 이러한 시발점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원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확대가 아니라 그것을 쪼개거나 분쇄해 볼 수도 있다. 더 이상 약분이나 훼손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가감할 수 없는 원질을 만나게 된다. 윤두현의 ⟨무제⟩는 컴퓨터 바탕화면의 자연풍경이나 스마트폰 바탕화면 이미지를 다운로드해서 그것들의 원본의 흔적이 소실될 때까지 쪼개고 분쇄한 뒤, 더 이상 가감할 수 없는 그 잔해들을 한 데 모았다. 박현정의 ⟨image⟩ 연작은 디지털 드로잉을 분쇄해서 더 이상 가감할 수 없는 잔해이자 단위인 ‘컴포넌트’들을 내보인다. 이 잔해들은 파괴의 연속 작용이 정지되었을 때 잔존한 것이 아니라, 더는 파괴가 불가능한 것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화면상의 이미지가 그것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조작이 가해진 것이라 하더라도, 진실을 전달하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 결국에 조금도 침식시킬 수 없었던 이 잔해들이 있는 까닭이다.
어느 누구도 추상적으로 규정되는 수, 직선 그리고 도형과 같은 것들이 그 개념에 어긋나지 않고 이념대로 현실에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일상의 구조에서 감각적으로 발견되는 기하학들은 모두 어떤 환영과 같은 조작이 가해진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진실한 이념을 본따 그러한 거짓된 현실의 구조물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외려 거짓된 것들을 본 이후에야 그런 진실된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김민경의 ⟨포스터케이스⟩ 연작은 현실에서 거짓이 진실의 문이 되는 관계를 구조물로 표현했다. 거짓은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 그 위를 덮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드물지만 자주 거짓은 진실을 지키고 보존시키기 위해서 자리한다. 그 거짓으로 말미암아, 그곳을 파헤치기만 한다면 사무친 진실을 얻을 수 있다.
진실한 것들이 아릅답다고 하지만, 어떤 허구가, 어떤 조작이, 그러니까 어떤 가상이 아릅답기 시작하자, 스러진 딱한 진실들 사이로 거닐며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누구의 혀끝으로도 닿을 수 없는 쓴 것과 달콤함이, 어디도 침착沈着해낼 수 없는 그을음과 눈부심이 이만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기에 동요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이 자리에서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거기선 아름답기만 하다. 다가서지 않을 때 이 동요가 남아있을 수 있다는 염려를 무릅쓰고 다가서야만 한다. 이 가상조차 진실한 것들을 원소로 갖는 것이라고, 그 출처가 아름다움과 동일한 것이기에 이 가상을 감히 소홀히 여길 수 없었던 것이라고 뜸들이며 전하고 싶은 까닭이다. 아름다움이란 이다지도 사무친 것이기를.
『월간미술』 2021년 1월호에 부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