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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하고 어리석게 말하자면, 민중은 변혁에 있어서 최초심最初審이 아니다. 예심 내지 최초심에서 늘 먼저 등장한 것은 지식인, 엘리트와 같은 몫 있는 자들이었다. 로베스피에르가 그랬고, 마르크스가 그랬고, 레닌과 마오가 그랬다. 최초심에서 가장 먼저 세계를 고발하고 소장을 전달하는 것은, 민중의 몫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대로, 송사가 진행되고 비로소 그것의 효력을 확정시킬 최종심을 담당하는 것은 늘 민중이었다. 민중을 적으로 돌렸을 때 프랑스혁명은 기각되었고, 새로운 인간의 창조라는 목표가 민중을 폭력과 극단으로 내몰았을 때 공산주의는 두 번째 심을 통과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변혁에 있어서 최종심급은 민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혁명에 대한 믿음이란, 몫 있는 자들이 주창하는 그것의 이론적 완성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생산하게 될 주체, 즉 민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역시 혁명에 대한 믿음을 민중이라는 주체에 대한 믿음으로 두는 쪽에 가깝다. 그에게 민중은 그 누구와도 동등한 지능을 가진 주체로 인정된다. 그들이 때때로 미흡해 보이거나 절하되는 이유는 앎―지식―을 특정한 논리적 구조에 국한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가 ‘지각하는 것’과 ‘이미 지각한 것을 관계 시키는 일’일 때, 앎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이미 충분히 ‘누구나’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니 그들을, 알지 못하지만 본능과 순수 감성으로 분노하거나 궐기하는 존재로만 포착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들은 부당함에 대해서 분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이 분개는 타인의 부당함에 대해서 슬픔을 느끼고 그 부당함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역량을 지닌 민중이 자신의 평등한 지적 능력을 실험하고 시현하는 것을 통해서 정치POLITIQUE를 만들어 낸다고 믿는다.
랑시에르에게 특히 정치는 감성의 분할과 관련된다. 사유와 감각은 대립하지 않는다. 관념적인 사유는 감각적인 사물들을 연관시키고 관계시키는 것이기에, 사유는 감각과 동일선 상에 놓인다. 그렇기에 정치는 이미 분할된(사물들의 기존 배치와 관계) 감성을 다시 분할(사물들의 다른 배치와 관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감성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동일한 원리를 가지게 된다. 미학체제의 예술은 감각적인 것의 (재)분할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예술은 정치가 무엇에 관계하는지, 정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아이스테시스』는 예술과 정치에 대해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이치를 긴밀하게 담고 있다. 특히 『아이스테시스』가 전개되는 내내 민중, 사회(적), 민주·공화주의 등의 낱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 점 역시 이를 반영한다. 어쩌면 그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정치의 얘기를 모두 배제한 채 경제만으로 정치의 정체를 드러내듯, 『아이스테시스』는 감성의 분할을 정치적으로 다루지 않음으로써 정치를 사고해내는 가장 정치적인 저작일지도 모른다.
『아이스테시스』의 민중은 그자체가 주체로 등장하기 보다는 어떤 주체성을 연상하는 작업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 진입해 있는 예술가들은 민중의 역량에 주목해 그들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때 예술은 민중을 전범典範처럼 다룬다. 민중은 과거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 혹은 귀족만이 소유한다고 믿어졌던 고귀함과 초연함을 홀연히 지니고 있다. 그들이 천재에 비유되는 것은 사소한 일이다. 민중은 예술이 도달해야할 지위에 이미 도착해있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이를 따라서 민중의 역량이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보거나 충분한 것으로 볼 때, 이러한 긍정은 심미화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사회의 논리에 따라 작품의 주체를 보는 것은 주체를 얼어붙게 만들지 모르지만, 그것을 생략한 채 주체를 보는 일은 주체와 함께 사회를 미화시키는 일이 된다. 노동자가 되지 말고 주인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노동자는 ‘명령’에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진취성과 창의력을 발휘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예술가라고 따뜻한 지지를 건네는 우리 자본주의와 랑시에르의 시선은 다를까. 이 글은 결국 이점에 주목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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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의 분할’은 랑시에르가 『불화』(1995)에서 처음 도입한 이후 『감성의 분할』(2000)에서 이론화한 개념으로서 그의 정치학과 미학의 중심 범주이다. 그에게 정치는 일차적으로 “우선 공통의 무대에 대한 갈등이고 이러한 무대에 현존하는 이들의 존재 및 자격에 대한 갈등”(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옮김, 『불화』, 도서출판 길, 2015, 59쪽)으로 정의된다. 그것이 공통의 무대에 대한 갈등인 이유는 존재들에게 정치의 무대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귀족과 평민의 정치의 무대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정치의 무대는 동일하지 않다. 정치는 로고스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부터 국가의 업무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는 존재들의 일이다. 그러나 피지배자들은 로고스가 없거나 미흡하기 때문에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름을 가진 이들의 언어와 이름 없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사이에는 언어적 대화 상황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토론을 위한 규칙도 기호 체계”(『불화』, 56쪽)도 존재할 수 없다. 이는 지배가 감각적인 것의 질서를 조직하는 일임을 알려준다.
그렇기에 피지배자들은 무대에 동일하게 서기 위해서 그들의 말을 이해하고, 그들처럼 언어를 수행하고 기호를 사용한다. 피지배자들은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에 지배자의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명령을 한다는 것은, 이미 피지배자들이 명령을 감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신체와 사유 능력을 전제한 것으로 전화되어 수용될 수 있다. 피지배자들이 그러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던 이들과 동일한 능력을 나누어 가지면서, 즉 말하는 존재자들로 스스로 구성되면서 다른 질서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가 두 계급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더 나아가 누가 자격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갈등, 그리고 그 자격을 부여하는 질서인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둘러싼 갈등이라는 것을 다시 보여준다. 지배자들의 지배를 알아듣게 만들려고 하는 명령은 두 계급을 ‘분할partage’시키지만, 동시에 그것은 필요한 감각을 ‘나눔partage’하는 단초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의 문제는 일차적으로는 기존 정치(치안)의 작위적이었던 감각적인 분할을 폭로하고 다른 종류의 감각적인 나눔으로 대체하는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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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에 기초하여 그리스부터 오늘날까지의 미학의 역사를 세 가지 체제의 형태로 구별한다. 첫 번째 체제는 ‘이미지의 윤리적 체제’이다. 이 체제에서 예술은 고유한 의미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기예의 지위로서 규정된다. 이때 예술은 얼마나 대상과 유사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측정된다. 진상을 표현했을 때, 대상과 닮음의 정도가 높을 때 그것은 좋은 예술이 된다. 이 체제는 주로 플라톤의 철학과 관계된다. 두 번째는 ‘기예들의 재현적 체제’이다. 여기에서도 예술은 기예의 지위를 크게 못 벗어났지만 더 이상 대상과의 닮음을 기준으로 측정되지는 않는다. 이때의 기준은 다른 기예들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독자적인 규칙과 규범을 특징으로 갖는다. 회화는 회화의 규칙과 규범에 따라, 조각은 조각의 규칙과 규범에 따라 그것이 얼마나 적절한 재현을 했는지에 따라 평가 받는다. 이 체제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관계된다.
세 번째는 칸트 이후에 성립한 ‘예술의 미학적 체제’이다. 이 체제에서 예술은 비로소 고유한 의미로서의 예술로 성립된다. 이 예술은 모방(mimesis)과 재현의 기준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으며 감성의 분할이 예술을 규정하는 주요한 기준이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은 일상적으로 존재했던 기존의 감성의 ‘분할partage’과 단절하면서 새로운 감성의 ‘나눔partage’을 만들어 낸다. 이는 정치의 내적인 원리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예술은 정치와 무관한 것도 아니며, 정치에 예속적인 것도 아니고 그 자체가 정치적인 실천을 ‘함축’하는 활동이 된다. 정치가 감각적인 형식이고 감각적인 질서를 만드는 것일 때, 예술 역시 동일한 것을 내재적인 활동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스테시스』에서 민중 개념이 드러나는 방식 역시 이러한 감성의 분할이라는 원리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 민중은 기존의 배치와 단절하고 새로운 나눔 속에 배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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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아이스테시스』에서 사용하는 “민중”의 원어를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 『아이스테시스』를 번역한 박기순 교수는 프랑스어인 peuple을 내적인 관점에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집단적 주체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 ‘민중’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여기서 ‘내적’인 관점이란 두 가지 의미의 층위로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 민중은 그저 다수multitúdo를 가리키는 이름과는 구별된다. 계급투쟁이, 주어진 계급이 수행하는 투쟁이 아니라 계급을 만들어내는 투쟁이듯이 민중은 소여가 아니라 ‘내적’으로 민중이라는 통합된 다수를 생성해내려는 운동 위에서만 존재한다—따라서 민중은 결과물로서 존재하는 지위가 아니라 운동 과정에서만 존재했다 사라지는 과정으로서의 주체이다—. 두 번째, 그 운동은 기존의 감성의 분할과 단절하고 새로운 감성의 분할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는 ‘내적’인 거리를 확인하고 삭제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이 때 내적인 거리란 기존의 감성의 분할이 상정하고 있는 평등함과 불평함의 거리이다.
감성의 분할과 결부된 예술의 미학 체제에서 가장 큰 변화 중에 하나는 민중이 재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림들의 가치를 규정하게 되는 것은 재현된 인물들의 고귀함이 아니라 —천재나 민중의— 자유를 옮길 수 있는 능력이었다.”(자크 랑시에르, 박기순 옮김, 「거리의 어린 신들」, 『아이스테시스』, 미출간, 2019) 이때 새로운 예술이 기입하는 것은 병렬된 천재와 민중의 평등함뿐 아니라 고귀함을 지닌 존재와 민중의 동일함이다. 이전에도 민중의 삶의 장면에 심취한 귀족 수집가들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낮은 등급으로 분류된 회화의 지위에서였고, 오히려 민중을 표현한 회화가 때때로 뛰어난 이유는 주제보다 장인의 능숙함에 기인했다. 그러나 이제 자연은 알렉산드로스의 천막 내지 황홀한 장소의 모퉁이와, 농촌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이 자유라는 가치의 내적인 거리를 삭제해야함을 의미했다. 고귀한 인물들에게만 자유가 있다고 분할의 선을 그었던 감성의 질서는 이제 민중도 역시 동일한 자유를 갖는다고 선언하는 새로운 감성의 분할로 대체된다.
그리고 이 변화는 공화주의(혁명)의 최종심급과 관계된다. 공화주의의 확정은 민중이 공화주의적일 때 가능하다. 혁명은 단순히 세계의 질서를 변화시키는 것뿐 아니라 감각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그로부터 그것에 해당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공화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세계에서 “그 유산을 구성하는 작품들은 예속의 생산물이자 그것의 숭배”(「거리의 어린 신들」, 『아이스테시스』)여서는 안 된다. 영웅 내지 역사의 분기점과 같은 사건들이 주제가 되는 회화는 공화주의 이후 벽에 걸릴 수 없다. 예술은 이제 예속과 숭배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표현해야하고, 예술은 공화주의적 인간을 창출할 수 있는 공화주의적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예술이 정치에 종사한다거나 지도적指導的 도식에 종속된 것으로 파악하면 안 될 것이다. 예술이 공화주의적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공화주의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내용도 담고 있지 않는 것을 통해 새로운 분할의 짜임새를 전달하는 것으로써 공화주의적 교육을 제공한다. 고유한 장소에 전시함으로써 작품은 직접 해석가능성이 가장 적고 동시에 가장 비유적인 것이 되며, 내용을 삭제하는 것으로써 자유와 평등은 전달된다. 이것은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민중들에게 전달되는 내용이지만, 전달되기 한참 전에 민중으로부터 발견—발명—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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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의가 민중이 획득한 ‘고귀한 자와의 동일한 자격’이라는, 민중의 지위에 관한 새로운 감성의 분할이라면 다음은 민중의 역량에 대한 것이다. 민중이 지닌 능력은 무엇보다 ‘초연함’으로 강조된다.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한 시종의 형상이다. 전사들은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 사비니의 여인들은 그러한 전투를 중지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시종은 그 모든 것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시종은 “행위에 초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 시종은 전사들과 그 전사들을 떼어놓고 있는 여인들 모두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거리의 어린 신들」, 『아이스테시스』) 드뷔로가 구현한 민중인 피에로의 고유한 역량 역시 초연함으로 표현된다. 민중은 “더 폭력적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폭력 행사를 유발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더 초연”하고 “다른 어떤 것만큼이나 할 만한 것이기에 그냥 자신이 하고 있는 도망치는 연인들에 대한 추격에서 극도의 초연함을 보여준다.”(「불가능의 곡예사들」, 『아이스테시스』) 그리고 초연함을 불러일으키는 형식은 행위와 모든 동기가 분리되어있다는 새로운 감성의 분할에 기초해 있다.
초연함 즉, 행위와 동기의 분리라는 형식이 의미하는 것은 민중이 더 이상 목적론적 세계관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적론적 세계관은 존재자의 본래의 자리 내지 본래의 목적의 지정을 강제한다. 이때 목적론은 그 존재자가 존재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존재론적 측면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은 또한 윤리적 측면과 관계된다. 존재자가 만약 목적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불의하고 부정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론적 세계관은 지배자가 지배를 행사하기를, 피지배자에게 피지배를 행사당하기를 강제한다. 만약 피지배자가 그것에 저항하거나 자유를 행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이며 불의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은 행위와 동기의 분리를 통해 그러한 지배를 벗어나 자유를 획득한다. 위대한 것에서만 위대한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며, 비천한 것에서도 위대한 것이 나올 수 있다. 민중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위대한 자는 비천해질 수 있으며 비천한 자가 위대한 자가 될 수도 있다. 어떤 동기에도 구애받지 않고 민중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된다. 이로써 예술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감성의 분할에서 민중을 탈각시켜 목적에 마땅히 자유로운 새로운 감성의 분할을 제시한다.
격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시종은 상황에 무관심하며 자신이 원하는 행위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피에로는 폭력에 가담하면서도 폭력에 초연하고 무관심하다. 민중이 아닌 전사들, 귀족들 그리고 부르주아는 모두 목적론적 존재에 가깝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전사는 존재하고, 귀족들은 자신들의 고귀함을 상승시키거나 유지하는 것에 예속된다. 또한 부르주아는 자본적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서만 부르주아일 수 있다. 그러나 민중은 무엇으로부터 민중이 되는가. 민중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그 자체로는 어떤 중요성을 갖지 않는 사람”(「거리의 어린 신들」, 『아이스테시스』)이기 때문에 민중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기에 아무 것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한다. “민주주의적 연설과 바람에 의한 나뭇잎들의 무심한 흔들림 사이에 정확히 몸짓들과 자세들의 무한한 민중이 존재한다.”(「표면의 거장」, 『아이스테시스』)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기에 그는 아무 것에나 해당하는 무한한 전체이다.
그리고 민중의 두 번째 역량은 초연함으로부터 발현하는 탁월함이다. 민중은 초연함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무관심한 어떤 일을 탁월하게 실행하는 자이다.”(「불가능의 곡예사들」, 『아이스테시스』) 상품의 물신성과 노동의 소외라는 논의에서 강조되듯 상품은 스스로의 생산을 익명으로만 표현하고 노동자의 자취를 숨긴다. 예술가의 작업을 볼 때와는 다르게, 누구도 상품을 보고 그것의 생산자와 생산 과정을 물음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상품의 물신성과 소외가 발생한다. 자본은, 상품은, 생산은 노동자(민중)에게 무관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지워지고 소외되는 ‘일’이었지만 민중은 늘 탁월하게 수행했다. 민중의 산물들만이 역사 안에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이 탁월함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초연함이다. 심지어 이 초연함은 노동이란 예속된 순간에서조차 민중은 자유를 보존한다. 계획에 의하면 대칭적이었던 고딕 건축물들은 민중에 의해서 종종 실패되었고 그로부터 더 가치있었다. 민중은 “최초의 설계를 고려하지 않고 (…) 많은 소박한 작은 형상들로 장식”을 채워넣으며 “아주 작은 악동의 조각가처럼 모두 하나같이 자신들의 표식을 새기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사회적 예술로서의 장식예술: 신전, 집, 공장」, 『아이스테시스』).
아무것도 아닌 민중은 “위대한 시인이며 볼테르, 보마르셰나 바이런을 능가하는 재능을 가진 집단적 존재이다. 민중은 또한 자신 안에 수많은 배우들, 수많은 얼굴들, 수많은 표정들과 자세들을 품고 있는 배우”(「불가능의 곡예사들」, 『아이스테시스』)이기도 하다. 캔버스 앞에서, 원고지 안에서 주체가 되는 것이 고귀한 종족들, 영웅들 역사적 사건이 아닐 때, 표현의 주체는 필연적으로 민중이며, 표현하고자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민중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무엇에 있어서 탁월한지에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 기존의 탁월함은 목적에 정확하게 부합될 때 인정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탁월함은 그러한 목적에 연루된 것은 아니다. 탁월함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목적에 연루되지 않기 때문에 자유가 적극적으로 발현되는 것에 대한 탁월함이다. 사물과 사물, 정신과 사물 사이에 놓인 위계들을 철폐하고 새로운 감각의 나눔을 시도하려했던 예술가에게 민중은 모범이다. 그는 초연해있기에 예술가들 보다 먼저 사물들을 평등하게 바라본다. 그렇기에 조각가는 모범을 따르기 위해 “도래할 전체의 단편”(「표면의 거장」, 『아이스테시스』)으로 민중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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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테시스』에서 민중의 개념을 읽는 것은 어떤 점에 있어서 불충분해 보인다. 왜냐하면 정작 찾을 수 있는 것은 위와 같은 민중이 가지게 된 지위와 역량뿐 민중 자체가 무엇인지 개념적 정의로써 서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민중의 개념적 정의에 가까운 것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그 자체로는 어떤 중요성을 갖지 않는 사람들”(「거리의 어린 신들」, 『아이스테시스』) 정도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불충분하지 않다. 랑시에르가 이런 방식으로 민중을 표상하는 것은 그들이 개념적 정의로 서술될 수 없으며 그런 방식으로 서술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즉 민중은 사회학적으로 식별될 수 있는 주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민,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집단은 오직 사회학적이란 무대에서 바라보았을 때만 민중이다. 민중은 일의적으로 규정될 수 없으며, 그것에 대한 정의는 늘 자신과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개념적 정의는 늘 그것의 대상으로부터 미끄러지며, 미끄러짐을 통해 민중에 들어가지 못하는 또다른 빈자들을 생산해낸다. 그러니 민중 개념을 규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민중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아니라 민중이란 개념을 둘러싼 무대를 보이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보여주는 무대는 기존에 민중을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분할했던 감성의 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감성의 분할이다. 그러니 민중은 어떠한 서술적 개념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라는 무대에 오르지 못한—그래서 동일한 무대에 올라가려는—, 더불어 주체로 셈해지지 못했던 모든 이들이라는 ‘무대 밖’의 모습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거리의 어린 신들」, 『아이스테시스』)이란 의미는 동등하지 않았던 분할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러나 그가 가진 초연함, 초연함에서 오는 자유 그리고 탁월함이라는 역량을 통해서―동등함을 선언하는 새로운 감성의 분할을 통해서― ‘전체’가 되는 주체들이 민중으로 파악된다. 이를 정리하면 민중이란 기존의 감성의 질서(치안)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그 자체로는 어떤 중요성을 갖지 않은 주체이면서도 오직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서도 가능성을 갖는 전체로 선언되는 주체이다. ‘아무 것도 아님’을 예술가들과 랑시에르는 어느 것에서도 예속되지 않은 상태로 파악했고 그것의 첫 번째 역량으로 초연함을 지목했다. 이 초연함은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모든 것의 평등에 이미 도달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시킨다. 또한 이 자유는 어디에서나 구현될 수 있는 탁월함이라는 민중의 두 번째 역량을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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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의 민중에 대한 논의는 민중에 입장에서 낙관적이다. 특히 민중은 지식인이나 엘리트들과 동일한 사유 능력을 갖고 있기에 필요한 것은 계몽이 아니라 그들이 동등하다는 인정뿐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더더욱 두드러진다. 『아이스테시스』에서는 철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이 성취하고자 했던 자유, 사물들에 대한 평등함을 선취한 주체로서 그러한 지위와 역량이 제시된다. 비슷한 대목은 『해방된 관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피착취자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착취의 법칙을 설명해줄 필요를 거의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존의 상태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피지배자들이 계속 복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해방된 관객』, 현실문화, 2016, 83쪽)라고 말할 때 민중은 『불화』나 『아이스테시스』에서처럼 이미 동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피착취(피지배) 상태에 놓여있는가. 그것은 “상태를 변형시킬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해방된 관객』, 84쪽) 그런데 “그런 능력에 대한 감정은 그들이 감각적 자료들의 구성을 변화시키고 기존 세계의 내부에 다가올 세계의 형태들을 건설하는 정치적 과정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방된 관객』, 84쪽)하고 있기 때문에 피지배자가 해야 할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보이고, 선언하는 것이면 족하다. 이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거리를 삭제하는 것으로써 앞에서 논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때에 의심스러운 것은 그것이 ‘비판’이라는 개념을 기각한다는 것이다. 민중들은 이미 보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민중들이 보고 있는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고, 민중들은 기만당하고 있다고 믿는다. 기존의 감성의 분할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그와 결부된 인식하고 감각하는 방식을 문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은 현재의 감성의 구조를 체계화하고 새로운 사유를 발명하는 것이다. 이를 가리키는 이름이 바로 비판이었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논의에서는 이미 그 새로움이 필요 없거나 도래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중에게는 새로운 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감성들을 동등하게 감각할 수 있다는 선언만 있으면 된다. 민중은 기존의 방식과 결별할 필요도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볼 필요도 없다. 그저 이미 동등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니 동등한 지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이는 어쩌면 자본주의의 심미화 경향에 닿아 보인다. 예술의 타자였던 경제는 언젠가부터 예술과 가장 긴밀하고 유사한 것이 되었다. 경제는 그 어떤 인문학자나 예술가보다도 인문학에 신경을 쓴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노동자가 노동자의 지위에 정체되어 있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제 자본주의는 임노동을 철폐하고 과거에는 프로 야구선수에게나 적용될 연봉제를 도입한다. 노동자는 기예가 아니라 예술가처럼 창조성, 진취성, 열정을 지녀야 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숙련도가 아니라 자소서와 외부활동과 같은 포트폴리오를 통해서 자신의 예술가성을 드러내야만 한다. 먹고 살기 위한 일이지만 세계는 노동을 작품을 만드는 예술처럼 대하기를 강요한다. 그 탓에 노동의 이름도 바뀌어왔다. 주방장은 쉐프로, 제빵공은 파티셰로, 커피 뽑는 노동자는 바리스타로, 오토바이 배달원은 라이더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랑시에르가 논의하고 있는 동등한 능력과 자격을 갖는 새로운 감성의 분할로의 대체와 그 원리가 동일하다. 민중은 천재와 동등하다. 민중은 자신의 예속(생산 관계)에 초연하며, 그 초연함으로부터 자유(창조성, 진취성, 열정)를 획득한다. 그로부터 그는 탁월하다. 그는 예속 관계에서 조차 자신만의 표식(쉐프, 파티셰, 바리스타, 라이더)을 새겨 놓는다. 심지어 자본이 노동자에게 경영자적 마인드를 가지라 할 때, 회사에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말할 때 자본은 먼저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같은 무대에 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랑시에르의 원리와 자본주의의 심미화의 원리는 얼마나 다른가.
이는 랑시에르의 논의가 비판을 기각하기 때문에 발생한 오차이다. 동등한 자격으로서 무대에 올라가는 일은 평등과 자유를 구성하는 일이면서도, 그때 비판을 통한 새로운 사유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동등한 자격의 주체는 기존의 시각을 수용하는 일도 함축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주체는 변혁이란 방향을 띠지 않고도, 그러니까 피착취 아래에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민중이 동등한 자격과 지위 그리고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는 일과 사회가 올바른 ‘방향’을 향해 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감각하는 방식을 문제 삼으면서도 공산주의 가설이라는 방향을 선택했다. 랑시에르에게 자유와 평등은 있지만 자유와 평등의 방향은 설정되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와 평등은 물론 현 세계에서 미흡하거나 허위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이 획득된다고 해서 진보의 방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랑시에르는 이에 대해서 ‘분개’라는 개념의 반박 지점을 가지고 있다. 분개는 타인의 부당함에 대해서 느끼는 슬픔 그리고 그 부당함을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랑시에르의 주체화의 방향을 설정한다. 아마 몇 차례의 촛불집회는 랑시에르가 파악하고 민중의 개념과 역량 그리고 분개의 맥락과 일치할 것이다. 자신들에게 할당된 자리와 장소로부터 이탈하여 기존의 감성의 분할이 지정한 정체성에서부터 벗어난 모습들, 전문적 지식과 관계되지 않으면서도 그와 동등한 지위를 획득한 그 자리의 말들이 그 유사성을 보여준다. 그곳에서는 정치에서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평등과 자유가 이미 놓여있었다.
다시 교만하고 어리석게 말하자면, 그것은 그뿐이다. 광우병에 대한 의심이 있는 소고기에 대한 검역 강화 혹은 수입 품목의 일부 철폐에서부터 그리고 세월호 재조사와 박근혜의 탄핵까지, 이는 눈부신 성과이지만 그것은 모두 원인에 대한 원인을 물음하지 않는 선에서 그친다. 모든 것이 물음될 수는 있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광우병 쇠고기가 들어오는 것과 세월호 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잘못된 통치자 때문이지 그러한 광우병 쇠고기가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세월호 사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국정농단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세계를 향해서 묻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광장에 모인 민중은 사실 “OO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들의 모임”과 같은 범람하는 의제 집단들의 합류였다. 의제들의 최대 공약수가 있었을 뿐이지 ‘통합된 다수’는 없었던 곳에서 사회를 총체화하는 정치적 결정은 불가능하다. ‘통합된 다수’와 사회의 총체화는 감각을 문제 삼으면서도 기존에 없던 사유를 발명하는 ‘비판’을 상수로 한다. 의제 집단으로 정체되어 합류했던 그들은 과연 ‘통합된 다수’인 민중이었을까. 그래도 비판은 필요 없을까. / 조재연
*참조
-서동진, 「두 개의 인민」, 『변증법의 낮잠』, 꾸리에, 2014
-서동진, 「반ANTI-비IN-미학AESTHETICS: 랑시에르의 미학주의적 기획의 한계」,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 현실문화A,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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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 오윤성 옮김, 『감성의 분할』, 도서출판 비, 2014
-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옮김, 『불화』, 도서출판 길, 2015
, 박기순 옮김
-자크 랑시에르, 박기순 옮김,『아이스테시스』, 미출판, 2019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해방된 관객』, 현실문화, 2016
-박기순, 「랑시에르와 민중 개념」, 『진보평론』 제59호 봄호, 2014
-서동진, 「노동하는 예술, 투쟁하는 예술」, 『미술생산자모임 두 번째 자료집』, 미술생산자모임,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