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나는 닿지 않는 등_정의철: Look at me now

정의철, ⟪Look at me now⟫, 학고재 아트센터, 2021. 10. 12~10. 19, 전시 포스터

멀쩡한 사람도 누구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체로 정신병자밖에 없다.
대리언 리더, 배성민 옮김, 『광기』, 까치,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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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계에는 얼굴이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하루엔 낯을 가지지 않은 존재들이 장기적으로 오가고 있었다. 사물을 통과한 사실과 장소는 자욱으로 남아 언제든 돌이켜볼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건넨 낯은 도무지 잔류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커피 머신과 졸음을 참을 줄 아는 포스기, 그들처럼 살과 피를 가진 기계들. 인형人形 없이 운영되는 가게는 조금도 새롭지 않다. ‘안녕하세요’라는 안부를 묻는 인사에 이제 모두가 물음표를 떼었듯이, 혹은 녹음에 부친 인사에 대꾸가 허무한 것처럼, 우리가 일으키는 파문엔 서로의 주름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니 이따금 당신이 달라진 게 없냐며 모습 중 어디가 변하였는지를 물을 때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지난날과 오늘을 대차대조할 노력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도, 예민한 관찰력을 지니지 않은 연유도 아니었다. 그 물음만이 얼굴을 분실한 세계를 떠올리게 만들어, 상실의 죄책을 상기시킨다. 얼굴은 신체의 마중물이니 낯의 탈거奪去는 신체의 탈거. 그때마다 넉넉하지 않은 입을 벌린 사물들이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너도 사물이지, 너도 사물이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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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믿게 하는 예술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조심스럽다. 그것이 터무니없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었다가 조급하게 예술을 원망하게 될까 봐 그렇다. 그러나 예술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바꾼다는 이야기라면 믿어보기로 했다. 아니 전력으로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도미야마 다에코(富山妙子)의 자취가 그 말을 증명한다. 도미야마는 분명 수많은 삶을 바꿔냈다. 그는 전환 시대의 투사였다. 1921년 일본 고베에서 출생한 도미야마는 세계의 폭력과 불의에 맞서며 격동의 역사를 화폭에 증언했다. 일제 강제 노역과 위안부, 탄광 노동자의 비극, 라틴 아메리카의 군부 독재, 5·18을 포함한 한국의 70, 80년대 민주화운동, 후쿠시마원전사고 등이 작가가 온몸, 온 생을 거쳐 부딪쳤던 문제였다. 그림을 보고 그림의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그림이 우리를 봐주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느낌. 사람들은 도미야마를 “어디를 보아도 우리 편 하나 보이지 않는 먹먹함 속에서 우리 모습을 봐주고, 우리 이야기를 해주는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기억했다. 비극이 삶을 휘저어 지나간 후에도 살아갈 힘은 남아있다는 것. 도미야마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역시 이 소회와 같지 않을까. 슬픈 장면을 그릴 때면 작가는 종종 나비를 그려넣었다. 스산한 후쿠오카형무소, 강제동원 희생자의 주검, 피가 엉긴 철조망 위로도 나비는 팔랑거렸다. 비극은 결국 우리 생에서 나비 하나, 나비가 올 봄 하나 쫓아내지 못한다. 작가의 그림은 폐허 어딘가에도 꽃향기를 맡도록 만든다. 그런 도미야마가 8월 18일 별세했다.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우리라면 조금 더 오래 예술을 믿어볼 수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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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누구도 비웃지 않게 된다_정희영: 짐승에 이르기를

정희영 기획, ⟪짐승에 이르기를⟫, 합정지구, 2021. 5. 15~6. 13, 전시 포스터(디자인: 이산도)

경고문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기소당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추방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총살당할 것이다.
지은이의 명령에 따라, 군사령관 G. G.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핀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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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약하다고 외칠 수는 없을까, 각자의 강함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투사처럼 굽히지 않는 의지로 세상을 변혁하는 이야기를 나는 도무지 할 수가 없다. 세계를 몇 개의 명제로 단호하게 진단하고, 적을 규탄하는 위대한 일은 내게 할당되지 못한다. 내 생김새는 오랫동안 비겁하고 비천하다. 광장의 절정 위에서 나는 늘 비켜서 있었다. 누군가 밀치기도 전에 인도에 먼저 올랐던 그리고 매쓰거운 분무를 몇 분 버티지도 않던 나는 궐련 어느 쪽에 입을 맞추어야 할지 몰랐을 때부터 내 자격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내 몸도 타인의 물건도 숨기는 데 익숙한 내 앞은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그래서 무언가 쓸 때마다 나는 늘 에둘러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우회에도 애써 걷는 까닭은 비겁은 차치하더라도 비천으로 구할 수 있는 의미가 있단 절박함에서였다. 고귀하고 완고함이란 조금도 없는 천함과 미약에서 길어낼 답이 어딘가엔 존재한다는 것. 외려 강함을 서로 앞다투어 외치는 이들이 초래한 세상에서 오직 미력으로써 발견할 가치가 있다는 것. 이 멍에 같은 희망을 뿌리칠 길은 없었다. 그러니 비겁함 때문에 내가 아니어도 너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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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오의 끝에서

내 비겁과 작음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 나는 자격 미달의 운동권이었다. 비극이 아닌 조그만 일에 분개하는 나는 늘 비켜서 있었다. 광장을 향하기로 마음을 먹는 일은 더뎠고 현장에서는 충돌이 두려워 앞장서지 못했다. 정당에 적을 둔지 오래였지만 누군가 나의 허물을 모르고 덜컥 동지라 부르게 될까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투사처럼 나서는 이를 볼 때면 열등감에 괴로웠다. 나는 무얼 바라 비겁을 삼키며, 이다지도 작은 것일까. 자멸감이 무릎에 닿았을 때 즘 서동진의 글을 읽었다. “자본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식이 노동 운동은 아니다. 유령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와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이는, 환상을 만드는 힘에 저항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이 말에 목이 메였다. 나의 처신을 변명할 수 있는 문장을 찾아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은 부족하지만 언제가 해결을 바라며 잊지 않기 위한 기록으로서 비망록을 남길 수 있다는 기쁨이었다. 나약한 지금의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꼭 가담할 실천이 존재한다는 기쁨을, 그의 글로부터 발견했다. 그렇게 그의 글을 베끼고, 발제문을 쓰듯 연습하고, 각주에 그의 이름을 올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지껏 남루를 벗어나지 못한 오늘, 서동진의 첫 기획전 <안전가옥에서의 밤>(7. 16~28 빌라해밀톤) 소식을 듣고 나의 처음이 떠올랐다. 또다시 내 비겁과 작음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 나는 내가 변혁의 자리에서 가장 앞서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문장이 있어, 선두가 아니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그 자리에 남겠다는 결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가 말했듯 행복을 추종하지 않는 삶, 그 생을 찌꺼기까지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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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는 희망_김연재, 유지원: 아포칼립스 모으기

김연재, 유지원, ⟪아포칼립스 모으기⟫, 갤러리175, 2021. 7. 22~8. 5,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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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사랑이 아름답다 그리는 병을 앓는 우리. 그럼에도 끝까지 당신을 미워하는 일이 가능하긴 걸까. 잔인한 기억 사이사이에 고운 말이 떠오르고, 용서 사건을 기어이 가볍게 만들 미련이 자라날 때면 과거는 도무지 다정을 면치 못했다. 받은 상처로 결별을 짓기보다는 다하지 못했던 미안함으로 희망을 이룩한다. 미력한 희망이 남아미래 쉬이 연기된다. 만약에 성숙해진 채로 우리가 다시 만나고, 만약에 과거의 잘못을 수정하며, 만약에 다시 행복해질 있다면 결론이 과연 다를까. 그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무결한 환상을 지탱하는 지지체만약에, 어떤 노도怒濤도 우릴 미래로 끌고 가지 않도록 지켜준다.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가리켰던 미래라는 낱말의 신세는 희망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처량해지고 말았다. 잠든 모든 이의 얼굴이 선하다고 믿는, 진흙 위에서 무구한 것이 피어나거나 검은 비닐봉지조차 가끔은 주황 지느러미가 빛나는 금붕어를 쏟아내는 일이 여전히 있는 세상.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하루 하루 희망을 발견하는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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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없는 마음

인간의 감정이 결국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서글프다. 시곗바늘 대신 심장 소리가 좁은 방을 채웠던 숱한 새벽이 고작 물질 기관의 일이라면, 우리에겐 예술보다 신경 전달 물질을 조절할 향정신성 의약품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김학량의 개인전 <짱돌, 살구 씨, 호미>(5. 5~6. 5 전주 서학동사진관)를 나오며 서두에 했던 말을 취소하기로 했다. 전시는 제목처럼 소담치 못한 사물의 초상을 화폭으로 옮겼다. 서사도 색면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도 부러 지어냄 없이 오직 사물의 실체로만 구성되는 그림. 그러나 그 실체 때문에 사물은 추상의 낱말보다 마음을 더 정확하게 발음한다. 감정은 개체 내부의 표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자주 그리운 누군가에게 물들어갈 때, 함께 있는 동안 그 애틋함에 타일의 먼지처럼 흔들릴 때, 불안이 혓바늘처럼 움틀 때면, 물듦, 먼지, 흔들림, 바늘, 움틂이라는 외부에 놓인 물질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선 마음은 도무지 스스로를 고백할 수 없다. 김학량의 그림은, 말재간 없는 감정이 빌릴 사물을 인간의 사전에 추가한다. 나는 마음 어딘가 이름을 지니지 못한 감정에 짱돌, 살구 씨, 호미를 빌려와 발음해본다. “발견한 사물을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반대로 사물에게 나를 들켰다.” 작가가 들킨 것은 사물을 닮은 마음이었을 테다. 감정이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보다, 누군가의 감정에 정확히 가닿을 수 없다는 말이 나를 더 서글프게 만든다. 이해받지 못한 이가 있을 때면 예술은 늘 사물의 처소를 찾았다. 그러니 오해를 면치 못할 일이라 해도 헌신을 그칠 리 없다.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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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었네

화가 정지현, 그는 개인전 <ONE WAY>(4. 14~5. 16 상업화랑)에 깊은 밤 풍경을 목탄으로 담았다. 사람보다 사물이 재잘거리는 시간. 인간 형상(人形)이 제 머물 곳으로 귀향한 자리에 빈 처소만이 남았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한 걸음을 더 옮기는 순간 불행히도 어느 노인과 마주치고 만다. <두 개의 빛>(2021). 밤을 모르는 듯 그는 수레에 폐품을 싣고 귀향과는 먼 곳으로 나선다. 세상 누구도 수레를 끄는 노인의 안부를 물은 적 없었다. 하루를 들여 수거한 사물보다 많은 사람과 마주쳤지만, 누구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안부도 인사도 접근하지 않는 존재는 사물과 구분되지 않기에, 전시장을 나가 사람의 세계로 향하는 일이란 노인은 도무지 할 수 없다. 그를 담은 작업조차 사물의 이름을 하고 있어 인형을 빗겨 지나간다. 정지현은 우리보다 먼저 그와 마주쳤던 모양이다. 어떤 일도 기록에 남고, 무엇도 검색만 한다면 찾을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그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은 그를 유일하게 기억한다. 국가 통계 속에서 이제 가난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력한 물증 앞에서 작품은 더 처연해진다. 절대적인 빈곤이 사라졌다고 믿는 곳에서 가난은 멀고, 드물고, 예외적인 개인의 처지로 남았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클레의 말을 달리 읽어본다. 예술의 책무는 행복만 존재하는 곳일지라도 그곳에 마지막까지 슬픔을 남겨 놓는 일이다. 불행을 기꺼이 껴안기 위해서, 슬픔에 지겹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서, 예술은 여전히 세상에 머문다. 전시장을 나오며 한숨을 쉬려다 참았다. 나는 무슨 권리로 한숨을 쉬는가.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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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Ground

<디딜 곳 없는 사다리>(4. 6~5. 1 드로잉룸)를 보며 트리나 폴러스가 쓴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2009)을 떠올렸다. 여기에는 기둥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수많은 애벌레가 등장한다. 주인공 ‘줄무늬 애벌레’(이하 줄무늬)가 여정의 이유를 묻자 누군가 답했다. “그건 아무도 몰라. 하지만 틀림없이 굉장히 기막힌 것이 있을 거야.” 이에 수긍한 줄무늬는 다른 애벌레처럼 남을 짓밟고 밀치면서 기둥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정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진실만을 깨닫는다. 줄무늬는 기둥을 내려오며 이 사실을 전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다수에게 진실은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기쁨보다 자신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두려움이었다. 꼭대기에 오르려면 기어오르는 게 아닌 날아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줄무늬는 비로소 나비가 된다. 여기서 ‘꼭대기’는 더 이상 기둥의 정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초에 먹고 자라는 것보다 더 나은 생활이 분명 있을 거라던 줄무늬의 꿈에 가깝다. 삶에는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남을 짓밟고 밀치며 오르는 경쟁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 그런 한에서 ‘디딜 곳 없는 사다리’는 상승을 소망하는 이에게는 서글픈 낱말일지 모르나, 삶을 달리 보는 이에게는 어떤 비관도 개입되지 않는다. 그것은 외려 희망에 어울린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이자 사진작가 안부의 출품작 <겹>(2020)은 ‘오르기’보다 ‘밀기’에 적합해 보였다. 작업은 위계를 갈망하며 세계의 높이에 다가가기보다는 삶의 너비를 재기 위한 바퀴를 지닌다. 줄무늬는 정상에서 추락한 애벌레의 주검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오르기를 포기하고 쌓인 의자를 내려놓으면, 우린 눈을 맞추며 함께 앉아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동화의 말미에서 다른 애벌레 역시 지상으로 내려와 나비가 된다. 두려움을 확신으로 바꾼 건 이런 문장이었다. “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리는 여기 함께 앉을 테다.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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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꺼 잠에서 깨는 일_박지형: 멀고도 먼

박지형 기획, ⟪멀고도 먼⟫, 온수공간, 2021,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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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 하는 것들과 보고 싶은 것들은 모두 밤, 밤으로 가야 한다. 감각할 수 없었던 것들과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둠 안에 있다. 우리는 형편에 따라 필요했던 일종의 것들을 빛을 통해 알아채 왔을 테지만, 형편에 따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빛은 어떤 시간이 흘러도 은닉이나 유예도 없이, 외려 은닉이나 유예를 하지 않음으로써 완벽한 무지를 유지시켰다. 바랄 수 없는 것이라면 빛은 어떤 것도 드러내 주지 않는다. 빛은 이것에 합의를 초과한 어떤 사용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에 아무것도 없고 그저 지나왔던 대로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양초란 그저 실내에 있어야 한다거나, 교통 공간은 교통 공간일 뿐이니 이곳으로 집단이 내려와서는 안 된다고 전하는 일은 모두 빛으로부터의 식별에서 야기된다. 그러나 불을 꺼 눈을 잃자, 부딪치지 않던 것들과 부닥치게 된다. 거닐지 않을 곳에서 걷게 되고, 붙잡지 않을 것을 붙잡게 된다. 은밀해지려는 부빔은 이제 가능하다. 사랑하므로, 화면을 재우고 커튼을 친다. 그제서야 새빨간 입술. 사랑함으로 불을 끄고 있다. 불을 끄면 잠을 깨워주지 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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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hwp

“유년 시절, 어머니께서는 청력이 좋지 못하셨습니다.” 내 이력서는 대부분 여기서 시작했다. 당신은 내가 듣는 많은 소리를 듣지 못했고, 내가 건네는 말들은 늘 희미해진 후에야 가닿았다. 같은 것을 듣지 못할 때면 나는 내가 듣는 것을 스스로 의심해야 했고,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면 반드시 전해진다는 말은 믿음 잃은 동화처럼 들렸다. 학년이 바뀌면 나는 친하게 지내던 이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나의 느낌과 기억이 그와 같을 것이란 생각은 도무지 책임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해의 층위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그렇게 나는 일찍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외롭다는 말은 아끼기로 했다. 결국 서로에게 타자일 수밖에 없는 결론 앞에서도, 이해를 그치지 않는 일들이 남아있을 때까지는, 또 일상적 언어가 이해에 부침에 겪을 때마다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는 일들이 남아있는 때까지는. 쉽게 외로워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론보다 결심에 더 가까운. 예술은 그런 한에서 내 이야기 같았다. 나희덕이 마크 로스코의 <No.16>(1958)을 보고 쓴 시 「마크 로스코」(『파일명 서정시』, 2018)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마음을 소등한 자에게만 보이는/희미한 빛은/끝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비극을 두제곱한다. 그는 자신의 등불로는 타인의 느낌과 의미를 비출 수 없다는 결론을 알기에 이내 등을 끄고 말았다. 첫 번째 비극이다. 그러나 등이 꺼져 주위가 어두워지자, 마침내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예술의 빛이다. 그러나 결국에 그 역시 “끝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제곱 된 비극. 하지만 그에게 이제 그러한 결론은 중요치 않다. “벽이 못을 간신히 삼키듯” 이미 그는 결심했으므로. “누군가에겐 순진해 보이더라도 이해에 가닿을 것이라는 예술의 힘에 대한 믿음이 제 삶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예술과 가까운 삶만이 저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내 이력서는 대부분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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