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안이 엄중할수록 말은 주춤거린다. 세월호 사태는 사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사유의 단절점으로 남았지만, 그 이후의 사유가 온전한 말이 되지 못할 거라는 의심을 견디기 힘들고 진실에 누가 될까봐 불안에 주춤거렸다. 그래서 주변의 용기 있는 벗들의 표현과 몸짓에 지지나 환호와 같은 반응 따위의 침묵이 변명씩이나 된다는 듯이 자위하곤 했다. 여전히 의심과 불안이 존재하지만, 글을 놓기로 한 이유는 이번 글쓰기가 어쨌거나 비망록이 될 것이란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비망록이란 “지금으로서는 미처 해결할 수 없는 물음을 대하면서 당장은 해결될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며 그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둔 것”이기에 나는 이곳에 사유해야할 과제를 남기고 싶다.
다시 한 번, 전체에 대하여; 영화 <당통(Danton), 1983>
지난 12월 10일 서울시는 서울시민인권헌장 폐기를 결정했다.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시민위원회를 결성해 수차례의 회의를 모았고, 인권헌장의 내용 역시 특이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헌법과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부터의 연역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인권헌장에 대한 격렬한 반대를 소통·합의의 부재의 반증으로 이해한 것에서 발생했다. 민주주의의 정치란 소통과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하는 정치이기에 반대가 격렬하다면 그것은 서울시민인권헌장의 추진이 충분히 민주적이지 못했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므로 재고하여 충분한 소통과 합의를 거쳐야한다는 주장은 그자체로 민주적이면서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 찝찝한 일이고 분통스런 느낌 또한 제공한다. 그리고 그 느낌은 영화 <당통>이 표상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TAKE A MEMO 01
11년 10월 16일, 월가 점령 시위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68혁명을 언급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 그는 그곳에서 대중들과 작게는 변하지 말 것을 크게는 더러 더 순수하고 아름다워지기를 약속했다.
저 약속을 때때로 상기할 때면 작년 이맘때 즈음이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철도 민영화 이야기로 열을 내고 있었다. 단순한 어떤 대상이 존재하는 투쟁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안부를 물으며 스스로를 반성에 열을 냈던 시기였다. 그동안의 구태한 운동 방식을 정면에서 고치려고 했었고, 침묵과 외면이 부끄러워 남몰래 새벽에 대자보를 붙이고 사라졌던 우리에게 그전으로는 절대로 방향을 돌릴 수도 복구시킬 수도 없던 ‘사건’같은 시기였다.
나도 대자보 한편을 썼더랬다. 운이 좋아 화제가 되었었고, 미디어에서도 여러 번 보도가 됐었다. 너는 왜 안 나가냐라고 액션을 강조하던 친구에게도 이게 나의 운동이야라고 오래간만에 반박할 기회가 되기도 했던 때였다. 그건 정말 나의 운동이었다. 마르크스가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 운동. 그때 나는 글이 그 운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떤 달필이나 셀럽이나 이론가로부터 깨닫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검증했으니까.
이 회상이 끝나면 약속은 기억 속에서 불쑥 나와 묻는다. 더 순수하고 아름다워졌는가. 변했는가. 그러나 이 물음은 애초에 쉽게 답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순수함이라든지 아름다움이라든지의 따위는 전리품이 아님을. 그저 그 물음 속에서만, 묻는 동안에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임을. 그러므로 저 물음을 계속 갖고 있는 동안에만 겨우 그들을 갖는 것임을.
그래서 내가 반성해야 할 것은 가끔 자주 못나도록 물음을 잊는 것이다.
언어의 배반 -조지프 콘래드 비평으로부터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의 <어둠의 심연>은 진보적인 작품이다. 문명의 저편에 존재하는 어둠의 심연을 찾아 떠나는 말로우의 여정 속에서 유럽 식민주의의 위선과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은 철저하게 고발되며, 근대 유럽의 문명이 낳았다고 표현되는 ‘위대한’ 커츠 대령의 어둠과 동화되어 변태된 모습은 유럽 식민주의가 은폐하는 문명의 이중성과 야만을 반성하게 한다. 소설이 갖고 있는 식민주의에 대한 고발과 인종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근대를 지탱하고 추동시켜온 계몽정신-이성-의 야만성을 드러낸 이러한 전복적 시도들은 작품의 진보성을 입증시키는 데 성공한다. 분명 소설은 당대 어느 문학에서도 찾을 수 없는 비판 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둠의 심연>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콘래드는 헤밍웨이와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문학 작가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1975년 나이지리아의 유명 비평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로부터 소설의 진보성은 추락한다. 아체베의 비평 속에서 콘래드는 당대의 식민사관을 비판하지만, 여전히 그가 발붙이고 있는 지면은 식민사관임이, 여전히 그 곳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이 노출된다. 그가 백인 여성을 대상으로 “애도 중이었다.”라든지 “성숙한 충정과 신뢰 그리 언어의 배반 -조지프 콘래드 비평으로부터 더보기
느낌의 거리_문학의 이유
이해한다는 말은 애초에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말은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 말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이유는 “내가 너와 같아질 수는 없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는 다행스러운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같아 질수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의 간극만큼 “이해는 하지만 용서는 못한다”라는 문법이 존재하고, 그 간극에 실례를 구하며 이해를 ‘양해’라는 말로 고쳐쓰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네가 나같아 질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그래서 상대를 나와 같게 만들려하거나, 상대를 나에 비추어 평가하려고 한다. 이 망각은 단순히 너와 내가 다르다는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 망각은 처음부터 ‘이해한다는 말’과 ‘같아진다는 말’의 목적지가 행동이 아니라 느낌을 향해있기 때문에, 그러나 늘 행동을 향해 걷고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진보의 솔로몬 병
“본인이 굉장히 현명하고 중립적인 듯 포장하여, 누가 봐도 한쪽이 잘못한 일을 양쪽 다 똑같다고 말하며 양쪽의 잘못을 인정하는 쿨함, 냉철한 두뇌를 가진 척 하는 병”은 리그베다 위키백과에 수록된 인터넷 신조어 솔로몬병의 정의다. 이 신조어를 접한 것은 한 친구와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때인데, 그때 친구는 연인 관계에서의 솔로몬 병에 걸린 ‘연인’이 얼마나 비극을 야기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령 이런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