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문장이 있었다. 하나는 1845년 봄에 마르크스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라 쓴 것이며, 다른 하나는 1873년에 랭보가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헛소리 1」)라고 적은 것이었다. 문장은 작가보다 말이 많아, 장르도 목표도 다른 두 명제는 각기 창궐하면서 마침내 조우하여 새로운 명제를 만들어냈다. 사랑이 다시 발명되기 위하여 삶은 바꿔야 하며, 삶을 바꾸기 위해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내 사랑이 불현듯 유산된 것은 ‘새’ 사랑을 납득하지 못하는 세상 때문이니 다시 말해, 사랑이 다시 발명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즉각 응답한 것은 예술을 혁신해야 한다고 했던 아방가르드였지만,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이 명제는 삶에 어느 언저리에서도 정치를 그리고 대문자로 쓴 정치일지도 모를 ‘혁명’을 기어코 찾아내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아 씨팔 이게 다 세상 때문이야 라고 할 수 있게 된 거다.
메리 크리스마스, 유다_보르헤스: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 “타락에 확신이 있는 듯 했다.” -토머스 E.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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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야? 배신을 마주한 사람은 이 말의 주인이 되는 것을 늘 피할 수 없다. 그 주제가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는 그 시점으로부터 모든 스스로를 다시 정립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때 상대는 그 말을 망설였었구나, 불필요했던 그 행동을 해야 했구나 하면서. 이제 그가 이해했던 것은 그가 제일 잘한 ‘오해’가 되고, 그가 했던 미안한 오해들은 그가 제일 잘한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가 쥔 결과물들이 사실은 거짓된 결론들이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그는 배신이란 ‘사건’의 서사를 파악하며 인정할 수 있다.
예술이 상실을 대하는 태도_이준익: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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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를 보는 내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특히, 《노르웨이의 숲》의 하루키의 환영과 싸워야했다. 그 숲과 동주는 많은 유사점이 상실이란 주제로 저들을 대위했다. 시대가 일으키는 불화에서 시대를 지키는 것도, 시대에 저항하는 것도 선택하지 않고 그저 시대가 스스로에게 상실시키는 것을 솔직히 갈음하는 두 작품의 주인공은 분명 닮아있었다. 와타나베 토오루가 놓여진 시간은 일본의 화려한 고도성장 뒤에도 그대로 보존되어있던 맨얼굴 즉, 파시즘과 전체주의 적폐에 대한 저항 운동이 활발했던 전공투세대(全学共世代). 그러나 그는 맨얼굴을 인정하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모두 거절한 채로 인정과 저항 두 태도를 포함한 시대가 스스로에게 상실시키는 문제에 천착한다. 윤동주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시대의 어느 편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못한 채 시대가 상실시키려하는 꿈, 사랑, 서정에 천착한다. 그러나 알듯이 문제는 그들이 맞이하는 풍경도, 결론도 모두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게 물음하고 싶어졌다.
전락(轉落)의 거리_오승욱: 무뢰한
<무뢰한>의 해석의 여지는 적을지도 모른다. 배우들은 정확한 연기를 해냈고 특히 전도연은 시퀸스 어느 곳에서도 압도적이다. 메세지는 명료하며 또한 건조하다. 그래서 해석의 여지는 적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혜경(전도연)의 “진심이야?”라는 짧은 되물음이 불행의 연쇄 앞에서 기어이 희망을 찾아내려는 절박함을 쥐었을 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서사구조는 다른 각도에서라면 더 이야기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제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실존주의의 없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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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 허무하게 되는 때가 있다. 결론이 허무하게 나는 것이 아니라 논쟁 자체가 허무해지는. 그것은 짐짓 이해와 배려의 화신인 양 나타나서 모두를 이해하고 배려하라 하면서 논쟁을 허무한 것으로 만든다. 그런 화신 중에 최근에 가장 모습을 많이 나타내는 것은 ‘개취’나 ‘취존’이라는 어법일 것이다. 정치를 논쟁하는 자리에서도 ‘취존’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면 언짢곤 했다. 모두가 선택을 가졌음으로 우열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써 이 말은 위계와 지배, 정당성을 자처하는 무언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자유와 그것으로 비롯된 선택을 옹호한다. 그리고 이런 옹호에는 과잉된 실존적 사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실존주의를 믿어도 될까. 그렇게 이 글은 시작한다.
사랑에 응답_자크 오디아르: 디판
사랑한다는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나 고맙다라는 말과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고지식하게 같은 의미로 응답되기를 요청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요청하냐는 물음은 단순히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동어반복으로 해소될 수밖에 없으며, 또다시 왜 사랑하냐는 물음 또한 해답을 얻기는 대부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물음을 우리는 언제나 사랑에 빠진 후에야 역으로 던질 수밖에 없으며, 그런한 그가 기꺼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말로밖에 풀릴 수 없는 동어반복에 우리는 다시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관점을 사랑한다는 말에 응답하는 자의 몫으로 돌려야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들은 그가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원인을 타인에게 제공했다고 사고하며,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다라는 인정에 그친다면 그가 요청에 응답하는 일이란 요원할 것이다. 그의 맘속에 샘솟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부심이란 감정일테니까. 그러므로 사랑에 응답하는 놀라운 일은 그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만한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사고하면서, 그것이 자부심으로 향하는 인정으로 향하지 않을 때라는 조건 위에서 일어난다.
사건과 사고_댄 포글먼: 대니 콜린스
“그때 편지를 받았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사건”과 “사고”의 관계는 그 대상의 스케일에 따라 차이가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이는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주체가 받아드리는 태도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이 둘을 나누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 먼저 사고는 주체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 사고라는 대상이 발생하기 전으로 회기하기를 요청한다. 주체는 대상이 발생하기 전의 주변의 상태와 그것에 영향을 받기 전의 스스로에 갈증을 느끼며 갈망한다. 주체는 사고가 그에게서 아무것도 바꾸길 원하지 않으며 그에게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을 무언가다. 반면 사건의 주체는 정반대의 태도를 갖는다. 주체에게 사건은 그것이 좋든 싫든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에게 복구란 의미 없는 것이며 변화는 필연적이다. 이제 주체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실천으로 변화를 매개한다.
기꺼이 불행과 머물기_조지 오웰: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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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부조리하다. 삶의 도처에 부조리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부조리하다. 삼성 반도체 공장서는 필연적으로 백혈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한번쯤 갤럭시를 소유했고 평균적으로 13일을 12시간씩 가혹하게 일하면서도 그런 노동자의 처우에 대한 물음에 “그 정도로 인간의 몸은 망가지지 않는다.”라고 답하는 애플의 대표적인 제조사인 폭스콘에 대해 듣고서도 아이폰의 예술성의 감탄하며 그를 다시 소유했다. 파업이 노동계급이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인상적인 권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피부 위로 걸음하는 대중교통의 파업 소식에는 속이 상했다. 이런 것들이, 아니 그 외에도 무수한 경멸적인 문제들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풍경이란 것이 시야에 그려질 때는 그것을 부정할 뻔 하다가도, 그것이 삐걱될 때마다 무수히 고개를 숙이는 숫자와 기호들의 그래프를 보면서 불안해하고 복구를 기도했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를 끌어안은 인간의 최선은 아마도 자본주의라는 세계를 통체로 부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주변에서 아니면 스스로만이라도 구제되길 바라는 선택들에 골몰하 기꺼이 불행과 머물기_조지 오웰: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 더보기
그래봤자 자본론 – 그래도 자본론 그리고 김수행
몇 개나 되는 혁명이 실패하고 얼마간의 변덕을 기억하는 우리에게 자본이나 자본의 밖에 대한 말들은 언제나 드물게만 물음됐던 것 같다. 그 얼마동안 우리는 그것의 모순들을 마주할 때마다 젠체하듯 또 참신하고 세련되고자 애쓰듯 근대성이니 신자유주의니 하며 그의 이름을 애둘러 피해갔다. 하지만 그간의 우회가 일부의 정밀한 풍경을 묘사했을진 모를 일이지만 그것이 단 한번도 전체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한사코 자본론과 자본주의란 이름으로 돌아온 그간의 기억들을 우리는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될 이런 애두름과 귀환의 몇번의 번복에서도 선생은 언제나 더할나위 없이 언제나 탕아를 맞이하듯 또 홀로 싸우며 열성적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못나도록 자주 그 이름을 잊지만,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렇지만 필연적으로 그는 오래 기억될 것이고 오래 기억하고싶은 선생이었다. 그래봤자 자본론 – 그래도 자본론 그리고 김수행이 있었다.
제거할 수 없는 자리, 자본의 대립항 노동_메이데이에 부침 출처
노동이 유쾌한 적은 대부분 없었던 것 같지만, 오늘날에 그것은 어느 시기보다 불안정하거나, 심각하고 폭력적인 격무 위에 올려져 있거나, 박탈당해진 채로 존재한다. 그래서 모두가 자본주의는 ‘아니다’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모를 일이지만 오늘날 드문 일은 아니다.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운동가의 입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틈틈이 자선기관이나 인도주의기관에 의해서 고발되며 마침내 교황의 입에서도 부정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고통들이 다큐이든 아포리즘이든 대체할 수 없는 정확한 묘사에 의해서 우리의 개탄이나 눈물을 지어낸다고 해서 그것들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회피할 수 없는 물음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의 정치가 자본에 반하거나, 거스를 수 있을까’라고 하는 형태일 것이다. 우리는 지체 없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정치를 떠올릴 수 있지만 91년을 전후로 제거할 수 없는 자리, 자본의 대립항 노동_메이데이에 부침 출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