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센터예술의시간, 유은순 기획전 《오프-타임》
큐레이터 유은순의 전시는 늘 사회의 ‘정상성’과 싸워왔다. 주류와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되는 소수자의 현실이 문제의식이었다. ⟨틱-톡(온수공간 2019)전은 만성 질환자의 관점에서 ‘건강한 몸’을 기준으로 편성된 사회를 돌아봤고, ⟨사이드-워크⟩(윈드밀 2021)전은 신체, 사회적 조건에 따른 이동권 차별과 팬데믹을 계기로 정당화된 타자 혐오를 꼬집었다. 《오프-타임》(6. 8~7. 5 아트센터예술의시간)은 두 전시를 이은 3부작 기획의 마지막 순서다. 강민숙 배윤환 이민선 홍정표 SW기획 총 5인(팀)이 조각, 영상, 설치 등 10점을 선보였다. 지난 기획전이 질병에서 도시로 주제를 확장했다면, 이번 전시는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시스템을 겨냥했다. 효율성을 원리로 이윤을 낳지 않는 모든 가치, 행위를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신자유주의’가 그 주제다.
신자유주의란 국가의 경제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이론이다. 1970년대 이후 불황이 장기화하자, 그 원인에 정부 주도의 산업 정책과 복지 지출이 지적됐다. 여기에 자유방임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가 부상, 오늘날까지 신자유주의란 국가의 경제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이론이다. 1970년대 이후 불황이 장기화하자, 그 원인에 정부 주도의 산업 정책과 복지 지출이 지적됐다. 여기에 자유방임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가 부상, 오늘날까지 헤게모니를 장악해 왔다. 국유 산업을 민간에 매각하고, 해고가 자유로워졌으며, 사회 안전망이 축소돼 극심한 빈부 격차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많은 효용을 만드는 것, 이른바 ‘효율성’의 이름을 앞세워 진행됐다. 나아가 효율 제일주의는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스며들었다. 이익과 연결되지 않는 행위, 정신적 가치는 터부시되거나 경시된다. 극한의 경쟁, 승자 독식, 생명 경시 등은 모두 신자유주의라는 토양에서 자란 세태다.
신자유주의 시대, 비효율의 의미
신자유주의는 이윤을 위해 비효율을 제거한다. 이 관점에서 비효율은 악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비효율은 신자유주의를 삐걱거리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거나, 나아가 물질 만능 풍조를 바꾸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오프-타임》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제목으로 삼은 ‘오프 타임(off time)’은 공장의 기계가 멈추고 자본의 이익이 감소하는 순간이다. 전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비생산을 통해 효율성에 물든 삶을 되돌아본다. 유은순이 말하듯 “자본주의가 가속화하는 삶에서는 무가치한 것,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를 인식하고 준거 기준을 거부하는 그 자리에서의 저항”이다.
이러한 방향성은 기획자가 주문한 신작뿐 아니라, 배치에도 반영됐다. 관객은 플로어 맵 없이 직접 작품 정보를 찾으러 전시 공간을 헤매야 하고, 편안한 의자 대신 거친 자재에 앉아 영상을 관람해야 한다. 나아가 동선을 꼬거나 막힌 길로 인도해 감상 자체가 비효율을 추구하는 행위가 되도록 구성했다.
출품작에서 비효율은 예술, 과정, 생명 총 세 개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예술’. 예술은 쓸모없는 것을 생산하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이다. 작품은 먹거나 사용할 수 없으며 화폐로 환산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 쓸모없음 때문에 미적인 가치를 지녀 감상자를 새로운 사유로 이끈다. 강민숙의 ⟨예술 노동 삶⟩은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 노동자의 작업복을 나열한 작품이다. ⟨담요 저항⟩은 작가가 평소에 쓰던 담요에 자수를 새겨 만들었다. 평범한 의복과 이불은 전시장에서 입고 덮는 사용 가치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그로써 관객은 일상에서는 주목하지 않았던 사물의 미감과 개념에 집중하게 된다. 한편 작가 김방주, 건축가 한승우로 이루어진 SW기획은 이번 전시 공간을 시공하다 중단했다. 그들이 남긴 자재는 사용 가치를 지닌 건축물로 탄생하기 직전에 멈춰있다. 일상에서 발견했다면 흉흉한 폐허로 보일 사물들은, 전시 공간에서 개념적인 설치로 재탄생했다.
두 번째는 ‘과정’이다. 과정과 결과. 이 양자 중 신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단연 결과다. 과정의 흠결은 외면해도, 결과가 안 좋은 것은 문제다. 그러나 홍정표와 이민선은 오로지 과정에 집중했다. 먼저 홍정표는 스틱을 조합해 기하학적 조각을 만들었다. 완벽한 작품이 나올 때까지 같은 재료로 10개 연작을 시도했다. 10번의 갱신은 효율성의 시선으로 볼 때 실패의 연속에 불과하다. 그러나 작가는 모든 시도를 작품으로 내세운다. 그에겐 과정과 결과가 구분되지 않으며, 실패 또한 제거의 대상이 아니다. 이민선의 ⟨의뢰인⟩은 사건을 추리로 해결하는 탐정물 형식의 영상작업이다. 하지만 작품엔 이렇다 할 에피소드도, 명쾌한 진상도 없다. 외려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 스케치만 있을 뿐이다. 작가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그곳을 향하는 동안 마주치는 소소한 풍경에 주목한다. 이민선에게 가치란 성과를 누리는 짧은 순간이 아니라, 과정이란 지난한 시간에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생명’은 신자유주의가 효용을 추구하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이다. 개발로 인한 서식지 파괴부터 지구 온난화까지, 생명은 끊임없이 경제와 부딪친다. 배윤환은 신자유주의에 위협받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인형극을 펼쳤다. 기온 이상으로 터전을 잃고, 먹이가 부족해진 북극곰의 상황을 인간 사회의 부동산 이슈와 생계 문제로 치환했다. 자본주의를 기원으로 삼은 두 비극은 종이 다를 뿐 증상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나아가 생존에 시달려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점 또한 일치한다. 기후 위기 앞에서 인간은 동물보다 우위가 아니다. 차이점이라면 원인을 인간이 자초했다는 것. 답은 공장을 멈추는 ‘오프 타임’을 갖는 것뿐이다.
『아트인컬처』 2023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