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신 게 허무라니요_서찬석: 오류를 지나

서찬석, 『오류를 지나』 전시 포스터, 보안여관, 2020.2.19.-3.13.

1
몸을 기울이다 결국 불에 닿은 것처럼 혹은 누가 모르게 얼음을 등 뒤에 넣은 것처럼 느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따위의 말을 들을 때면.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의미에 관해 묻곤 했다. 그것은 얼마만큼의 화폐를 벌 수 있는지와 어느 정도의 쓸모를 가질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아주 상냥한 물음에 속한 것이었고, 좁은 내 등을 가만히 두드리는 것 같았지만, 등은 이따금 시큰함을 느꼈다. 세상엔 생각보다 화폐를 따지는 물음만큼 의미를 따지는 이들이 존재했다. 아마도 세상을 좀 더 정숙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이, 많은 철학자가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은 작가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폐와 의미는 얼마만큼이나 다를까. 한동안 의미는 화폐를 대적하는 것처럼 굴었다. 한사코, 그것도 자발적으로 초월적인 것과 단절한 우리 근대인이 화폐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세상의 효용으로는 따질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다시 너절한 초월적인 것들을 애끓듯 뒤적였다. 그래서 세상의 작은 여럿은 적은 화폐나 드물은 효용에도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했다. 의미는 화폐를 대적했던 것이 아니라 적은 화폐를 쥐여주는 것에 대한, 그러니까 화폐가 좀처럼 부재하는 자리에 대한 알리바이를 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필요한 것이지만 감히 화폐를 쥐여주기는 싫었던 세상이 알리바이처럼 건네던 것이 사실 의미는 아닐까.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거나—모른다거나—,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들은 게으르게 충분히 반복되었다. 그러니까 화폐와 효용의 빈자리에는 의미가 존재한다. 그 의미에 옭매이기 때문에 정숙한 여럿은 세상의 화폐와 화폐의 세상을 참는다. 아뿔싸, 야합이다. 미시적으로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반된 둘은 거시적으로는 공모한다. 빈자들은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우정을・행복을…의미를 몰라요’라고 말할 수 있으며, 어떤 의미 앞에 ‘진정한’을 붙일 수 있는 권능을 취득해왔지만, 의미를 안다는 사실이 오히려 화폐를 쥘 수 없다는—쥐면 안 된다는— 것을 승인한다. 한편 의미를 모른다는 사실은 그들이 화폐를 쥐는 것을 허용한다(그러나 그들이 정말 의미를 모를까).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의미와 효용과의 투쟁의 기록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투쟁의 대목마다 세상은 그대로 존속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금, 의미와 화폐는 동연한다.

그렇다면 어느 것보다 화폐의 타자였던, 그리고 어느 것보다 의미를 좇았던 예술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에 종사하면서도, 동시에 지금의 세계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주선한 것이 된다. 예술이 스펙터클로서 자본의 심미화를 주선한다는 의심은 그것으로부터 나온 것일 테다. 그러나 예술이 반대로 화폐를 향해 걷는 길이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거꾸로 뒤집는다 한들 화폐와 의미라는 이항의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 그 경우에도 이미 주어진 세상의 논리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도리어 이제 ‘의미’의 의미조차 없다고 나서는 것이다. 모든 이의 잠든 얼굴이 아름답다고 믿는, 어떤 결별 후에 그림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이가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라 믿는, 미움과 복수보다는 용서가 삶을 고귀하게 만들 것이라는 믿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사랑한 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예술은 온 힘으로 의미를 여읜 설움에 잠기려 한다. 서찬석의 『오류를 지나』(보안여관, 2020.2.19.-3.13.)는 그렇게 나선다. 그런데 주신 게 허무라니요.

2
천사가 있다. 「스스로 구원하라」라고 하는 천사였던 것이 있다. 그가 그저 천사가 아니라 ‘천사였던 무언가’로 밖에 이해될 수 없는 까닭은, 그가 이제는 생각하는 천사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인의 명백한 힘을 증명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천사에게, 구원은 의심을 품을 수 없는 진리이다. 천사는 그의 종복이기 때문에 구원을 전달하고, 구원은 주인의 말씀이기에 전달된다는 것에는 어떤 의식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천사는 선악과를 먹었다. 그는 이제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고 천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있다. 부끄러움을 알게 된 천사, 즉 생각을 하게 된 천사는 자신의 행위에 의식을 개입시킬 수 있으며, 행하던 ‘구원’이 진리가 아니라 그저 습관에 불과한 것임을 인식하게 된다. 혹은 그것을 분별해보거나 해석해본 적 없기에, 행하던 일이 구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더 절망적이게는 구원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스스로의 모든 존재를 바쳐야 하는 천사는 구원의 무의미함에 대해서, 허무에 대해서 깨닫고 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구원하라’라고 말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의 소식이 다른 천사에게도 들렸을지 모른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허무를 기다리며」의 천사들도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부끄러움을 허락하지 않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어머니와도 같은 주인의 앞에서 부끄러움을 원 없이 느낀다. 이곳 여관에 들른 이들은 모두 옷을 입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부끄럽고, 모두 눈을 마주치기를 포기하고 바닥만을 응시한다. 그러나 외려 그들이 부끄러운 것은 벗은 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직 여려, 구원이 허무한 것이 되었으나 차마 인간 앞에서 뻔뻔히 ‘스스로 구원하라’는 말을 할 수 없는 수치스러움 때문에 더욱 부끄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두 작업은 허무를 확약한다. 이는 절대적인 확약이다. 확약에 초월적 존재를 이끌어 쓰기 때문이다. 전시에서 아무리 허무를 벗어나는 작업을 찾으려고 해도, 허무를 극복하며 의미를 증명한 작업이 있다고 보이려 해도, 이 두 작업은 그런 시도를 다시 겸허하게 만든다. 이미 인간을, 세계를 초월한 최종심에 의해서 의미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존에 관하여」와 「인간 존과 이름없는 악어를 위하여」의 존과 악어는 초월적인 존재가 허무를 확약한 이후의 첫 번째 인간과 짐승이다. 영웅은 악당을 패퇴시키지만, 쉽게 악당이 된다. 이는 영웅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효용만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거나, 효용을 가졌기 때문에 의미 있는 존재인 까닭이다. 의미는 그저 조건 속에서 잠깐 있는 척하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도 의미는 효용과 야합, 공모관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악당으로 등장한 짐승은 이전에는 영웅이었을지도 모른다.—그런 의미에서 인간 존을 죽인 불량배들은 즉시 영웅이 됐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영상은 영웅이 악당이 되는 것과 악당이 영웅이 되는 두 서사를 공평히 다루고 있다.— 인간 존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이름없는 악어를 이해하는 것뿐이다. 혹은 반대로 이름없는 악어가 이해할 수 있는 것 또한 인간 존을 이해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영웅은 악당을 이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악당은 영웅을 이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인간의 주검엔 짐승만이 찾아오고 인간은 짐승하고만 춤을 춘다. 어떤 고귀함은 어떤 야만과 동류이거나, 그렇기에 둘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허무는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간 존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을 증오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악당보다 오래 살아남은 영웅은 늘 악당이 되기에, 이는 의미 없는 세계에서 가장 보통의 배신이다. 「보통의 배신」은 그러한 생태를 지구적地球的으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염소의 곁을 지키던 개는, 인간의 말에 따라 염소를 배신하여 염소의 목덜미를 물은 개와 동일한 존재이다. 인간의 곁을 지키던 개는, 인간의 수집이라는 욕망에 따른 배신에 의해 박제된 개와 동일하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자행하던 인간은, 공평하게도 역시 그 골격만 남은 채로 박제되었다. 이는 인간을 지켜 보듬던 화성인의 일일지도 모른다.—샹들리에가 짧으니 금성인은 아니다.— 그리고 모두 다 지구에서 일어나지 않은 시대를 찾기 힘든 보통의 배신이다. 믿음이 사라질 것이라 했다. 믿음이 습관과 구분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아끼지 않고 불어오는 습관의 바람 앞에서 우리는 관성처럼 이끌려 가기보다는 천사와 같이 날개를 꺾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으니 우리는 인간 존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을 증오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증오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춤을 출래요」와 「고귀한 움직임들」은 의미와 화폐의 동연 그리고 그로부터의 허무를 서술적으로 시인하는 작업이다. 이 두 작업이 열거와 연역이라는 서술의 규칙을 따르는 까닭이다. 열거는 동일한 것들의 나열을 규칙으로 삼는다. 「그리고 나는 춤을 출래요」는 건축 노동자의 효용에 종사하지만 의미를 가지지 않은 삽을, 무용하지만 의미만을 가진 꽃과 나란히 열거한다. 삽과 꽃의 동일함으로 표현되는 의미와 효용의 동일성은 결국 또다시 허무를 가리킨다. “나는 춤을 출래요”라는 제목의 말은 그 허무를 이겨내기 위한 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옆에 놓인 「고귀한 움직임들」과 함께 두 작업은 다른 작업들보다 지극히 무신경하게 그려졌다. 만약 이 무신경함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인간 존과 악어의 마지막 춤을 보지 못했더라면 이 춤은 분명 낙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춤을 목격했고, 그로써 그 춤이 얼마나 무의미할지 알고 있다.

한편 연역은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을 낳는다는 것을 규칙으로 삼는다. 「고귀한 움직임들」에 등장하는 전동 드릴은 그 침 아래로 예술을 폭포처럼 흘려보내고 있다. 도구는 재료를 가공해 예술을 생산하는 것이지, 도구가 예술을 곧바로 산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드릴은 예술을 무엇도 매개하지 않고서 산출한다. 연역된다는 것은 어떤 것이 그것의 앞선 전제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예술은 도구에 포함되고 동시에 의미는 효용에 포함된다는 논증이 제시된다. 작업은 “노동과 돈과 삶과 예술/육체와 마음”을 열거한 뒤 “고귀한 움직임들!”이라는 말로 문장을 닫는다. 노동, 돈, 삶, 예술, 육체는 진정 모두 같은 것일까. 그 같은 것들이 어째서 ‘고귀한 움직임’이라는 말로 닫혀야 할까. 그것은 우리가 의미를 잃어버렸듯이 ‘고귀함’이란 단어조차 허락되지 않는 까닭이다.

3
작가가 허무를 전달하는 것만큼, 사실 어떤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거나 의미를 증명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는 선언만큼 애끓는 일이 또 있을까. 그것은 작가를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한다는 동시대의 미학적 체제하고도 거리를 두는 일이다.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함은 ‘의미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의미의 재현 불가능성’을 인식하고 의미를 보존할 구축물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양을 그리는 것을 저어하고 양이 든 상자를 그리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그것은 양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러나 의미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것, 즉 ‘허무’는 예술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자체가 불가능하게끔 한다. 그러니 작가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해야 하고, 예술은 불가능해야 한다. 그래야만 옳다. 서찬석의 『오류를 지나』는 그 허무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허무를 말하고 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라고 물을 때면 그는 잇몸을 씹으면서 한평생 의미란 낱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고, 형태를 만든다. 『오류를 지나』는 오직 힘으로, 의지로 무의미를 지나는 작업이다. 힘은 무엇을 향한다는 의미도 없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작업을 헤집으면서 남겨놓은 자리가 있다. 그것은 작업이 모두 허무를 확인하고서도, 허무를 확인한 표정을 살필 시간도 주지 않고 행위에 나섰다는 점이다. 전시장의 누구도 허무 이후의 첫 표정을 살필 수는 없다. 부끄러움을 알게 된 천사는 구원을 의심했다. 구원을 믿지 않기에 그가 주인의 구원을 전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스스로”라는 말을 덧붙이며 다시 “구원”을 전달하는 데 나선다. 그렇다면 어린 천사들의 바닥을 향한 눈은 부끄러움과 동시에 스스로 모색할 길을 찾는 중일 수 있다. 인간 존은 영웅이 고작 악당의 전신前身이란 것을 깨닫는다. 모두가 보통의 배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이름없는 악어와 춤을 춘다. 의미는 사라졌지만 이해라는 행위에 나서는 것이다. 그 춤이 얼마나 허무할 줄 알면서도 「그리고 나는 춤을 출래요」라고 나서고, 노동에서 마음까지 모두 동일한 것을 알면서도 감히 「고귀한 움직임들」에 나선다. 작업에서 다뤘던 허무가 진실한 허무가 아니라거나 허무 이후에도 우리가 지킬만한 작은 의미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의미 없음의 의미’라는 희박한 조어를 꺼내지도 않으려 한다. 그들은 진실로 허무를 확인했다. 다만, 그래도 나설 뿐이다. 마치 허무의 총체를 다루고 확인하고도 서찬석이 그리는 데 나섰던 것처럼.

전시는 “고난과 역경과 불안과 혐오와 비난과 증오와 상실과 무력과 자책과 슬픔과 고독과 경멸과 비판과 질투와 의심과 배반과 공포와 부정과 침묵과 우울과 오류를 지나/허무”(「무제」)라는 글귀와 함께 마무리된다. 낭만은 마치 효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좇았던 자들에게 붙여지는 낱말이었다. 그렇다면 의미마저 없어진 다음에 무엇을 시작하려는 자들에게는 어떤 낱말을 붙여야 할까. 『오류를 지나』의 “오류”는 의미의 부재를 들킨 세상의 형편일 것이다. 그러나 전시는 그 오류를 관통하거나 수정하지 않기로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의미를 명백하게 증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의미를 고려하거나 해석할 의식도 없는 곳에서, 힘과 의지만 남아 그것을 그저 지난다. 모든 이의 잠든 얼굴이 아름답다고 믿는, 어떤 결별 후에 그림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이가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라 믿는, 미움과 복수보다는 용서가 삶을 고귀하게 만들 것이라는 믿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사랑한 것들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잠든 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에 나서고, 결별을 이룩하는 축복에 싸이는 데 나서고, 용서에, 그리고 사랑에 나서는 삶들이 있다. 의미는 없지만 생이 있다.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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