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의 미술, 사물 스스로 그린: 게리 코마린

게리 코마린, 〈Cake, Stacked, Green on Blue〉 캔버스에 에나멜 패인트, 수채 129×120.5cm 2022

내 그림은 사전 구상 없이 진행된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린다. 가장 훌륭한 그림은 가장 많이 실패한 그림이다. 그림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게 되어, 화가인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할 때, 바로 좋은 상태이다. 나의 목표는 그림이 스스로 그려지는 것이다. ― 개리 코마린

개리 코마린(Gary Komarin)은 사물의 잊혀진 얼굴을 그린다. 그가 풍경에서 대상 사이의 고리를 풀어내고 느슨한 자욱만을 비출 때, 그리고 오브제의 섬세한 겹 대신 앙상한 윤곽으로서 그 낯만을 드러낼 때, 우리는 사물이 어떤 얼굴을 띄었는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대다수의 화가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 또 어떻게 그리면 되는지…. 그러나 그런 그림은 아름다움만을 간신히 거느릴 뿐 진실을 담지 못한다. 코마린 회화의 매혹은 그가 대상을 모른다고 말하는 데 있다. 자신이 지금 어떤 것을 포착했고 느꼈으며 그렸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고백. 누군가 예술이 진실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을 때, 코마린은 예술이 진실을 표현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은, 그것이 진실로 존재하는 한 표현되지 않는다. 작가는 진실을 전달하기보다는, 진실이 머물 수 있는 언어의 집을 마련해야 한다. 따라서 코마린의 그림에 담겨있는 것은 일종의 사실이 아니라 어떤 ‘예감’에 가깝다. 〈Cake〉 연작은 케이크라면 마땅히 지닐 통상적인 향연의 메시지에서 벗어나, 이면의 고요와 공허를 나란히 품는다. 케이크는 곧 사라질 테고, 여기에는 함께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며, 또 한번 인생이 지나갔다는 것. 탄생에 얽힌 삶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기쁨에는 슬픔도 함께 존재할 것이라는 예감이 채워지지 않은 면을 따라 그리고 완결되지 않은 선을 따라 스며든다. 마찬가지로 그의 바다엔 차마 파랑을 거역하는 거대한 공백이 있어 해원의 풍요는 물론 그것이 모두 마른 뒤에 존재할 사막에 대한 예감이 뿌려지고(〈Suite of Blue Sea〉 연작), 그가 그린 나무엔 피워낸 잎사귀도 뿌리도 불투명해 여기에 목신을 길러낸 대지의 주검과 태양의 불길이 있으리라는 예감이 동반된다.

코마린은 자신의 작품이 ‘실패’로 채워져 있다고 전했고, 그는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이 말은 이렇게도 읽힌다. 코마린의 실패는 작가의 계획 아래 사물을 가두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그가 인간의 개념대로 그리지 못한 덕분에 사물이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고. 서투름이 주선하는 그 어긋남과 뒤죽박죽으로써 선입견에 잠자코 따르지 않는, 표현에 얼어붙지 않는 진실이 지켜졌다고 말이다. ‘무위(無爲, desœuvrement)’로 그려진 미술. 미술이 물리적인 차원에서 가장 ‘순수’에 다다를 때, 그림에선 작가가 아닌 사물의 목소리만이 남는다. 그때 미술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그저 사물의 결과다. 그러니까 사물이 그린 그림이다. 코마린의 회화는 그렇게 잊혀진 얼굴을 드리운다.

참조
신형철, 「시의 천사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p.270~273.
신형철, 「정치적 진보주의와 미학적 보수주의」, 『창작과 비평』 가을호, 창비, 2009, p.346~354.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옮김), 「문학의 공간으로의 접근」,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0, p.37~56.

◼︎ 개리 코마린 개인전 전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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