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자연의 강림_강명희: 방문

◼︎ 『아트인컬처』 2025년 3월호

〈동백계절〉 캔버스에 유채 240×315cm 2018

한국과 프랑스를 무대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온 원로 화가 강명희. 그의 개인전 〈방문 Visit〉(3. 4~6. 8)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개최된다. 강명희의 작품 활동 60여 년, 그 빛나는 발자취를 돌아본다. 작가의 예술세계를 시기와 주제로 나눈 대표작 150여 점을 공개한다. 강명희는 시적 정취를 머금은 풍경화로 ‘존재와 자연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 남극, 고비사막, 파타고니아 등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로 홀연히 떠나, 눈앞에서 본 생생한 풍광을 화면에 펼친다. 유랑자의 태도로 자연을 향해 적극적으로 발을 내딛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회화다. 작가의 붓끝에서 피어난 자연의 결과 겹, 리듬, 패턴, 울림…. /

‘방문’이라는 단어가 지닌 무게를 짚어보는 것이, 강명희 회화를 해석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작가에게 방문은 양의적이다. 한국어로 방문은 누군가를 찾아가는 행위를 뜻하지만, 프랑스어 비지타시옹(visitation)은 종교적 의미의 ‘강림(降臨)’에 가깝다. “내가 자연에 다가갈 때, 자연 또한 나에게 찾아온다.” 이 말은 작가와 자연의 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순간’의 재현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드러나는 ‘시간’을 포착하는 행위다. 작가는 완결되지 않은,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생성’해 나가는 풍경을 그린다. 강명희는 그림을 그릴 때면 화구를 챙겨서 며칠이고 같은 장소로 나갔다. 눈이 쌓였다 녹고, 매화가 피고 지는 그 멈춤 없는 과정…. 무심한 일상의 육안, 찰나를 고정하는 사진으론 드러나지 않는, 회화의 형안으로만 겨우 보일 미세한 시퀀스를 작품에 녹여낸다. 동명의 작품 〈방문 III〉(2013)에는 프랑스 투렌의 아뜰리에 정원을 찾아온 꿩을 그렸다. 새는 찰나에 날아갔지만, 그가 먼 곳에서 물고 온 꽃 내음과 주변을 물들인 온기, 날갯짓에 고요히 떨리던 공기의 여운은 화폭에 오랫동안 번져갔다.

이번 전시는 세 가지 테마로 구성된다. 작가의 삶과 예술이 얽히고설킨 여정을 따라 관객은 서로 다른 시공간을 여행하게 된다. 첫 번째 섹션은 ‘서광동리에 살면서’다. 강명희는 지난 18년간 제주 서광동리에 머물며 주변의 자연을 화폭에 옮겼다. 한라산 황우치 대평바다 산방산 안덕계곡 등 일상에서 마주한 소박한 풍경이다. 〈서광동리에 살면서〉(2018~19)는 10여 년간 같은 장소를 꾸준히 관찰하며 캔버스에 시간의 흔적을 겹겹이 쌓아 올린 작품이다. 두 번째 테마는 ‘방문’. 프랑스를 비롯해 남극, 고비사막, 파타고니아 등을 유랑하며 그린 회화를 선보인다. 작가는 이곳에서 자연의 압도적인 경이로움 앞에 섰다. 당시의 경험을 모티프로 〈북원〉, 〈중정〉, 〈방문〉 등의 시리즈를 발표했다. 마지막 ‘비원(祕苑)’은 작가의 초기 작업을 재조명하는 자리다. 1970~80년대 작가는 한국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구상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이 시기의 작품은 작가가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했던 개인적, 역사적 맥락을 보여준다. 대표작으로는 유신 정권 시기의 암울한 정치상을 비판적으로 담아낸 〈개발도상국〉 시리즈가 있다. 그중 〈개발도상국 교수형〉(1975)은 사법 살인인 인민혁명당사건(1975)을 다뤄 강명희 회화가 지닌 사회의식을 드러냈다.

〈개발도상국 “교수형”〉 캔버스에 아크릴릭 97×146cm 1975

초기작에서 최근까지 강명희 예술의 변화는 ‘유한’에서 ‘무한’으로의 이동이다. 정태에서 동태, 고착에서 생성으로의 전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해방’이라는 키워드로 함축된다. 강명희 회화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예술적 관습, 시각적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행위로 확장된다. 1972년의 도불은 단순히 새로운 환경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억압적인 현실과 편향된 미술조류에서 벗어나 자신의 예술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탈피의 몸짓이었다. 여행도 마찬가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난 적은 없다. 그러나 여행에선 늘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곳에서 내가 알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진정한 자유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광활한 절경 앞에서 기존의 이론과 화법은 초라했다.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자기 감각과 직관에 더욱 밀착될 때 새로운 화법을 발견했다. 한 풍경을 오랫동안 응시하는 일 또한 해방으로 이어지는 행위다.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아무도 본 적도 없는 모습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아무리 하찮은 대상에도 미지의 세계가 담겨있다.” 작가는 어떤 자연도 자신이 알고 있던 자연과 더 이상 닮지 않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강명희의 회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섬세하고 집요한 붓질이다. 그의 캔버스는 단 몇 번의 붓질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물감을 얇게 쌓고 다시 덮는 수없이 많은 스트로크가 반복된다. 시간과 감정을 켜켜이 쌓아 올리는 행위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호흡과 몸짓, 내면의 리듬이 공명하면서 자연을 시각화한다. 색채 역시 마찬가지다. 물감의 겹으로 형성된 색의 깊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결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에서 색은 명확한 경계 없이 서로 스며들고 섞인다. 시간의 흐름과 주변 환경, 인간의 시선이 얽히며 형성하는 미세한 움직임을 암시한다. 빛 또한 중요한 요소다. 자취를 감춘 그림자, 빛무리 속으로 흐려진 윤곽, 여백에 스며든 희미한 붓질…. 작품에서 빛은 외부에서 비추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스스로 품은 고유한 광휘처럼 표현된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강림’의 개념과 만난다. 자연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다. 캔버스 너머 자연의 떨림과 흐름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방문 Visit〉전은 강명희가 걸어온 긴 여정을 돌아보는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강명희는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작가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말에 소박하면서도 진솔하게 답했다. “흙, 돌, 바위, 은행나무의 그림자를 제대로 그려보고 싶다.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이제 내게 그 정도의 자격은 생기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피해왔던 대상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대상은 물론 스스로를 정직하게 보고 느끼는 것. 이 과제는 그가 20대 때 파리로 떠나며 다졌던 결심이기도 하다. 어쩌면 작가는 60여 년 만에 다시 한번 회화의 본질로,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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