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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져 왔듯이,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는 삶도 사유도 함유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긋나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도무지 어긋나게 된다. 주어진 세상의 형편과 질서를 따를 때 그는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흐르는 것이라면 고랑을 따라갈 것임을 알고, 만유에 해당된다면 인력에 끌릴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을 하는 자라면 규약에 따를 것임을 알고, 규약이 없는 경우라도 자연히 근면・성실과 같은 상상된 규범에 끌릴 것임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저 존재에 안부를 묻는 인간은 없다. 움직이는 커피머신들, 움직이는 배달가방들…, 우리는 한 번도 안부를 묻지 못한 그들은 모두 존재로 드러난다. 이다지도, 움직인다는 것은 삶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삶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주어진 질서와 형편에 어긋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 있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한 또 다른 살아냄이, 주어진 것에 대한 사유가, 그리하여 진부하게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비장한 표정에서부터 염려 가득한 순진한 표정의 예술까지도 모두 비판과 관계한다 믿어보려 하는 것은, 예술이 순수한 층위에서 주어진 삶으로부터 어긋나 ‘자유’를 지니고 ‘삶’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세상의 형편과 질서에 거스르는 것, 그것을 담론에서는 흔히 ‘자율성Autonomy’이라고 언급해왔다. 예술은 사회적 삶의 공간 외부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 효용을 측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등가교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사회적 사물에는 물음되지 않을 제작의 과정과 이유와 같은 안부가 질의되고, 거래가 된다고 할지라도 사물과 달리 누구도 온전히 자신의 것임을 주장할 수 없고 끝까지 그 작가의 것임이 고수된다는 것. 이러한 사회의 사물이라면 거절할 수 없이 압제되는 형편과 질서로부터 어긋나는 것들이 그 자율성을 구성한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삶’이 살아있는 공간에 인간은 그믐처럼 머물고 말며, ‘삶’이 드문 ‘존재’의 공간에서 인간의 삶이 내내 있다는 것이다. 예술의 고유함을 사회적인 것과 분리시키는 것은 예술의 비판성을 보증하고, 분리된 영역을 진지로 하여 그 안에서 ‘삶’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잃어버린 것은 압제 속에서도 전황戰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기억이다.
우리는 삶과 예술을 분리하여 지키려고만 했지, 압제의 내부에서 자율성을 은닉하려는 노력을 그리고 그 영역에서 지속돼 왔던 게릴라와 같은 다툼을 기억하지 않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식민에 대한 역사가 투쟁사로 변모되는 것은 압제 속에서 다툼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적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본적 사회의 영역을 예술화시키는 것에 심미화의 유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심미화는 질서화된 존재의 세계의 평화를 보존하려고 애쓰지만 삶과 자율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로마의 평화였음을, 여전히 전황이 지속돼 있다는 것을 들춰낸다. ‘삶’은 분리된 영역으로 후퇴해 있고, 그곳에 진지를 만들며 다음을 응시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전선에서도 압제에 길들여지지 않는 찰나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이로써 진지를 무색하게 만들거나 진지를 구축하려는 태도를 무용한 것으로 격하하려 한다고 하지는 말자. 서툰 글은 어떤 격하를 만드는 것에도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식민사는 투쟁사와 중첩되어 있음을, 예술은 피해자의 얼굴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살아’남아 다툼을 지속하는 자들이 있음을 알리고자 한다. 외부의 자율성이 아니라 압제 안에서도 자유를 발하고 발견하는 것에 대한 헌신을 전하고자 한다.
그것은 여기서 김학량의 헌신이다. ⟪벽화⟫(별관, 2020.05.16.-31.)에서 김학량은 부재한다. 전시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기품은 담쟁이넝쿨, 바위, 벽돌, 엘레베이터 문과 같은 비인격적 삶의 독특한 표현일 뿐이다. 진지 안에 속한 작업이었다면 그 작업이 표현하는 것은 예술가의 자율성이나 천재성이었을 자리에 김학량은 부재한다. 전시는 김학량의 예술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드러나는 것은 ‘김학량’이 아닌 것들의 예술성이다. 전시는 ‘삶’과 ‘자율성’ 외부에 있던 상반된 것들을 그러니까 어긋나지 않고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던 사물들에 향한 시선을 ‘삶’과 ‘자율성’의 시선으로 옮겨 놓는다. 그로써 그저 존재하기만 했던 것들에 ‘삶’과 ‘자율성’이 있다는 것이, 그리하여 그들은 밀려나거나 쫓겨 온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다툼을 지속하고 있는 전사戰史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전시 서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의미의 층위는 ‘실수’ 혹은 ‘잘못’이다. “실수한 것”, “함부로 그어댄 것”, “무심결에 던진 것”, “오명汚名”, “오점汚點”, “목표도 없이”, “허접쓰레기”. 실수와 잘못은 주어진 명령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 명령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주체적인 의미에서 어긋남과 반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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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량은 벽화의 본질을 응시한다. 벽의 본질은 사적으로 소유된 공간으로부터 ‘외부인과 외부의 공간’을 구별하고, 분리하며 또 배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벽은 삶도 사유도 없이 자본의 질서를 따르는 존재의 벽으로 실재한다. 그러나 그저 존재인 벽이라면 할 수 없었던 것을, 생生을 소유한 벽화라면 이루고 바꾸어 낸다. 벽화는 벽을 본질과 어긋나게 만든다. 벽화는 외부인을 소유된 공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초청하고 이끈다. 또한 벽화는 소유된 공간과 외부의 공간을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의 공동체와 같은 연속되고 묶인 몸을 형성한다. 그것이 벽화가 기입 되지 않은 공간조차 함께 동연하여 벽화 거리나 벽화 마을로 형성되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벽화는 주어진 구별, 분리 또 배제의 명령에 따르는 존재 ‘벽’을 그것과 어긋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삶의 벽으로 이루도록 만든다.
그리고 김학량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점이 있다. 그는 일반적인 벽화의 경우처럼 벽에 새로운 이미지를 기입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곳에 이미 존재하던 것들을 벽화로 드러나게 한다. 존재에 맞서 삶을 계시하는 주체는 외부에서 도입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예술은 불현듯 구원자처럼 하강하여 핍박받던 이들을 구원해내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진지로 향한 예술도 있지만 삶 곁에 끝까지나마—끝까지 남아— 머무르는 예술이 있다. 그는 싸움이 멈춘 적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포기한 것은 아니란 것을 적발하려 한다. 그의 벽화는 이미 또 여전히 삶과 자율성을 위한 전황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린다. 김학량이 발견한 벽화로 말미암은 삶의 벽은 그런 의미에서 적진과 아방我方을 분리하는 벽이 아니라 적진 속에서 삶을 보호하는 벽이다. ‘사회적 예술’이 사회의 의제를 예술화하거나 예술을 통해 정치적 개입을 이루는 것 외에 또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삶을 보호하는 것 그리하여 존재에 그치길 바라는 지금 여기의 사회에 삶을 위한 다툼이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증빙하는 것일 테다.
⟨동덕여대 뒤 월곡산 기슭 담벼락(담쟁이넝쿨 흔적)⟩은 진지나 아방으로는 떠나지 않은, 전황에 남아 싸움을 지속하는 자의 모습과 그 경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작업의 주체를 담쟁이넝쿨로 보았을 때, 담벼락으로 나뉘는 것은 그에게 적진이자 전황일 캠퍼스를 포함한 도시와 그에게 진지였을 산을 포함한 도시의 외부로, 즉 존재의 자리와 그 외부인 삶의 자리다. 도시가 침탈을 시작했을 때 산은 얼마간 버텼을 테지만 결국 물러나 벽 아래의 영토를 잃는다. 그러나 영토를 잃었다고 해서 떠날 수 없는 이도 있다. 혹은 그곳을 수복하기 위해 애써 내려온 이도 있다. 부대가 퇴각하더라도 누군가는 전선에 남는다. 전멸 혹은 패배로 기억되는 것을 남기 위해. 떠날 수 없거나 다시 땅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넝쿨은 수복을 위해서, 분절을 일으키는 벽에 구멍을 내고 뿌리를 거듭 내리는 존재다. 이 도발에 삶이 있다. 다툼은 이다지도 처절하고 어려워 남은 것은 넝쿨의 형상이 아니다. 넝쿨이라는 제목을 제외하고는 그것은 넝쿨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나 고작 흔적만으로도 벽은 존재를 지나치고 초과해 삶에 닿는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는 ⟨우리 동 주변 보도블럭⟩에서 다시 한번 강조된다. 보도블럭은 길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길이 걸음과 주행의 쾌적함에 종사하기 위해 존재로서 세계에 자리잡는다. 처음부터 보도블럭이 그 수행을 자처한 것은 아니었다. 통으로 된 콘크리트나 콘크리트 슬래브들로 보도를 메운 적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저항했다. 지나가는 무게 있는 것들을 빌려 쪼개지기도 했고, 때론 흔들리는 지반을 빌려 반항했다. 반항하는 삶을 존재로 바꾸기 위해 동원된 것이 보도블럭이었다. 그들은 쉬이 깔렸고, 쉬이 교체되는 유순한 존재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존재이기보다는 삶을 갈구했다. 본래 있던 생명을 패퇴시키고 길이 되라는 명령에 복종하기도 했지만, 진지를 떠나 전황으로 내려온 잡초에게 쉬이 터를 내주고 ‘벽’이되어 풀들을 보호했으며, 일터를 향해 존재로서 걷는 이가 아닌 삶이 되어 권력과 싸우기 위해 투사로서 걷는 이들을 위해 쉬이 뽑히어 투석이 되어주었다. 결국에 ⟨우리 동 주변 보도블럭⟩에 남은 것은 풀도 아니고 투사를 위한 투석도 아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의 배설물을 안음으로써 여전히 쾌적함에 종사하는 길보다는 어떤 처분이 필요한 걸림돌로 남는다.
다시 언급하자. 넝쿨은 넝쿨이라 보기 어렵고, 보도블럭은 이미 한편의 전사들이 지나가고 걸림돌이 된 것으로만 삶을 전한다. 그러나 그것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삶을 전한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이 둘은 형상보다는 얼룩에 가깝지만 고작 얼룩만으로도, 오히려 그 얼룩이 너저분한 탓에, 얼룩이 올곧이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 탓에 다른 얼룩뿐인 것들도 삶의 전사로 여기게 만드는 시각이 전염된다. ⟨기억이 희미함(아마도 일산 어느 상가, 광고 간판 떼어낸 뒤에 나타난, 본드 칠한 흔적)⟩부터 ⟨제주올레18코스 도중의 어느 마을 갯바위⟩까지 어째서 얼룩들이 지시하는 형상들은 모두 다르면서 그것의 질감과 형식 그리고 테는 모두 같게 되었을까. 그것은 모두 삶의 전사라는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을 존재로 고정시키려고 하는 세계에서 미처 처분되지 못한 ‘실수’로 수렴된다. 제때 넝쿨의 흔적, 배설물의 자욱, 본드칠이란 실수를 처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명령에 따르지 않고 명령에 의해서 처분되지 못한 그 ‘실수’가 전사로 닿는다. 그렇게 다툼과 저항의 본질은 ‘실수’이다.
존재들의 세계는 완전성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경제는 정확히 계산되고, 권력은 비례의 원칙을 따른다. 완전성은 삶과 자유의 온전함의 표현이 아니다. 오늘도 이 체제의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존재들이 세계의 질서와 형편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의 계획은 충분히 정확하고 그 자신 안에서 모자람 없이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자는 어떤 것도 첨가하려 하지 않고 생략하려 하지 않은 채로 그 쓰임에 맡겨질 수 있다. 세계가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존재는 더욱 엄격하게 존재로 얼어붙는다. 존재는 자신의 생각이나 삶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자신의 존재에 집어넣을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존재는 세계의 계획을 적합하게 실현하는 데 부족하고, 계획은 존재가 지시를 서둘러 실행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존재의 손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부족함과 서투름이 주선하는 어긋남만이 명령에 잠자코 따르지 않는, 존재로는 얼어붙지 않는 삶을 표현한다. 세계의 입장에서 이 부족함과 뒤죽박죽은 모두 ‘실수’이나 삶의 관점에서 이 ‘실수’는 삶의 표현이자, 질서와 형편에 어긋나는 자유의 현현이다. 세계는 존재에게 실패를 고발할 테지만, 외려 실패는 삶을 질식시킬 수 있다 믿었던 압제하는 세계에 있다.
⟨일산, 24시간 독서실 ‘컨센터블’ 대화점 엘레베이터 문⟩는 기하학무늬로 가득하다. 얼핏 보면 무늬는 기계에 의해 계산되고 비례된 원칙에 따라 동일한 패턴으로 완전한 반복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윽고 완벽히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거나 완벽히 동일하지 않은 문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전시의 다른 작업들처럼 고작 얼룩에 속한다는 것을 알리기도 한다. 계획을 온전히 실행하기에 부족하고, 지시를 서둘러 이행하는 데 뒤죽박죽이 된 손은 완벽히 동일한 무늬에 도달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는 얼룩으로 남아 삶과 자유를 표현해, 전황 속에 삶을 지키기 위한 벽화로 살아내기 시작했다. 노동자는 이 무늬 속에 자신의 표식을 새겨 넣었을지도 모른다. 최초의 설계는 결코 고려하지 못했을 실수들 그래서 다툼들. 누군가는 인간의 사물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염려할 테지만 인간 역시 사물과 다르지 못할 때 삶을 위해 분투하는 인간은 사물과 연대하는 몸이기도 하다. 사물도 인간도 모두 삶을 요구하고 요청한다. 그렇게 형편과 질서의 팽창이 온 세계를 점철해도, 고작 하나의 얼룩만으로 삶은 다수의 지배와 등가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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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삶과 자유다. 예술에서는 수없이 반복된 ‘삶’과 ‘자유’라는 말이 흔해진 다음에도 ‘삶’과 ‘자유’에 대해서 다시 말을 하려 한다. 이 두 말이 흔해지는 것보다 인색해지는 것이 두려운 까닭이다. 그것이 흔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말이 성취되지 않았다면 그것이 아직 덜 흔한 까닭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시가 드러내듯 세계의 다툼은 끝나지 않았고, 행여 잠시라도 끝난 적도 없었다. 김학량은 지난 전시였던 《바다와 나비》의 전시 서문 마지막 문단에 “모든 길은 무덤으로 향하지만, 무덤에서 모든 길은 비롯한다.”라고 적었다. 이 문장에 담긴 헌신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언급했듯 그는 전시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작가로서의 어떤 예술성도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드러나는 것은 김학량’이 아닌 것들’의 예술성이다. 작가 스스로가 무덤으로 향하자 그곳에서 홀로 스스로 말하는 삶들이 걸어 나온다.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는 전시, 오직 자신이 갖고 있는 시선이 가지고 있는 힘만으로 외부의 힘에 대하여 버텨내는 전시. 마침내 거기에 삶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게 무덤은 길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삶의 반의어는 무덤이 상징하는 죽음이 아니다. 무덤이 길이 되듯이 살아간다는 것은 오히려 죽어간다는 것의 동의어다. 존재에게는 죽음을 향하는 것과 관계하는 ‘안부’가 질의되지 않는 까닭이다. 삶이 가물어 존재가 되고, 존재하는 것으로 삶이 탕진되듯이 삶의 반의어는 오히려 존재다.
‘개와 늑대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은 해 질 녘 빛과 어둠으로 사물의 윤곽이 흐릿해지는 순간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하려고 하는 늑대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쩌면 형편과 질서를 따르는 존재에 여전히 휘발되지 않고 내재한 삶이 발휘되는 순간을,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싸움을 걸어오는 여전함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김학량이 이번 전시의 서문으로 전한 “풍경이 되기엔 함량도 규모도 어설프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풍경이 아니라고 또 누가 주장할 수 있을까”하며 물었던 풍경의 윤곽이 흐릇해지는 순간들은, 심지어 “낮도깨비 같은 것이라고 우길 수도 있지만 글쎄, 내가 낮도깨비이지 누가 무슨,”이라면서 포착했던 자신의 윤곽 또한 흐릿해지는 순간들은 모두 그런 시간일 것이다. 그것은 모두 전시가 내내 황혼으로 노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밤은 오겠지만, 지나칠 수 없어, 그럴 수 없이 이 시간을 지키려고 한다. / 조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