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갤러리, 경현수 신작 개인전 《매직 램프》
화가 경현수의 개인전 <매직 램프(Magic Lamp)>(9. 16~10. 8)가 이유진갤러리에서 열렸다. 점, 선, 면 등 도형 이미지로 구성한 회화 19점과 조각 6점, 총 25점의 신작을 공개했다. 작가는 정동과 깊이, 마티에르, 운동 등 추상의 난제를 실험하는 화법으로 새로운 기하학적 추상에 접근했다.
일명 ‘차가운 추상’이라 불리는 기하학적 추상은 구체적인 재현 대상을 두지 않고 한정된 소수의 색과 단순한 도형의 짜임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미술 역시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미지를 이루는 원색과 점, 선, 면 같은 독립 단위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어느 이미지든 존재하는 보편적 진리. 기하학적 추상은 그 답에 접근하려고 한 예술운동이었다.
그러나 기하학적 추상은 곧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 부딪쳤다. 탈근대의 시류 아래 변화를 중심으로 하는 발생적 진리관이 대두됐고, 수학적 원리를 반영한 도형은 인간의 감정을 등한시한 결과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렇다면 기하학적 추상이 추구하던 예술의 순수성과 이상은 모두 허구였을까. 경현수의 회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경현수는 점, 선, 면의 모나드를 수리적 좌표 평면이 아닌 현실에서 발굴한다. 그의 도형은 반복과 차이의 리듬을 이용해 운동에 이른다. 재현 의도 없이 우연히 발생한 형상은 상상력과 감성을 자극한다. 새 기하학적 추상이다.
점·선·면, 이미지의 모나드
이번 개인전은 작가의 작업 방식에 따라 세 가지 테마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경부고속도로 지도를 소재로 만든 회화다. 그는 지도를 디지털 포맷으로 변환하고 파일을 확대, 축소, 변형하는 과정의 반복으로 이미지를 분절했다. 무수히 조각난 파편 사이로 등장하는 것은 기본적인 도형이다. 여기에서 경현수는 작업의 실마리가 되는 영감을 얻는다. 완성된 그림은 조합한 모나드를 캔버스에 옮긴 결과다. 경현수의 프로세스는 더 이상 쪼깨지지 않는 물질 단위인 ‘원자’를 발견하는 물리학의 방법론과 흡사하다. 자연 세계의 최소 입자가 원자라면, 이미지 세계에서 원자는 도형이다.
경현수 회화의 개성은 추리나 가정이 아닌 경험적인 실험을 통해서 기존의 기하추상과 동일한 존재론에 도달한다는 데 있다. 주름 없이 곧은 선분, 내심에서 출발한 모든 거리가 같은 원, 네 변 네 각이 일치하는 사각형 등 수학적 규준을 충족하는 도형은 작가의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그의 도형이 경부고속도로라는 불완전한 현실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또 불변하는 산술 논리가 아닌 다변하는 직관을 따른 까닭이다. 반복으로 보이지만 미미한 차이를 지닌 모나드의 전개는 마치 도형이 이동하는 것과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반복과 차이, 이 두 항이 교차하며 만든 운동에는 현실과 직관의 생명력이 여전히 살아있다.
2년 만에 신작을 발표한 이번 개인전에서 경현수는 대부분 <무제>로 작품을 명명했던 이전과 다르게 구체적인 이름을 꺼냈다. 그림을 완성한 후 연상되는 캐릭터를 제목으로 삼았다. <Empty Coat>는 벌거벗은 임금님, <Magic Lamp>는 램프의 요정 지니, <Goerge Condo>는 화가 조지 콘도와 연결했다. 마우스 커서는 형상이 디지털에서 왔음을 알리는 표지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로 경현수는 감상자와의 소통을 꼽았다. 질서와 규칙에 갇혀있는 기하추상이 아닌 외부와 소통하는 열린 가능성을 회화에 부여하고자 했다.
두 번째는 라인 드로잉. 일견 액션페인팅처럼 보이는 그림은 경현수의 작업 중 가장 노동 집약적인 작업이다. 화면에 등장한 선과 점은 사실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비닐에 물감을 뿌려 굳힌 후, 조각을 떼어내어 조합하는 방식으로 화면을 완성했다. 어떤 형태의 조각이 나올지 알 수 없으므로 드로잉 시리즈는 계획도 에스키스도 없이 그려진다. 한 개의 선을 붙이고 다음에 올 조각을 고민하는 과정의 연속은 평면에 무수한 레이어를 상상하게 만든다. 경현수는 <DeepF> 연작에 우주를 바라보는 막막함을 담았다고 표현했다. 은하수처럼 아득히 먼 곳에서 출발해 비로소 화면에 도착한 별 무리. 점과 선은 표층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듯 펼쳐진다. 작가의 드로잉이 밤하늘의 깊이를 지녔다면, 이는 작업의 출발점에서는 짐작할 수 없었던 우연과 무수한 노동이, 수 겹의 레이어를 거슬러 라인으로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현수의 조각을 살펴보자. 여기서도 기하추상의 단위는 이어진다. 구리 와이어를 구부리고 피며 선을 구현하고, 구리판을 타공해 점과 면을 만들었다. 작가는 드로잉의 화법과 입체의 조형법을 구분하지 않는다. 페인팅의 구성을 조각에 그대로 적용했다. 이러한 구도는 작가의 회화가 3차원의 공간을 통과해 입체로 변모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편 모두 <무제>로 이름 지은 입체작품은, 정말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몰라서 제목을 정하지 못했다고. 즉흥성이 가장 많이 반영된다는 점에서 작가는 조각을 ‘재즈’에 비유한다. 작업을 한다는 생각도 없이 지루함을 달랜다는 자세로 그때그때의 기분을 충실히 따르며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조각은 마치 재즈 댄서와 드럼 연주자의 동선을 결합한 것처럼 보인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리듬에 들썩거리고, 클라이맥스가 다가오자 선율에 나부끼던 손은 순간 심벌즈를 내려친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기하추상은 마침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아트인컬처』 2022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