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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를 보는 내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특히, 《노르웨이의 숲》의 하루키의 환영과 싸워야했다. 그 숲과 동주는 많은 유사점이 상실이란 주제로 저들을 대위했다. 시대가 일으키는 불화에서 시대를 지키는 것도, 시대에 저항하는 것도 선택하지 않고 그저 시대가 스스로에게 상실시키는 것을 솔직히 갈음하는 두 작품의 주인공은 분명 닮아있었다. 와타나베 토오루가 놓여진 시간은 일본의 화려한 고도성장 뒤에도 그대로 보존되어있던 맨얼굴 즉, 파시즘과 전체주의 적폐에 대한 저항 운동이 활발했던 전공투세대(全学共世代). 그러나 그는 맨얼굴을 인정하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모두 거절한 채로 인정과 저항 두 태도를 포함한 시대가 스스로에게 상실시키는 문제에 천착한다. 윤동주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시대의 어느 편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못한 채 시대가 상실시키려하는 꿈, 사랑, 서정에 천착한다. 그러나 알듯이 문제는 그들이 맞이하는 풍경도, 결론도 모두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게 물음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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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모든 사실이 역사가 되진 않는다. 역사의 기억법이란 늘 전체가 그 시점, 그 사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계기들에 향해있다. 그래서 그 계기들이 대부분 매개했었던 것은 ‘정치적’인 것들이었다. ‘정치적’인 것은 전체를 주체로 하면서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사건들을 감당했으며 그로써 보편의 세계를 상대했었으니까. 따라서 1879년도 1917년도 유럽사가 아니라 세계사였으며, 1980년도 이제껏 내내 우리에겐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이전에는 없던 미증유(未曾有)를 증유(曾有)로 탈바꾸어냈다. 다시 말해서, 이들 어떤 사건도 전체가 전부를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이전과 같이 행동할 수 없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기억법은 당연히 예술의 기억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비단, 예술이 정치에 예속되어있거나, 정치의 대상 중 하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이 오랫동안 안아온 시름에서 분출되는 것에 가까웠다. 예술은 늘 예술 이상의 것과 대면하는 긴장을 앓는다. 문자, 이미지, 소리 그리고 어떤 서사인 그들은 하나의 작품과 작가라는 제 스스로를 떠나, 운명을 개척하고 발명했으며 오독조차도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식상한 ‘부분’에서 나왔을지 모르나 미증유를 엿보도록 했다. 그러나 미증유가 아무 갈래로 향해도 됐던 건 아니었다. 파리스에게 던져졌던 황금 사과처럼 미(美)를 정치적인 것과 진리 그리고 아름다움 사이에서의 끈덕진 고민과 성찰에 침전시킨 후에야만 제 스스로를 내던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정치적인 것과 진리 아름다움이 모두 미(美)의 연쇄라는 그 믿음이 식상한 부분을 전체, 보편, 세계라는 언어로 불리도록 했고, 그렇게 보편의 세계를 상대한다는 점에서 역사와 예술의 기억법은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역사와 예술의 최대공약수였던 정치적인 것이 그 매개에서 상실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전체가 전부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적인 것의 상실이었다. 정치는 전체주의와 보편이라는 말로 왜곡되었던 억압을 반성하는 어느 순간부터 부분과 부분을 주체로 하는 것에서 시발을 만들었으며, 끝없는 미시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가졌다. 더 이상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갈음하지 않았으며 사회를 발명하기 보다는 사회 안의 계산과 측정을 바탕으로 한 조정만을 바랐다. 그로부터 이전의 기억법은 변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를 냉전이나 베트남 전쟁이 있었던 시기가 아니라 비틀즈란 밴드가 빌보드 차트를 장식했던 시간으로 기억하는 것, 그리고 80년대를 군부독재의 시기나 민주화를 향한 저항의 시기가 아니라 삼미슈퍼스타즈가 마지막으로 우승했던 시간으로 회상하는 기억법은 모두 변화한 기억법이었다. 그것은 그동안 전체와 보편으로 말미암아 억압되었던 특히, 정치만이 세계의 전부인냥 지루하게 만들었던 시간을 총명하면서도 참신하게 기억하게끔하는 기억법이었지만 그뿐인 것이었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을 통해 공통·보편의 세계를 독자에게 안착시키고 ‘우리가 어떠한 세상·체계에서 살고 있는가/살게 할 것인가’라고 물어왔던 예술의 오래된 문제를 얄궂게 지워버리고는, ‘어떠한 형태로 우리가 각자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오로지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 풍속의 단면만의 묘사로 전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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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논리적으로 단언하고 예언했던 것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이었지만 충실히 이행했던 것은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그는 오컬트적이며 초현실주의적인 요소들을 서사에 중요하게 배치했으며, 이음새 없는 은유는 그것을 훨씬 독보적이게 만들어 소설을 때때로 무국적인 듯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언급한 이전의 기억법과 확실한 단절을 선언하며 근대 문학의 종언을 알린다. 소설은 기존의 초현실적이면서 무국적으로 보였던 작품과는 다르게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즉, 시대를 갖는다. 그러나 주인공인 와타나베 토오루는 결코 시대에 감화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소설이 서술하듯 60년대를 괴물의 보존된 맨 얼굴로도 대하지도 저항의 자리로도 생각하지 않으며 오직 그것을 스스로 비틀즈가 빌보드를 장식한 시간과 사랑을 좇는 ‘나’라는 부분의 풍속으로 환원시킨다. 그는 시대에 있으면서도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길 원했던 것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저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했던 것이 부끄러워 서명하지 못하겠습니다.”(영화 《동주》 中) 이 대사는 극에서 윤동주가 취하고 있는 태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와타나베 토오루처럼 시대의 감화되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윤동주는 시대와 타협하거나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인물인 동시에 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려고 하지도 않는 존재다. 그가 천착하는 것은 그가 좇는 것들에 대한 상실이다. 그래서 극에서 시는 북간도의 별을 그리워하고, 새로운 길을 기대하며 미래를 그리기도 하고, 정차장에서 사랑스러운 추억을 그리기도 하며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시대에 관계없이 스스로의 시를 쓰고자 하며, 시대와 관계 없이 사랑이 가능하다 믿으며, 시대와 관계 없이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미래로 살아내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를 끊임없이 의식의 아래로 침전시키며 성찰하고 부끄러워한다. 그도 그렇게 시대에 있으면서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둘은 모두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둘은 시대로부터 상실한 것을 좇는다. 그러면서 그들이 스스로 의식 내면에 침전한다는 것은 솜사탕과 솜처럼 닮아있다. 그러나 마주된 결론은 얼음과 숯처럼 다르다. 한 명은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써 시대를 제거하지만, 한 명은 시대에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시대를 보존한다. 그리고 그 차이는 “상실을 대하는 태도”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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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들어내는 것∙지우는 것으로써 시대에 존재하지 않음과 시대를 ‘부정(否定)’하는 것으로써 시대에 존재하지 않음은 다르다. 와타나베 토오루, 무라카미 하루키와 윤동주의 차이는 그것이다. 상실을 대할 때 와타나베 토오루는 상실한 것에만 매달린다. 그에겐 상실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상실한 것들만이 그에게 중요한 가치가 된다. 소설 속의 기즈키에서부터 나오코까지 모두가 느끼는 불안감과 상실감에 그것이 어디서부터 나오는지에 대한 원인을 향한 물음은 영영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상실된 것들을 스스로의 의식 내면의 깊은 곳으로 침전하는 것을 통해서 발견해내고 또한 소생시키며 추구하려한다. 그래서 《노르웨이의 숲》의 상실은 오로지 개인의 상실이며 시대 없는 ‘부분’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에 윤동주는 상실의 원인을 집요하게 묻는다. 왜 시가 쉽게 쓰여지면 안 되는 것인지, 어째서 사랑이 불가능한 것인지, 미래를 왜 그릴 수 없는지를 끈질기게 물음하는 것이다. 하루키와 와타나베 토오루가 멈추고 스스로에게 침전해 들어갔던 그 자리에서 윤동주는 한 발자국을 더 내딛는다. 그 후 그가 마주하게 되는 원인은 상실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윽박지르는 시대의 불가능이다. 서정과 사랑 그리고 미래-어쩌면 낭만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라는 시대가 허용하지 않는 것을 쥐고서 그는 의식 내면이 아니라 시대와 불화하기로 했으며 “현(現)” 시대에 존재하지 않고 더 나은 시대에 존재해야할 것을 통해서 시대를 부정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상실의 원인을 세계로 대상화시키면서 그는 지금의 세계는 불가능하다는 ‘부정’을 더 나은 세계에서는 가능해야할 것들을 가지고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윤동주는 시대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시대를, 다시 말해 세계를 갖고 있다. 그는 나라를 잃었다고도, 잉여가치를 도둑맞았다고도 얘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원인을 물음으로써 ‘부분’의 상실이 그로부터 전체와 보편에게 조우하게 만든다. 한 개인이 서정시를 쓰는 것이 쉽지 않으며 사랑이 불가능한 까닭은 그것만 본다면 개인의 상실이지만 그 상실의 이유를 갈음한다면 그것은 분명 시대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것임을 시인은 알고 있었다. 물론 그가 가진 ‘부끄러움’의 정서가 이를 더 선명하게 이끌었다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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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동주》는 개인-‘부분’-의 미증유를 세계를 매개하는 것을 통해서 그것을 -‘전체의’-증유로 바꿔내야하는 것이 예술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전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술이 세계를 매개한다는 것은 다시 미(美)가 정치적인 것과 연쇄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시 ‘우리가 어떠한 세상·체계에서 살고 있는가/살게 할 것인가’라고 물어왔던 예술의 오래된 문제를 물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 우리의 기억법은 변했을지도 모르며 그때 정치적인 것과 진리, 아름다움의 연쇄를 지난 세상의 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세상에 일이라고 해서 그 물음의 가치가 유효기간을 지난 것이라고 또는 해결되었던 문제라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술은 여전히 다른 사회적 활동과 정치적인 것과 동연(coextensive)하며 정치적인 것이 사회안의 계산과 측정이 아니라 진보된 사회를 발명하고자 할 때 미증유의 대한 상상력은 예술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점에서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로서의 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예술의 절대적 자율성을 주장하는 관점은 옳지 못하다. 예술이 정치적인 것과 단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예술 그 자체의 상실 그 뿐이다. 그러나 보편과 전체만을 위시하는 이전의 태도도 옳지 못할 것이다. 그런 참여예술론은 예술과 정치 사이에 외재적 관계 내지 도구적 관계를 설정한다는 데서 옳지 않다. 그리고 그 사이의 해답의 실마리를 《동주》는 함께 전한다. 분할된 ‘부분’에서 출발하는 것을 통해서 예술의 자율성을 얻는 대신 그의 이유를 세계-전체∙보편-를 대상화하는 것으로써 찾음으로써 연쇄를 완성하는 것, 이는 한편으로 랑시에르가 줄곧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가 그렇게 현학적이거나 진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물을 수도 있겠다. 글을 쓰면서도 시인 윤동주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인지 영화 《동주》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인지 혼동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글은 한 장면에서 시작됐다. 그것은 당장 문예지에 목적과 이유에 적합하지 않다며 시를 배제하는 송몽규(박정민)와 윤동주(강하늘)가 갈등하는 장면이었다.
“시도 자기 생각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아.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살아있는 진실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낳는 거고, 그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그 힘이 어드렇게 모이는데? 그저 세상을 바꿀 용기가 없어서리 문학 속으로 숨는 것밖에 더되니?” /“문학을 도구로밖에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문학을 이용해서, 예술을 팔아서 뭐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는데? 누가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켰는데? 애국주의니, 민족주의니, 뭐 공산주의니 기딴 이념을 위해 모든 가치를 팔아버리는 것 그게 관습을 타파하는 일이야? 그것이야 말로 시대의 조류에 몸을 숨기려고 하는 썩어빠진 관습아니겠니?”(영화 《동주》 中)
나는 영화의 주제가 초중반부밖에 되지 않는 이 장면에 압축되어있으며 또 녹아있다고 생각했다. 시대를 인정하지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으며 개인의 상실에 천착하지만 그것을 통해 시대를 매개하고 미증유를 증유로 포착해내는 것은 영화 《동주》가 본 윤동주의 서사이며, 《동주》 전체였다. 또한 나라를 잃었거나 잉여가치를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서정시를 쓸 수 없어서, 사랑을 할 수가 없어서, 미래를 그릴 수 없어서 시대와 불화함은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진보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술이라면 오히려 그것이 진보적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는다면 말하지 않았는가, 문자, 이미지, 소리 그리고 어떤 서사인 그들은 하나의 작품과 작가라는 제 스스로를 떠나, 운명을 개척하고 발명했으며 오독조차도 사랑했다고. / 조재연
*참조
– 무라카미 하루키, 임홍빈 옮김, 《노르웨이의 숲》, 문사미디어, 2008
– 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옮김, 《불화》, 도서출판 길, 2015
– 자크 랑시에르, 오윤성 옮김,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 b, 2008
– 서동진, 《변증법의 낮잠》, 꾸리에,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