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트인컬처』 2025년 5월호

젊은 화가 임노식이 개인전 《선산》(4. 9~5. 4)을 열었다. 가족묘가 놓인 여주의 선산을 배경으로 신작 17점을 선보였다. 임노식의 회화는 늘 선산에서 시작된다.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자 가족의 무덤이 놓인 땅. 작가는 매 주말이면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선산을 오갔고, 작업의 씨앗이 될 장면을 모았다. 선산은 작가는 물론 작품에게도 하나의 고향이다. 그러나 노스탤지어가 출발점이 될 순 있어도 본질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정적일지 모르겠지만, 내게 농촌은 생성적인 공간임이 틀림없다. 30여 년간 여주는 끊임없이 변했다. 산은 깎이고 사람들이 사라졌으며, 그곳을 외국인 노동자가 와 채웠다. 건물 몇 채가 오르내리는 변화가 아니라 지형과 인간이 뒤바뀌는 격변. 그게 날 움직였다.”
기억의 배채법, 번지는 풍경
임노식이 처음부터 형상을 흐리는 방식으로 그린 것은 아니다. 첫 개인전 《안에서 본 풍경》(OCI미술관 2016)에서 《물수제비》(아트스페이스보안2 2020)까지는 대상을 명료하게 표현했으며, 《깊은 선》(금호미술관 2023)에선 이미지 일부를 지웠지만 재현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의 화풍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개인전은 《그림자가 머무는 곳》(스페이스애프터 2024)이다. “자연은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생명력의 흐름이다.” 존재는 살아있는 한 변화하고, 변화하는 한 고정된 형상 너머에 있다. 이 깨달음으로 작년 개인전에서 작가는 ‘공기’를 표현 대상으로 삼았다. 붓 자국에 투명 색연필과 투명 오일 파스텔을 반복적으로 덧칠해 존재와 존재, 공간과 공간 사이에 부유하는 공기를 그렸다.

《선산》에서 임노식은 한 번 더 변화를 감행했다. 투명색을 덮어 ‘공기를 그린다’는 방식이, 투명색으로 형상을 지워 ‘공간을 남긴다’는 감각으로 전환됐다. “당시엔 공기를 그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지우고 있었다. 대상이 사라지면 그것을 그린 ‘나’의 존재도 없어진다. 결국 공간만이 남는다.” 지움으로 환기된 공간은 임노식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한 문장으로 수렴한다. ‘부재는 존재다.’ 그리고 이 명제는 임노식 회화에서 세 가지 층위를 따라 구체화된다. 첫 번째, 형상을 지우는 행위는 대상을 소거하는 동시에 결국 사라지지 않는 본질을 드러낸다. 지운다고 해서 모든 게 사라지진 않는다. 도리어 지워진 뒤에도 끝내 남는 것, 그 어떤 변화에도 지워지지 않는 단 하나의 뼈를 작가는 ‘공간’이라 부른다. 끊임없이 격변한 여주에서 임노식은 선산이라는 ‘뼈’를 지워서 남겼다.
두 번째, 작가는 대상과 주체 간의 거리를 삭제해 생성의 공간을 제공한다. 풍경이 외부에서 응시하는 대상이라면, 공간은 몸이 들어가 감각하는 주제척 장(場)이다. “광활한 풍경을 축소해 담기보다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온전히 담아내는 게 목표였다.” 보는 행위 너머 자연을 가로지르는 몸이 만들어낸 체험. 그렇다면 이 체험은 어떻게 가능한가. 작가는 해답으로 “원경과 근경의 구분을 배제한 독특한 시점”을 제시한다. 원근의 조건은 ‘거리’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대상과 주체의 거리는 변한다. 작가는 사생을 나설 때마다 벌판을 걷고, 시선을 바꾸며 풍경의 단편을 수집했다. 화면엔 인물과 초목, 하늘과 땅이 같은 밀도로 겹치고, 중심도 초점도 없다. 이 구도는 외부의 관찰자가 아니라, 공간을 통과하며 체험하는 내부자의 시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움직이는 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상태와 맞닿는다. 이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성의 감각이 발생했다.

공간의 체험은 《선산》의 감상 방식에도 이어진다. 전시장의 작품은 모두 벽면을 따라 같은 높이로 빼곡히 걸려 하나의 파노라마처럼 작동한다. 감상자는 임노식이 공간에 들어갈 때처럼, 작품이 구성한 ‘장소’에 들어온다는 인상을 받는다. 벽면은 장대한 자연이 되고, 감상자는 그 안에 들어가 거닐며 자연을 체험한다.
세 번째, 작가는 ‘형상의 부재’에 존재를 투영한다. 임노식은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전통 형식이나 소재를 직접적으로 참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회화는 ‘배채(背彩)’를 떠오르게 한다. 종이 뒷면을 채색해 앞면으로 색이 배어 나오는 배채처럼, 작가의 화면은 풍경의 표면에서 그려지기보다 풍경의 뒷면, 즉 내부에서 번져 나오는 감각으로 구성된다. 작가는 대상을 세밀하게 옮긴 뒤, 이 형상을 문질러 지우고 흐리는 과정으로 화면을 완성한다. 형상이 지워진 자리엔 잔흔뿐이지만, 빈칸은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우리는 그 뿌연 안개 사이로 어떤 얼굴도 집어넣을 수 있다. 있었거나, 있거나, 있을 들녘의 모든 얼굴. 불투명함이 외려 무한한 투영과 연상을 가능하게 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공간의 ‘생(生)’이 캔버스 표면으로 침투한다. “형상을 덜어내고 나면, 색도 공간도 사람도 그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내가 그리는 게 아니라, 남겨진 자리가 무언가를 불러오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