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이오에이갤러리, 호상근 5년 만의 개인전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채집하는 화가 호상근.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호상근재현소’를 통해 모집한 타인의 이야기 등 보통의 삶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순간을 생생하게 재현해 왔다. 그가 개인전 《호상근 표류기 2023: 새, 카트, 기후》(11. 10~12. 23 오에이오에이갤러리)를 열고 회화 29점을 공개했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작가가 이방인의 눈으로 거리에 숨은 이질적 존재를 포착했다.
— 한국에서 5년 만에 열린 개인전이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
Ho 베를린에서 지낸 지 4년째다. 여전히 어려움이 많지만 적응 중이다. 살림하고 강아지랑 산책하고 그림을 그리는 게 루틴이 됐다. 내겐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다. 그 안에 나를 던져놓고 싶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실제로 화풍도 변했고, 그림 실력이 나아진 것 같기도 하다.(웃음)
— 이번 개인전에는 베를린의 풍경을 화폭에 펼쳤다. ‘표류기’라는 독특한 제목으로 일상을 엮었는데 어떤 고민이 담겼나.
Ho 나의 작업은 늘 평범한 일상에서 출발하지만, 그 일상을 낯설고 새롭게 느끼는 순간에 이끌리곤 했다. 휘말리고 좌초해 의도치 않은 곳으로 도달하는 여정. 이 과정이 ‘표류’ 같다고 생각해 제목으로 부쳤다. 네덜란드인으로 조선에 억류됐던 하멜의 표류기엔 이방인의 눈으로 본 조선이 담겨있다. 그가 조선인도 미처 몰랐던 조선의 모습을 기록했듯, 내 그림이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일상을 발견해 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 새, 카트, 기후를 키워드로 연결했다. 이질적인 조합이다. 각 단어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Ho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난 존재를 내세우고 싶었다. 전 세계적인 경향이기도 하지만 독일의 가장 큰 화두는 기후 위기다. 독일은 원래 날씨를 크게 타지 않는 나라다. 여름도 겨울도 고만고만했다. 그런데 최근엔 폭염과 한파가 이어졌다. 에어컨, 난방기도 없이 지내던 사람들이 이상 기온에 큰 혼란을 겪었다. 모두 낯선 일상에 표류한 것이다. 여기서 고민을 시작했다. 기후가 인간의 표류를 나타내는 낱말이라면 카트와 새는 각각 사물, 자연을 대표한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카트는 매일 마트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오브제’가 된다. 새 역시 마찬가지다. 도시의 삶을 비둘기가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제 비둘기는 숲보다 도시에 더 어울린다. 그걸 인간이 다시 쫓아내려고 하는 것이고.
— 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대형 작업이 눈에 띈다. 당신은 2021년 『아트인컬처』 8월호 특집에서 그림 크기를 키워보겠다고 예고했었다. 약속을 지킨 셈인데 계기가 있었나?
Ho A4 종이에 작업할 땐 그림보단 기록을 남긴다는 마음에 가까웠다. 보통 완성하는 데 하루 정도 걸리니까 거의 기계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A0 사이즈는 보름이 넘어간다. 시간을 많이 쓰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하게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이 든다. 화면이 실제 크기와 비슷해 나의 경험을 감상자가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가령 <헤르만 광장 비둘기>(2023)에는 비둘기를 좀 더 디테일한 모습으로 담고 싶었다. 평소에 사용하던 A3나 A4를 사용하면 비둘기를 거의 점 찍듯 그려야 된다. 그러다 보니 새 하나 그리려고 그림이 커지게 된 거다. 이렇게까지 할 짓인가 싶어 웃다가도 마음 쓰이는 대상을 내버려 둘 수 없어 공을 들였다.
— 그림의 소재를 선택하는 기준이 궁금하다. 일상의 어떤 장면, 순간이 뇌리에 남곤 하는가?
Ho 돌이켜 보면 나는 늘 메인스트림이 아닌 주변부에 매료됐다. 가장자리에 놓인 존재들이 세상을 풍성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중요한 것 말고 사소한 것, 진지한 것 말고 엉뚱한 것, 아름다운 것 말고 별 볼 일 없는 것들이 우리를 더욱 다채롭게 해준달까…. 막연하지만 그런 사명감으로 임해왔다.
— 이제껏 주재료로 색연필을 고수해 왔다. 색연필의 매력은 무엇인가?
Ho 솔직히 말하면 내가 부지런한 성격이 못 된다. 물감을 쓰려면 물도 떠 와야 하고, 붓도 빨아야 하고, 또 뭘 버리고…. 그걸 못 기다리겠다.(웃음) 색연필은 영감이 떠올랐을 때 바로 작업에 몰입할 수 있다. 최근엔 버스를 기다리면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색을 섞는 맛도 물감과는 다르다. 유화는 보통 팔레트에서 색을 만들고 캔버스로 옮기지 않나. 그런데 색연필은 색을 조합하고 그리는 과정이 동시에 이뤄진다. 종이에 색을 비벼 새로운 빛깔을 찾아가는 과정. 거기서 재미를 느낀다.
— 호상근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관객의 에피소드를 그림으로 재현하는 ‘호상근재현소’다. 이번 전시를 맞아 5년 만에 국내에서 다시 문을 연다고.
Ho 2018년 원앤제이플러스원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2년 동안 휴업했었다. 운 좋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고, 덕분에 좋은 작품이 재현소를 통해 나왔다. 그런데 그만큼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작업이 좀 막힌다 싶을 때는 재현소가 도움이 됐다. 독일에서 재현소를 다시 시작했던 것도 소재의 단조로움을 깨고 싶어서였다. 확실히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보니까 한국에서는 들을 수 없던 에피소드가 많았다. 일상을 그린다는 게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나의 개인사에 천착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재현소는 다른 삶을 살아온 타인의 이야기를 모티프 삼는 만큼 나의 시야를 넓혀주고 새로운 영감을 떠오르게 한다. 재현소에서 나온 작업이 아니더라도 내 그림엔 재현소를 통해 보았던 타인의 시선이 섞여 있다.
— 호상근재현소로 만들었던 작품 중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듣고 싶다.
Ho 한 관객이 한강 공원에서 목격한 이야기다. 보통 눈이 부셔서 해가 비치는 방향으로는 잘 안 걷지 않나. 근데 어떤 할머니가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얹고선 그게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노을을 향해 뛰었더랬다. 기발한 발상이었다. 손수건으로 햇빛도 가리고, 페이스도 조절하고. 그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어르신의 노하우가 놀라웠다. 자신의 힘든 삶을 하소연하러 오시는 경우도 많았다. 근데 여기에 내가 위안을 받기도 했다. 나만 돈 없고 어렵게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되니까 용기가 생기더라.
— 올해 남은 계획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도 궁금하다.
Ho 12월 6일부터 9일까지 호상근재현소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림을 모아 출판물을 만들 계획도 있다. 욕심일지 모르겠다만 나는 먼 훗날 내 작업이 과거의 삶을 보여주는 인류학 사료로 쓰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왔다. 그래서 사물에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점도 있다. 뭐 하나 얻어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다작을 만들고 있기도 하고.(웃음)
◼︎ 『아트인컬처』 2023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