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상근은 일상의 관성을 그린다. 일상 혹은 삶의 의미에 대한 골치 아픈 질문을 작가는 존재에 대한 찬가로 돌파한다. 그의 회화는 늘 거리 어딘가에 있다. 여기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비둘기가 도로를 거닌다, 카트가 쓰러진다, 눈이 날린다, 타올이 마른다, 당근이 썩어간다…, 그렇게 일상은 반복된다. 작품은 반복의 발견이고, 그 발견은 또 다른 발견을 더해 나가면서 ‘이러한 존재 형식은 어떤가’라는 제안이 된다. 우리는 일상의 어느 한구석을 노려볼 때 특별함과 만나고, 오늘을 어딘가의 비극과 비교한다면 하루의 소중함을 더욱 깨달을 수 있다. 신앙으로 비롯된다면 아름다움은 끝이 없을 테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당연해서 예술이 아닐지도 모른다. 호상근의 회화가 당연했던 적은 없다. ‘일상에는 의미가 있는가, 의미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작가가 준비한 대답은 이것뿐이다. 질문의 층위를 삶이 아니라 존재로 바꾸면, 존재가 긍정되는 데에는 의미는 필요치 않다. 존재하니까, 계속 존재해야 한다.
몇 안 되는 사건이 아니라, 비일비재한 일상에 특별함이 함께한다는 말은 언제나 감미롭게 들린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감동에는 어떤 상투성이 있다. 왜 우리는 찰나를 품은 장면에서 갑자기 일상에 새삼스러움을 느끼게 되는가. 왜 그 숭고의 순간엔 주고받았던 상처와 부조리가 뒤로 물러나고 소중한 누군가와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아름다움을 감지하게 되는 것일까. 이런 감정/태도에는 어떤 삶에도 의미가 존재한다는 휴머니즘이 녹아있다. 그러나 그 의미가 생을 아프게 한다. 우리는 삶의 많은 시간을 삶 자체와 싸우며 보낸다. 근대 이후 위대한 장편에 등장하는 인물이 하나같이 자명한 악과 싸우는 로망스적 영웅이 아니라 무의미와 대결하는 신경증적인 소시민일 때, 그들은 오직 의미를 거두는 데 실패하는 것으로서만 영웅이 되어왔을 뿐이다. 호상근이 작품에 ‘표류’라는 말을 붙일 때 그러니까 “휘말리고 좌초해 의도치 않은 곳으로 도달하는 여정”을 시각화하는 순간, 이 주도권 없는 표류가 속한 일상의 관성은 휴머니즘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니힐리즘과 맞선다. 특별함 그런 게 어딨나. 의미가 없어 더 빛나는 생이 여기 응축돼 있다.
2
가장 최근 호상근이 발표한 개인전은 〈호상근 표류기 2023: 새, 카트, 기후〉(오에이오에이갤러리 2023)이었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이 ‘표류’해 왔음을 깨닫는다. 그의 그림을 움직여 온 것은 대부분 중력이 아니라 관성이었다. 캔버스라는 땅에 발 붙게 하는 힘,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미적 가치는 호상근에게 딱히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대신 그가 채집자, 기록자를 자처했듯 시선을 끈 대상은 그저 눈앞에 있는 것으로 충분한, 현전했고 현전해 왔다는 관성으로 빚어진 존재 자체였다. 그러니 호상근은 단지 발밑으로 밀려오고 밀려왔던 파랑에 휩쓸렸을 뿐이다. 표류가 관성의 일인 연유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은 무엇을 위해 생을 살아내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살아있기 때문에 살고 있었을 존재다. 이 논리와 함께 회화는 ‘삶(미美)은 무엇인가’라는 근본 질문 자체가 필요 없는 세계로 굽이친다. 살아내는 삶이 아니라, 태어난(나는) 생生. 호상근 회화의 구도는 생명이 태어난다는 데 있다.
〈Kiss of Pigeons〉(2023)는 마치 입을 맞추듯 부리를 맞댄 두 비둘기를 그린 그림이다. 표제부터 행위까지 작품은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 보이지만, 외려 이러한 외연은 화면과 대비를 이뤄 주제를 극대화한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화면의 구성이다. 리얼리즘 혹은 무정無情의 상태에 가까울 만큼 호상근은 사태의 어느 지점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광막한 도시 풍경을 뒤로했다면 그림은 이 삭막한 세상에서 서로가 유일한 보금자리임을 확인하는 모습으로서 애틋함을 확인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형상이 과장되거나 데포르메가 가해졌더라면 희극성이나 초현실성이 자리 잡았을 테다. 그러나 그림은 감상자에게 필요한 감정이 충분히 축적되기도 전에 빠르게 두 생명을 선보이고, 내러티브를 부여하기에 앞서 애정으로 보이는 이 행위가 그저 생명 활동의 일부라는 듯 지나가 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사랑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림은 닫힌다. 마치 정서도, 이야기도, 교훈도 없이 온전히 생에 대면하라는 듯이.
대상을 제외한 모든 것이 감산된 이후의 온전한 생의 대면. 이는 호상근 회화에서 일관된 테마다. 같은 전시에 출품된 <Sunbathing Man, Towel, Jar and Shoes>(2022)에서, 창틀에 기댄 남자의 뒷모습은 회화적 ‘뒷모습’이라면 모름지기 지닐 고독의 감정이나 이별의 서사 따위는 전달하지 않는다. 해석학적 관점에서 열거는 동등한 것의 나열이다. 인간, 타월, 병, 신발…. 이들은 누구도 서로를 앞서지 않는다. 의미를 따지지 않는 선에서 인류와 사물의 생은 구분될 수 없다. 오로지 태어나고, 존재한다는 점에서 같다. 마찬가지로 〈길 위에 누워있는 카트〉(2023), 〈철조망에 걸려 있는 나무토막〉(2023) 등은 표류 그 이상을 발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유의미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쓰러지고, 고착됐을 뿐이다. 그러나 신발 같은 생을 지녔다고 해서,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가 허무주의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중앙에 정렬된 형상, 늘 어딘가 구부정해 웅크린 것 같은 사람(사물)들, 눈에 보이지 않는 오직 박동으로만 감지될 움직임. 여기서 자궁 속 태아의 형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회화는 하나 같이 ‘태어남’을 예고한다.
호상근 회화에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화면이 감정과 서사를 지나쳐 버리는 속도는 비단 구성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종이에 색연필’이라는 물성과도 유비를 이룬다. 작가는 색연필을 주재료로 선택한 이유로 속도를 언급했다. 영감이 떠올랐을 때 바로 작업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 팔레트에서 색을 만들어 캔버스로 옮기는 유화와 달리, 색연필화는 색을 조합하고 그리는 과정이 동시에 이뤄진다. 이 동시성은 도형을 생성적으로 규정하는 원리와 비슷하다. 원은 일반적으로 ‘이르는 거리가 일정한 점의 집합’으로 정의되지만, 생성적 관점에선 그 궤도를 끊임없이 회전하는 ‘운동’으로 규정될 수 있다. 매끈한 도형은 사실 정지한 것이 아니라 그 속도 때문에 완전하고, 매 순간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매끈한 표면 역시 순간마다 탄생하고 있을지 모른다. 윤곽에선 선들이 끝없이 질주하며, 색면에선 결과 겹을 지닌 안료들이 수도 없이 쌓여가는 상황이 ‘진행’되는 것이다. 정지한 형상 아닌 탄생하는 ‘운동’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출산의 고통을 지켜볼 때 우리는 그저 기필코 태어나기를 기도할 뿐이다. 지금 탄생한 저들은 자기 자신을 낳은 것이다. 그것만으로 가치는 존재한다.
초기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관성과 중력의 대비는 더욱 뚜렷하게 확인된다. 호상근의 그림에는 처음부터 중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최근작과는 다르게 첫 작품집 『구석진 풍경』(2012)에 등장하는 인물은 마치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것처럼 배경조차 감산되어 있다. 그때에도 어깨를 말고 허리를 웅크렸던 사람들, 그러나 아직은 매끈하지 못한 표면은 그로서 더 채워질, 또다시 질주하고 쌓일 운동들을 예고하기에 더 작은 ‘태아’이거나 ‘착상’ 그 자체로 드러난다. 비약하자면 그의 화사畵史는 이 착상에서 시작해 그것이 안착할 내벽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초기작에서 신작까지 시간을 보낸 만큼, 화면의 기록된 인간도 사물도 그 세월을 지냈다. 배경이 구체적이지 않은 대상은 그 불분명함을 따라 감상자의 시선에 주관적으로 스며든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본 대상을 일상에서 만난다. 어느새 나고 자라, 우리 앞까지 온 존재들. 그림이 전달하는 것은 생의 의미가 아니라 생의 무게다.
마지막은 호상근재현소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호상근은 꿈이나 일화 등의 사연을 청취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번역한 작품을 주기적으로 발표해 왔다. 여기서 작가는 서사학의 일반론과 관계된 사고과 사건의 위계를 뒤집는다. 사고는 ‘처리’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되는 것이다. 사고가 일어나면 존재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가려는 관성에 지배되고, 사건이 발생하면 그 돌이킬 수 없는 진실에 발붙이고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는 중력에 묶인다. 그리고 좋은 서사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의 연속에 해당된다. 그러나 작가가 천착했던 사연은 대부분 사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손가락이 잘린 꿈을 꾸어도(〈잘린 손가락을 다시 부치려 노력하였다〉, 2018), 온몸이 젖도록 양동이로 물을 쏟아부어도(〈겨드랑이만 젖어 얼른 몸에 물을 뿌렸다〉, 2017) 삶은 결국 어떤 변화도 지니지 못할 테다. 그러나 생의 역량은 변화를 이끄는 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을 지키는 데 있기도 하다. 그저 살아있을 뿐인 대상이 미적인 것이 될 때, 그림은 생에 대한 찬가가 된다.
3
1957년, 기 드보르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개념으로서 ‘표류(dérive)’를 제시했다. 그는 도시의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경로를 무작위로 따르며 이동하는 것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감지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표류에는 목적(지) 없이 발이 이끄는 데로 향한다는 수동성(관성)이 본래적으로 따르지만, 역설적으로 행위의 의미에 저항한다는 측면에서 주체성 또한 함유되어 있다. 예술이 자본주의적 쓸모에 대해 쓸모없음으로 저항한다면, 마찬가지로 의미에 대해 무의미로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의미는 이미 세속적 층위에, 이데올로기에 물들은 까닭이다. 그것은 어느 측면에서 『필경사 비틀비』(1853)의 냉소적인 낙관주의에 기대고 있기도 하다. 좋은 미술은 대체로 ‘삶의 의미’라는 주제 둘레로 모여들곤 했다. 그곳엔 늘 삶과의 뜨거운 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호상근의 회화는 의미는 없거나, 없어도 되거나 혹은 이미 ‘생’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다. 사소한 일상, 아무것도 못 한 오늘과 어제 그리고 어쩌면 내일…, 그러나 그 시간은 언제나 버티는 것만으로 충분한 투쟁이 있지 않아 왔나. 있는 그대로 괜찮으며, 가치가 있다는 것. 이는 낡았지만 극복된 적 없는 말이기도 하다. 살아있다면 살아야 한다. 이 치명적인 명령을, 누가 극복할 수 있는가. 그런 게 바로 우리의 나날이지 않은가.
참조
기 드보르, (이경숙 옮김), 『스펙타클의 사회』, 현실문화, 1996.
신형철, 「태어나라, 의미없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pp.205~214.
◼︎ 오에이오에이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