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언가를 부르는 표정. 당신도 한 번쯤은 부르거나 대답해본 적이 있겠지. 당신이 나의 표정을 읽고 나는 혀로써 당신이 읽은 것이 맞다 대답하는. 내 과거를 대신 기억하는 안색에 대해, 내 슬픔을 대신 앓는 낯빛에 대해, 나 대신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얼굴에 대해 그러니까 대신하여 어떤 소리를 기다리는 표정에 대하여. 이들을 마주친다면 나는 비로소 고백할 준비가 끝날지 모르겠다. 괜찮냐, 어떻냐는 물음이 마치 열쇠가 되어서 그 열쇠에 꼭 맞는 말을 발음하는 일도 있지만, 그 표정들은 물음 없이 도착해 나는 그것에 맞는 어떤 소리를 뱉고 또 발음할 준비를 마치고 만다. 건네는 대화 안에서 몇 개의 말이 겨우 남을까 하는 고민. 그러나 그 열쇠를 통해 소리가 당신의 안으로 안착한다면, 굳이 구석진 자리에 앉지 않아도 또 천천히만 식는 커피가 도움을 주지 않아도 언어의 온도가 오래도록 남을 것만 같다. 고백을 하고 밤사이 뒤척였던 것은 당신의 입에서 ‘아니’란 말이 나올까보다는, 내가 두드린 계이름과 말이 정확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다만 네 입속에 내 잎을 넣어 그것이 자라나고 흔들리는 순간 염려는 없었다.
그림은 ‘보임’을 업으로 삼는다. 미술관이든 거리든 그는 관객의 앞에서 본능적으로 무언가 ‘읽기’를 주선한다. 영화나 음악이 보고 듣는 자의 입장과 관계없이 혼자서 재생을 시작하는 것과 달리 그림은 늘 입장과 마주침 동시에 시작한다. 누군가 먼저 그를 보고 있든, 시간이 늦었든, 불시에 마주쳤든 그는 항상 늘 처음을 내보인다. 이러한 시작에 대한 집념은 그(혹은 그를 지은이)가 읽히는 것에 얼마나 절박한지를 알려준다. 그는 보는 이에게 책무 중 어느 것 하나 놓게 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 모두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니 하므음을 보면 그가 무엇을 기꺼이 포기했는지를 어쩔 수 없이 보게 된다. 기꺼이. 그는 근심을 안아 말 없으려 한다. 여기에 읽어야 하는 것은 없다. 『종이 속 전시: ‘히망’하며 ‘희망’찾기』에 앞서 말한 책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야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느낌. 캔버스의 장면은 그대로 있지만 삶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삶의 균열이 변함없는 그림과 대비될 때 변함 많은 생은 더욱 아프다. 생이 가엾은 그림은 이제 존재를 양보한 채 당신의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 작가는 영원히 슬플 것이다. 대신에 마음은 거기에 오래 남아 있어라.
2
‘수인’과 그를 관찰하는 서술자 ‘슬아’가 함께, 한 미술관을 관람하는 과정으로 꾸려진 『종이 속 전시』는 소설의 형태로 하므음의 작업을 전시한다. 서사를 구성하는 것은 소설 속 전시 《흐르는 물 옆으로 여자와 돌멩이 하나》 그리고 이를 둘러싼 인물 간의 행동과 대화, 서술자의 인식이다. 그러나 두 인물이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전시가 마무리될 때까지 배치된 작업은 삽화로서 외적으로 등장할 뿐, 작업에 대한 어떤 서술도 야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작업은 서술의 대상에서 탈각돼 있다. 작품의 의도, 주제, 대상, 구성, 표면, 작가의 삶이나 작품 외부의 배경 따위는 결코 묘사되지 않는다. 두 인물은 그림에서 무언가를 읽지 않는다. 외려 그들은 그림에 얽힌 것 대신 스스로와, 서로의 관계를 읽기 시작한다. 그렇게 수인과 서술자가 알게 된 것은 그림이 아니라 자신들이다. 그러나 작업이 미처 알지 못했던 스스로를 밝히는 데 무관한 것은 아니다. 외려 그들의 입안에 작품이 담겨 있지 않지만, 그들의 입을 여는 것은 오로지 작품이다. 이제까지 눈은 작품의 입을 여는 열쇠였지만 여기선 작품이란 열쇠가 존재의 입을 틔운다.
“이 작가가 우연히 만난 앙리라는 한 남성과 일종의 게임을 하게 돼. 그를 우연히 전시장에서 만나게 되는데, 다음날 그가 베니스로 여행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쫓으면서 기록한 작업이었어. (…) 소피 칼의 작업도 자신의 삶에 타인을 의도적으로 끼워 넣고 있잖아.” (45쪽)
수인에게 들리고, 읽히고, 발음되는 소피 칼의 의미. 그러나 하므음 개인전 《히망하며 희망찾기》의 의미는 “종이에 있는 작품 설명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라는 생략으로서 쉽게 지나가버린다. ‘하므음’ 세 글자 이름은 텍스트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등재된 장소는 오직 이미지로 삽입된 전시 서문 한 곳 뿐, 이후 그의 이름은 단 한 번 호명되지 않은 채 은폐된다. 더불어 작가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야 할 전시 서문은 편집되어 그는 이제 목소리조차 지니지 않는다. 부호로서 기재될 뿐 읽을 수도 발음할 수도 없는 이름. 작가는 명시되었으나, 결국 미상(未詳)의 상태에 놓인다. 서술자가 ⟨히⟩, ⟨망⟩ 연작 안에서 떠올리고 읽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친구 수인의 삶이다. 소리로 보자면 ‘뭉’이었던 이가 모양과 호흡이 깎이어 ‘히’에 가까워졌다 ‘망’과 더불어 가는 과정, 창작자가 창작으로써 적재해온 결핍, 수인의 관심이 향하는 곳에서 발견되는 취향과 영혼 등등. 여기서 미상의 작품은 작가의 명령이나 자신의 목적을 이행함으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외려 작업은 자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몰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를 지키지 않는 대신 ‘존재의 이유’를 지키는 데 헌신하기 때문이다. 가리워진 삶을 보호하는 것. 진부한 대상의 이면을 찾아내는 것. 그래서 늘 사소하게 불어왔던 바람에서조차 그가 지나온 길을 발견하고, 그 바람에 이름을 붙여내는 것. 그렇게 작업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이유에 목이 매인다.
모음 ‘ㅢ’는 발음 체계에서 세 개의 소리를 지닌다. 자음 없이 홀로 첫음절에 올 때는 [의], 마찬가지로 자음 없이 둘째 음절 이하에선 [에], 자음과 사용되는 경우에는 [ㅣ]로 발음이 나뉜다. 다만 ‘ㅢ’의 표기는 맞춤법상 표의주의를 따르므로 세 개의 다른 소리는 모두 ‘ㅢ’라는 표기에 집약된다. 따라서 하므음의 기획이 『’히망’하며 ‘희망’찾기』란 부제를 지닐 때, ‘히망’과 ‘희망’ 두 낱말은 소리로는 구분되지 않지만, 표기 원칙상 표음주의와 표의주의 중 무엇을 따르는지로 구분된다. 표의주의 원칙이 반영된 ‘희’가 의미를 기입한 작가의 표기라면, 표음주의 원칙이 반영된 ‘히’는 기입된 의미를 무릅쓰고 오로지 발음하는 입술을 따르는 표기이다. 따라서 하므음의 기획은 시작부터 의도의 산출이기보다, 그것이 어디에서 발음되는지에 주목하는 신체의 산출에 해당된다. 수인과 슬아는 그들보다 먼저 존재했던 일반명사로서의 ‘희망’을 발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명사로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희망’은 그저 사전이 주입하거나, 타인이 약속해 의해 규정된, 자신과 관계없는 의미망에 불과하다. 그러나 둘은 마치 ‘희망’이라는 단어를 생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처럼 ‘히’망이란 소리에서 오랜 시간을 체류했다 비로소 ‘희’망에 도착한다. 자신의 입술을 지니고서 그리고 신체를 짊어지서고,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발음하는 생을 지니고서 어디에도 없는 그들만의 ‘희망’과 만난다. 이때 ‘희망’은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서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고유명사로서의 ‘희망’이다.
그들은 작품을 본 이후에 소리내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찾아낸 ‘희망’은 작품 속에 놓여 있지 않다. 작업은 자신의 발설을 멈추고 그들이 소리내는 희망을 기록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과 드러나는 것. 존재가 아닌 존재의 이유를 지킨다는 것은 이런 식이다. 따라서 미상의 작품은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혹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읽을 수 있는지로는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대신에 우리는 반대로 물어야 한다. 작품은 무엇을 들어줄 수 있는가.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말을 건넬 수 있는가. 그의 연작에서 평면을 초과하는 입체들은, 보는 이를 향해 돌출된 언덕이기보단 자신의 이야기를 발설할 입술을, 얼굴을, 몸을 그리하여 생을 포갤 홈을 만드는 윤곽이다.
“‘망’은 우주선 같기도 하고 그림에 귀가 달린 것처럼 생겼다. 가운데 큰 구멍을 바라본다. 다시 한번 작품 앞에서 입을 벌려 ‘망-‘해본다.” (82쪽)
슬아가 “‘히’를 보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보”면서도 그가 돌연 도착한 곳이 “근래 수인이를 보며 느꼈던 느낌 (…) 수인의 영혼”(60쪽)인 것처럼, ⟨망01⟩을 보면서 숨죽여 말을 잃기보다 “망”, “망”, “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외려 소리를 내야했듯, 작품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기에 내 삶을 정리해보는 수밖에 없다. ⟨창문 ‘히’⟩에 붙어있는 검은 선분은 작가가 붙인 것이 아니라 수인이 ‘뭉’에서 ‘히’로 삶을 깎으며 떨어트렸던 눈썹. ⟨히06⟩ 속 누운 결들은 중력에 끌린 것이 아닌 그가 밤새 부은 얼굴을 부벼 삶을 그슬린 자욱. ⟨히02⟩의 날카로운 찢김은 그가 작품보다 먼저 삶을 파 내려갔던 손톱의 길목.
“커다란 원을 그리며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스스로 찾을 수 없는, 찾을 수 없기에 출발할 수 없던 곳이다. 망이란 육체 없는 소리를 통해 간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갈 수 없었던 곳이 직접 우리를 향해 온다. 소리를 타고 온다. 그때 온전히 알아볼 소리의 몸들을 바라본다.” (102쪽)
누구도 자신의 출생 현장에 입회할 수는 없다. 그러니 누구도 생에서 출발을 명시한 적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출발할 수 없던 곳”에서 그는 하염없이 ‘지금 여기’에 도착하고 만다. 그냥 던저진 생을 어떻게 발음할 수 있을까. ‘히’와 ‘망’. 미상의 작품은 생의 발음에 꼭 포갤 입술의 모양으로, 오직 그것만을 들을 귀의 모양으로 생을 지키려 한다. 그러니 네 입속에 내 잎을 틔워, 이빨 어느 곳에도 닿지 않을 히, 망을 처음으로 소리낸다.
3
‘이름 없는 꽃’이란 문학적 수사에 서글픔이 어리는 까닭은, 그에게 없는 것이 이름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부재한 것은 삶을 소리 낼 발음과 함께 그 발음을 들어줄 청자이기도 하다. 듣는 귀가 없는 세상에서 누가 감히 소리를 낼 수 있을까. 혹은 그것을 과연 소리라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름 없는 꽃’ 아래 문학이 소리 나는 낱말로 표기하는 것은 식물의 쓰임새나 작명가의 목적 따위가 아니라 그가 이뤄오고 이뤄낼 유일한 삶들이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이름 없이도 삶의 소리와 그것을 들을 청자를 갖게 된다. ’이름 없는 꽃‘이란 표현은 진부해졌지만, 소리낼 수 없는 삶을 위해 다시 반복된다. 인간이 각자의 이름을 갖고도 다른 소리로 호명되길 원하는 때가 찾아오는 이유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이제까지 지녀온 소리는 그의 삶에 대한 발음이기보단, 삶보다 먼저 이름이 존재했듯 그와는 관계없이 존재했던 소리에 불과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역시 호명이 아니라 삶을 발음할 소리와 그것을 들어줄 청자다. 하므음의 작업은 슬아가 수인을 다른 소리로 호명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는 『종이 속 전시』에서, 이제껏 ‘읽음’만을 주선했던 그림이 ‘청취’에 나서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그는 말없이 듣고, 삶의 소리를 청취한 첫 표정으로 형태를 빚는다. 이제 들을 줄 밖에 모르는 작품과 외려 관객의 말을 따라하는 작품은, 하므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즉 그 앞에서 소리내는 사람의― 작업같이 될 것이다. 캔버스의 장면은 그대로지만 삶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삶이 변함없는 그림과 대비될 때 변함 많은 생은 서글프다. 예술가의 자리를 관객의 자리와 뒤섞고, 예술의 자리를 삶의 자리와 뒤섞음으로써 하므음의 작업은 삶을 캔버스의 입 속으로 넣곤 오래도록 보존할 준비를 마친다. ’아니‘란 말이 나올까 걱정도, 정확하지 않은 계이름을 두드릴까 하는 염려도 없이 하는 고백. 여기 종이 속 미술관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소리 나지 않는 네 입속에 내 잎을 흘려 넣는다. 잎이 되감기는 소리. ‘히’와 ‘망’. / 조재연
참조
진은영, 「고백」,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하므음, 『종이 속 전시』, 2021
이 글은 ⟪종이 속 전시: ‘히망’하며 ‘희망’찾기⟫ 도록를 위해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