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 누구도 비웃지 않게 된다_정희영: 짐승에 이르기를

정희영 기획, ⟪짐승에 이르기를⟫, 합정지구, 2021. 5. 15~6. 13, 전시 포스터(디자인: 이산도)

경고문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기소당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추방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총살당할 것이다.
지은이의 명령에 따라, 군사령관 G. G.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핀의 모험』

1
모두가 약하다고 외칠 수는 없을까, 각자의 강함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투사처럼 굽히지 않는 의지로 세상을 변혁하는 이야기를 나는 도무지 할 수가 없다. 세계를 몇 개의 명제로 단호하게 진단하고, 적을 규탄하는 위대한 일은 내게 할당되지 못한다. 내 생김새는 오랫동안 비겁하고 비천하다. 광장의 절정 위에서 나는 늘 비켜서 있었다. 누군가 밀치기도 전에 인도에 먼저 올랐던 그리고 매쓰거운 분무를 몇 분 버티지도 않던 나는 궐련 어느 쪽에 입을 맞추어야 할지 몰랐을 때부터 내 자격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내 몸도 타인의 물건도 숨기는 데 익숙한 내 앞은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그래서 무언가 쓸 때마다 나는 늘 에둘러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우회에도 애써 걷는 까닭은 비겁은 차치하더라도 비천으로 구할 수 있는 의미가 있단 절박함에서였다. 고귀하고 완고함이란 조금도 없는 천함과 미약에서 길어낼 답이 어딘가엔 존재한다는 것. 외려 강함을 서로 앞다투어 외치는 이들이 초래한 세상에서 오직 미력으로써 발견할 가치가 있다는 것. 이 멍에 같은 희망을 뿌리칠 길은 없었다. 그러니 비겁함 때문에 내가 아니어도 너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주었으면.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그들은 눕지도 울지도 않는다. 그러나 ⟪짐승에 이르기를⟫(이하 ⟪짐승전⟫)은 조그만 발치에도 눕고, 어느 누구보다 먼저 우는 이들로 꾸려진다. 수평의 쪽수와 수직의 문단도 없이 그저 짖음으로써, 울음은 처음으로 가해자가 된다. 고귀한 자가 가치에 닿는 일은 그의 고귀함을 재귀로 증명할 뿐이지만, 비천한 자가 가치에 닿는 일이란 그간 알려져 있지 않던 가치의 평등한 새 얼굴을 밝힌다. 그다음 누구도 저열함을 비웃지 않게 된다. 민주주의의 프로그램은 양쪽에서 실행된다. 고귀한 자를 비천한 위치로 폐위하는 것과, 비천한 자를 고귀한 자리로 격상하는 것. 급진, 변혁과 거리를 두게 된 민주주의가 진리를 담지한 폭력이 될 수 있었던 연유는 전자에 있다. 보편, 전체라는 개념을 훈계하거나 사리게 된 민주주의가 어느 누구를 배제하지 않고 모두를 강제할 수 있었던 까닭은 후자에 있다. 이 두 문장은, 모두가 고귀한 자리에 올랐다고 믿기에, 찬탈簒奪의 주체를 마다한 인간의 조건 아래선 과거형으로 쓰인다. 그러나 ⟪짐승전⟫에선 여직 비천한 자가 그 찬탈의 빈자리를 채운다. 이제 짐승은 사납게도, 폭력적인 변혁과 보편 그리고 진리라는 낱말을 다시 거머쥔다.

권동현+권세정, <세디: 도도와 만나는 방법>, 싱글채널 비디오, 15분 8초, 2021(사진: 정영돈)

2
그와 만나기 위해서 당신은 발설하는 마음을 억눌러 말을 잃어야 하며, 서고 싶은 목을 베어내고, 또 뵈고자 하는 눈을 뚫어 도려내야 한다. 그러니 권동현+권세정의 <세디: 도도와 만나는 방법>(2021)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인간인 당신의 폐위이다. 늙어 눈, 귀를 먼 개는 곁에 살아온 이를 더는 올려 대하지 못한다. 그는 부러 허리를 세워 당신의 무릎에 두 발을 올릴 수 없고, 무엇을 기대하며 앉는 일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에게 기대를 요청케 했던 인간의 고귀함은 이제 효력을 지니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는 어떤 마음도 바뀌지 않았으므로, 또한 그는 언제고 인간의 고귀함을 보고 엎드린 것이 아니었기에, 애초에 고귀함은 이 관계에서 무엇도 실현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빙된다. 인간의 고귀함은 처음부터 효력이 없었다. 외려 고귀함을 발휘한 것은 결핍으로 알려진 존재의 ‘비천함’이다. 그는 진정한 고귀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인간의 눈에 수직의 시야가 전부였을 때, 오직 그의 높이만이 대지가 수평임을 인식하도록 했다. 인간에게 사랑이 주고받는 것일 때, 그의 진동하는 몸 끝만이 단지 존재로 사랑에 빠지고, 주는 것만으로 완전할 수 있음을 느끼도록 했다. 고귀함이란, 소유로 누군가를 거두는 능력이 아닌 지님 없이 나누는 것이란 깨달음으로, 작업은 우리 중 가장 먼저 인간의 폐위를 받아들인다.

이성의 부재, 언어의 불충분, 행위의 결핍 등 인간과 비인간인 동물의 차이는 다양하게 열거될 수 있지만 본질은 같다. 인간은 무언갈 할 수 있지만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 그러나 어떤 역량의 유무로 결정되는 차별은 비단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은 아니다. 장애인, 노인, 여성, 성소수자의 차별 역시 같은 층위에 있다. 인간적이라 치부되는 특정 능력을 배경으로 하는 위계는 동물뿐 아니라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영역의 모든 존재와 잠재적으로 충돌한다. 궁극적인 평등은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역량의 입증이 아니라, 그런 입증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 역량을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시킬 수 있는지를 물음한다. 동물의 인권화가 아닌 인권의 동물화. 그러니 <개집>(2021)의 개의 형상은 짐승조차 지나 불가능과 무의미의 가장 짙은 곳까지 내려가 먼지따위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불가능과 무의미로 덕지덕지 점철된 그래서 가장 급진적으로 비천한 존재의 행방으로, 그 위에 나열된 존재 모두의 해방에 접근한다. 명료함의 포기로 도려낸 안구, 수직의 위계를 처분하고 베어낸 목. 그러나 사랑이 더 이상 주고받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듯, 볼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정성스럽게 빚어낸 형상. <세디: 도도와 만나는 방법> 속, 대가리가 된 머리는 처음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그가 그랬듯 주변을 구른다.

무니페리, <실종: 유령으로도 돌아오지 못하고>, 싱글채널 비디오, 5분 20초, 2021

사물事物에 제각기 영혼과 소명을 함유케 했던 모든 초월적인 것으로부터의 자발적인 단절은 앞서 말한 차이를 문법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방의 기획마다 인간의 자기 회복, 즉 인류가 갖고 있는 본질과 능력의 자기 긍정이 등장했다. 여기선 차이 없이는 정체성의 불안에 빠져드는 근대적 주체의 강박이 읽힌다. 폐위는 이마저도 돌이켜야 한다. 그러나 위계를 은폐하기 위해 구성됐던 평등의 이념은 폐지되지 않고, 회귀 속에서도—회귀로써만— 남아 이행된다. 실종되거나 죽은 동물과 의사소통을 한다고 주장하는 데드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의 등장은 근대인의 성취를 일순간에 무너뜨린다. 무니페리의 <실종: 유령으로도 돌아오지 못하고>(2021)는 폐위의 또 다른 전선이다. 인간은 결별했던 주술과 신비의 세계에 재진입한다. 그러나 이보다 급진적인 것은 동물을 향한 ‘언어’의 사용이다. “너는 여기서 사고를 당했고, 너는 이미 죽었단다. 너는 이제 이승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여기 두고 너의 영혼을 잘 챙겨가렴.” 대화는 언어의 당사자들이 대등한 이해 능력을 공유하고 있으며, 서로 소통을 나눌만한 자격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한다. 비언어적 개체를 향한 언어적 주체의 언어 사용. 다시 말해 인간이 전근대에 입회하지 않고선, 짐승과 동등한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선 가능할 수 없는 사건이 무니페리의 작업에서 발생하고 만다. ‘저 데드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의 말은 정말 개소리 아닌가.’라고 느끼는 순간 작업은 적중했다. 짐승에게 인간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짐승과 같은 권력을 지니게 됐을 뿐.

강기석, <꼭 움켜쥐다 스르르 놓았다>, 싱글채널 비디오, 8분, 2021

강기석의 퍼포먼스 <꼭 움켜쥐다 스르르 놓았다>(2021)는 이렇게 비인간화된 인간의 지위를 극화한다. 권동현+권세정, 무니페리의 작업이 인간과 짐승의 전도된 과제를 폐위의 형식으로 제시한다면 강기석의 퍼포먼스는 폐위 이후의 현존을 보여준다. 인간의 손은 누군가의 눈가에서 눈물을 닦을 수 있다. 동시에 그 자리에 날 달린 것을 들었던 자들이 세상을 호령하거나, 필요한 어떤 것을 생산해 지평에서 가장 먼 곳과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해 문명을 만들어낸 역사가 존재한다. 거대한 목적(동기)엔 그것에 걸맞은 행위가 따른다. 똑같이, 웅대한 행위엔 웅대한 목적이 연결된다. 이는 비용과 효용의 비례 관계처럼 자본주의 아래에서도 계승되어온 근대철학의 공리였다. 그러나 폐위된 이들의 손은 어쩐지 비대칭적이다. 등장한 이들의 분투奮鬪가 고작 얼음을 녹이기 위한 일이라면, 얼음은 절로 스스로를 융해하기에 행위는 무용해진다. 한편 행위가 세계의 거대한 질서일 역학力學을 거슬러 융해를 중단시키는 일이라면 이는 분투가 아닌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연기자의 행위는 남루한 까닭에 무모하다. 결국 불필요한 일이거나 불가능한 일이라는 비대칭 위에서 행위는 격정 안에 있는 것과 별개로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혹은 거짓 목적만을 지닌다—. 그리고 이는 폐위 이전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 일에 대한 헌신. 그렇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바랄 수 없는 것을 위해 격정에 오르는 일은 폐위 이후의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김송희, <나는 지금 달팽이를 죽이러 간다>, 종이에 목탄, 콩테, 150×400cm, 2021(사진: 정영돈)

3
작품이 자유를 내용으로 갖는 것이 아닌 스스로 자유 자체를 행사하는 순간은, 작품이 작가가 재현하는 내용에 대해 초연함으로써 구성된다. 작품의 자율성, 무엇보다도 내부 형상의 자율성은 형상에 자리와 기능을 부여하게 한 주제와 서사에 대해서 갖는 자율성이다. 작가가 의도한 방향에 종사하지도 거스르지도 않는, 그저 그것에 관심 없음으로써 세계의 외부로 탈각되는 대상은 작품에 돌이킬 수 없는 자유를 기입하고 만다. 주어진 세계 밖을 사유할 수 없다는 오래된 규약은 잠시 기각된다. 김송희의 <나는 지금 달팽이를 죽이러 간다>(2021)에서 인간은 온전한 배추를 수확하기 위해서 솎아낸 달팽이 무리를 곤란한 표정으로 마주한다. “살아있다. 다 살아있다. 나는 지금 이 달팽이들을 죽이러 간다. 달팽이도 살아있고 닭도 살아있고 돼지도 살아있고 사람도 살아있다. 내가 달팽이를 죽이러 간다.”(김송희, 『일기』, 2000~2021) 다른 생명을 기르는 일이란 또 다른 생명을 소거하는 일이라는 모순을 생각하는 인간은, 자랑스러울 만큼 이상적인 모습을 온전히 나타낸다. 그는 살육의 거북함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불살不殺을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는 명제가 실현되는 순간. 변증법 속에서 눈을 지새우는 인간은 이다지도 아름다울까.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형상은 두 줌에 가득한 달팽이의 형상이다. 이성의 몽유夢遊를 중단시키고 각성이라는 메시지가 그려지지만 여기엔 낯선 감정이 동반된다. 이 낯선 형상은 행위에 초연한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시선을 맞추려는 인류의 눈과는 달리 달팽이 모두는 그 눈에 등을 돌리고 있다. 그들 중 어느 누구하나도 목숨을 부지하려 설득에 나서겠다거나 인류의 죄책감을 초래하겠다며 시선을 구걸하지 않는다. 인간을 얼어 붙인 난처와 잔혹 사이로, 그들은 완전한 태평과 단념에 도달해 있다. 외부에 대한 무상無常과 내적 자유. 이는 이상ideal의 개념이 요구하는 것이다. 그가 두 손바닥의 위에서 그저 편안히 웅크리거나 들어 올린 높이를 감상하는 것은 몽롱해진 정신 상태 때문이 아니라 올림피아의 신들이 누렸던 것과 거의 같은 만족과 행복을 향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때 짐승은 인간이 폐위를 고민할 틈도 없이 인간보다 높은 곳에 선다. 위대한 그림은 위대한 주제를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위대함은 작품의 도착지로서 강요하는 힘을 지니며, 그에 맞춰 위대함을 행사할 수 있는 작업 또한 거대한 힘을 갖고 있을 테다. 다만 위대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위대함을 뿌리치거나 내동댕이친다면 그 작업은 또 얼마나 거대한 힘을 갖고 있단 말일까.

시간과 공간은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결과 앞에서도, 모두가 따로이 세계를 갖지 않는 까닭은 ‘세계선世界線’의 증명 때문이었다. 각자는 시간의 팽창으로 서로 다른 세계를 경험하면서도, 동시에 이 차이는 물리적인 사건을 연결한 궤적, 세계선이 모두에게 일치하게 됨으로써 무마된다. 그로써 존재들은 차이를 무릅쓰고 하나의 지평 위로 그려질 수 있었다. 이처럼 인간의 외부는 차이를 무한히 승인하면서도 공동의 지평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제노사이드 같은 비극의 용의자가 동일성으로 검토된 이후, 인간 내부에서 보편은 드물게만 찾아지고 만다. 윤리로 승화한 차이가 오직 상대적인 것을 통해 이상을 이룩할 수 있다 전할 때, 모두가 분리된 처소에 있다면 지평에 함께 있음을 나타내는 낱말 ‘세계’는 사라진다. 동일성과 자발적으로 단절한 동시대인은 부정적인 요소에 가차 없이 연루되지만. ‘세계’를 잃어버린 이상 더는 세계를 바꾸자 할 수 없다.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역량은 외려 인간 외부, 짐승들 사이에 간직돼 있다. 짐승 자체로 정치적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닐 테다. 대신에 그들은 현실의 삶을 지배하는 논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정치의 개념을 보여준다. 무진형제의 <궤적(軌迹)-목하, 세계진문(目下, 世界珍門)>(2018)은 인간이 망각한 개념 ‘세계’를 인간에게 일깨운다. 제목의 의미를 헤아릴 때, 궤적은 하나의 세계로 입장하는 보편의 진입로, 세계선을 가리킨다.

무진형제,<궤적(軌迹)-목하, 세계진문(目下, 世界珍門)>, 디지털화한 35mm 사진 프로젝션, 8분, 2018

영상 속에서 소설 『해저 2만리』의 문구 아래로 롯드월드타워 아쿠아리움이 도시의 정경과 중첩될 때, 아쿠아리움은 인류의 시야로 짐승을 관찰하는 공간이기를 멈추고 짐승의 목하目下에 놓인 인류의 처소를 보여준다. 도시는 모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때 짐승의 망막에 비친 것은 무엇도 분할하지 않는 오직 하나로 동일화된 분포다. 타워에 명시된 555m, 555.65m2의 수치와 극어강, 조기어강 등의 종차는 대상의 정체가 아니라 대상을 어떻게 차이지었는지를 말한다는 점에서, 분별은 대상보다 대상을 보는 관점, 차이에 함몰된 인간 자신을 드러낸다. 지식은 외부가 아닌 스스로를 알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첩 속에선 높이도, 넓이도, 종차도, 나아가 주객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도란 해발로 의미짓는 것이기에 잠긴 도시는 더 이상 높이를 지니지 않으며, 구획된 경계가 부재한다는 점에서 수면 속 공간은 넓이 또한 지니지 않는다. 모든 것은 상평형의 상태처럼 종으로도 주체와 객체로도 분리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는 자유롭다./다만 벽, 이게 무엇보다도 나를 화나게 한단 말이야.” 짐승을 화나게 한 벽은 세계를 존재로부터 격리시킨 ‘차이’다. 자연을 일컬을 때 풍경과 짐승을 분리하지 않듯, 존재로서 해수海獸는 세계와 단 한 번도 결별을 짓지 않는다. 근대 이후 조금도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한 인간과 달리 세계의 변혁에 가담했던 짐승은 차이를 모르는 세계의 첫 표정을 인간에게 보여준다. 인간만이 아는 차이들 그러나 “이것을 다 알아도,/사실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아야 돼./-신세계로부터-”

4
오늘을 위협하는 새로운 배후가 생겼다. 우리는 전화선 속에서, 새벽 어귀에서 남모르게 드나드는 울음을 엿듣는다. 부주의하게도 부스럭 소리를 이따금 내며 미행에 가담하는 까닭은 그들을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밀봉된 것은 소음, 체취, 솜뭉치 한 줌, 발톱 몇 조각, 배설물 몇 덩이, 공연음란公然淫亂 따위일테지만 충분히 불순해 마지않는다. 왜냐하면 의연한 인류는 성숙해진 이후로 언제 한번 이 밀봉된 유형들을 남에게 내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을 지배하는 논리는 그런 것을 감히 허락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죄는 야옹 혹은 멍멍 또는 그렁그렁 등등.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한 목록은 이런 것들이다. 그가 언어 없이 사람의 마음을 열 울음을 가졌다는 것. 직립으로 얻은 높이를 허물어버린다는 것. 고된 여정 끝에 결별한 신비와 신화를 다시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 늘 어디선가 내 것에 되었단 믿음을 흐트려놓는 것. 온 힘을 다해 이룩한 최선最善을 허무 속 내버리게하는 것. 짐승에 관한 작업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다. 다만 인간이 돌아갈 고향으로서의 자연과 고귀함을 품은 이상적 존재로서 짐승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충성심과 모범성을 부여하기 위해 종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짐승전⟫은 오직 비능력과 비천함, 저열함, 종작없음, 부정함으로써만 고요히 빛난다.

“평온한 거리만큼은 낯설어야 한다. 고요한 피 비린내가 인간과 비인간을 무작위로 덮어가는데 그것을 사건이 아닌 일상으로 여길 수 있으니 말이다.” 정희영의 말처럼 평온한 거리가 낯설어가는 이유는 전시가 속속들이 미행에 따라붙은 우리를 의도치 않게 그들과 눈맞추게 하기 때문이다. 그 눈동자 위로 다시 스스로를 보게 될 인간은 고요한 피 비린내를 맡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종의 것이든 피를 보면서도 가여워도 않는 우리. 그 대신에 새벽까지 심장 타는 냄새를 맡는 금수들. 전시는 차라리 피 냄새를 맡으면 머리가 미쳐 도는 기억을 “현세계가 선사한 두 눈을 찔러서라도 설령 눈 먼 짐승이 될지라도 피끓는 자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보려는” 예언으로 출석시킨다. 그럼에도 자연이 초록 페인트밖에 엎지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래서 붉은 색이 없다면, 우리의 손목을 잘라야겠다. 정희영이 인용한 문구를 고쳐 적는다. “나는 이제 동물이야, 언니” 동기를 찾고, 교훈을 찾고, 플롯을 찾았으니 군사령관 G.G의 명령과 우리의 바람에 따라 우리의 기소, 추방, 총살을 찌꺼기까지 받아들인다. 강함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모두가 약하다고 외칠 수는 없을까. 투사처럼 굽히지 않는 의지로 세상을 변혁하는 이야기로는 나는 도무지 시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비천함과 저열함으로 마지막까지 닿겠다. / 조재연

참조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창작과비평사, 2009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창작과비평사, 2018
마크 트웨인, 김옥동 옮김, 『허클베리핀의 모험』, 민음사, 2009
알랭 바디우, 이종영 옮김, 『윤리학』, 동문선 현대신서, 2001
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옮김, 『불화』, 도서출판 길, 2015
자크 랑시에르, 박기순 옮김, 『아이스테시스』, 2019
정희영, ⟪짐승에 이르기를⟫ 전시서문, 2021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이 글은 ⟪짐승에 이르기를⟫ 도록 게재를 위해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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