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의 <어둠의 심연>은 진보적인 작품이다. 문명의 저편에 존재하는 어둠의 심연을 찾아 떠나는 말로우의 여정 속에서 유럽 식민주의의 위선과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은 철저하게 고발되며, 근대 유럽의 문명이 낳았다고 표현되는 ‘위대한’ 커츠 대령의 어둠과 동화되어 변태된 모습은 유럽 식민주의가 은폐하는 문명의 이중성과 야만을 반성하게 한다. 소설이 갖고 있는 식민주의에 대한 고발과 인종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근대를 지탱하고 추동시켜온 계몽정신-이성-의 야만성을 드러낸 이러한 전복적 시도들은 작품의 진보성을 입증시키는 데 성공한다. 분명 소설은 당대 어느 문학에서도 찾을 수 없는 비판 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둠의 심연>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콘래드는 헤밍웨이와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문학 작가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1975년 나이지리아의 유명 비평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로부터 소설의 진보성은 추락한다. 아체베의 비평 속에서 콘래드는 당대의 식민사관을 비판하지만, 여전히 그가 발붙이고 있는 지면은 식민사관임이, 여전히 그 곳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이 노출된다. 그가 백인 여성을 대상으로 “애도 중이었다.”라든지 “성숙한 충정과 신뢰 그리고 고통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든지의 오로지 인간만을 형용할 문장을 사용했던 것과는 다르게, 흑인 여성을 대상으로는 “야성적이면서도 화려했고 도발적인 눈빛을 가졌으면서도 우아했다.”라거나 “드넓은 광야인 양 뭐라 형언하기 힘든 의지를 뿜고 서 있었다.”라는 짐승에게도 형용이 가능한 문장-오히려 공작새에게나 어울릴-으로 차이를 발생시켰을 때, 아프리카인들은 서구인과 같은 인간이 되지 못했다. 또 아프리카인들의 언어가 말이라고 하기엔 어색한 “매부 수수한 소리들을 거칠게 옹알거리는 언어”와 “단음절로 이어준 꿀꿀거리는 돼지 멱따는 소리”로만 포착되다가, 예외적으로 “그자들을 어쩌려고?” “먹으려고!”라는 말을 할 때에만 인간으로서의 언어-영어-로 허용될 때에도 그들은 결코 인간이 아니었다. 작품의 추상과는 반대로 작품의 구체는 콘래드가 비판하고자한 것 그 자체였다.
아체베에게 콘래드는 대놓고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선전하는 것보다 더 악랄하게, 은연하게 의식 속에 이러한 주의를 녹여내는 “잔인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어둠의 심연>의 심연은 이렇듯 당대의 다른 작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의식이 흐르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아체베의 비평이 끝난 다음에도 우리에겐 여전히 비평되지 않은, 그리고 해체되지 않은 심연이 존재한다. 그것은 식민주의를 비판하면서 식민주의를 향해있는, 인종차별주의를 거부하면서 인종차별주의를 향해있는 소설과 콘래드의 부조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물음이다. 아체베의 비평이 소설의 부정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소설이 행한 근대 유럽을 향한 비판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둘은 분명히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이 부조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또 그 부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가 아체베의 비평 후에 고민해야할 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리고 나는 부조리를 해명해야하는 이 지점을 ‘언어의 배반’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언어의 배반은 다음의 두 조건으로부터 발생한다.
첫 번째 조건은 한 대상의 인식이 관념에 의해서 제한될 때이다. “☏” 이 그림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우리 대다수의 대답은 “전화기”이지 결코 “곡선과 도형들의 집합”이란 대답이 되지 못한다. 이유는 인간의 인식이 이미 우리가 소유한 전화기의 관념에 의해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전화기라는 관념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대답은 “곡선과 도형들의 집합”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조차 우리는 곡선과 도형의 관념을 안다는 것에 제한을 받는다. 또한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비단 우리의 인식이 관념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 관념이 매우 많은 구체들을 배제시킨다는 것이다. 인간은 전화기의 다이얼, 색, 질감, 연장 등이 없이도 이 그림이 전화기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두 번째 조건은 언어의 오염이다. 1945년 비판이론 철학자인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쓸 수 없다.”라고 말한 적 있다. 그는 그 취지를 그러한 시대에서 문화의 부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 설명했지만, 또 다른 이유는 더 이상 언어가 한 정서를 온전히 포착하고 적확하게 표현할 수 없게 돼버린, 언어가 오염된 상태에 존재한다는 데 있었다. 베토벤을 비롯한 수많은 교향곡은 당시의 전쟁을 찬미하거나, 포격을 암시하는 공포 조장용 음악으로 또 심지어 아우슈비츠의 행렬을 위한 행사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교향곡의 언어가 본래의 숭고나 애정과 같은 어떠한 정서를 표현할 수 없도록 오염시켰다. 그것이 고작 표현하는 것은 죽음과 학살 그 자체였다. 문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시는 식민주의를 그리고 유럽의 문명을 고상한 것으로 치장하는데 사용되었다. 낭만주의자 바이런의 시는 <어둠의 심연>의 커츠 대령이 아프리카인의 목을 베면서 읊조렸던 것처럼 더 이상 낭만 아래의 정서를 포착하지 못했으며 야만과 포악으로 오염되었다. 표현은 같았지만 의미만은 달랐다. 당대의 언어는 식민주의가 인종차별주의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전 시대와 절연된 것이자 오염된 것이었다.
그리고 콘래드에게는 이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가 아프리카인의 언어를 처음 들었을 때, 마치 우리가 전화기의 관념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를 곡선과 도형의 집합이 아닌 “전화기”로 제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유럽인의 관념 아래에서 아프리카인의 생소하면서도 낯선 언어는 “매부수수하고” “단음절로 이루어진” 울음소리로 제한된다. 아프리카인의 묘사에 있어서도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유럽의 형식에서 이탈한 모습은 콘래드라는 유럽인의 관념아래에서는 무형식에 가깝고 이는 문명과 인위적인 것보다는 어떠한 자연성 혹은 야성의 성질을 띤 것으로 포착된다. 이것이 첫 번째 그가 가지고 있는 관념에 의해서 인식이 제한된 조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오염된 언어로부터 곧 전염된다. 당대의 언어에서 자연은 지배와 착취의 대상이자,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아프리카인이 자연성 혹은 야성의 성질을 띤 것으로 포착된다는 것은 곧 지배와 착취의 대상과 수단으로의 취급될 성질을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두 번째 조건 언어의 오염에 해당한다.
이 때, 이 두개의 조건 아래에서 콘래드의 언어는 개인의 의도를 벗어나 외재하게 되고 전혀 다른 것이 담기도록 강제되는 데 이것이 바로 ‘언어의 배반’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관념으로 포착할 수 없는 인식이 오염된 언어를 토대로 이루어졌을 때 언어가 사용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 바로 언어의 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어둠의 심연>이 전체적으로는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삼고 있으면서도, 그 토대가 식민주의의 옹호에 존재하는 부조리의 간극의 일부를 콘래드의 의도와 상관없이 벌어진 언어의 배반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명의 지점은 비판과 그 비판의 대상이 동일해져버린 부조리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밝히기 위해서이지 콘래드를 변명하기 위함은 아니다. 오직 해명하고자하는 것은 아체베가 제거해버린 소설의 비판의식을 공존시켜내는 것이다. 따라서 부조리를 해명하면서도 동시에 분명히 남겨두어야 하는 것은 부조리는 반드시 필수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이 남겨둠 후에야 우리는 회의주의가 아니라 부조리로부터 해방을 모색할 테니까- 콘래드는 단지 부조리로부터 벗어나는 데 실패했을 뿐이다. 콘래드의 실패는 그의 보수적인 미학적 태도와 관계한다. 재현해야할 진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언어는 그 진실을 투명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느슨한 믿음은 미학적으로 보수적이다. 반대로 언어가 진실을 투명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태도는 미학적으로 진보적이다. 부조리는 오로지 언어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는 태도에서만이 해방될 수 있다. 이 태도와 관계하는 것은 넬리 작스(Nelly Sachs)와 파울 첼란(Paul Celan)이다. 이 둘의 문학은 아우슈비츠 이후 불가능할 것 같은 예술을 오염된 언어-독일어-를 가지고 오염에 균열을 내고 관념의 제한을 넘어서는 확장된 인식을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복원시킨다.
나는 이 글을 우리의 일상 속으로 돌아와 마무리하고자 한다. 콘래드의 부조리가 낯설지 않은 것은 그 부조리를 우리에게서도 또 일상에서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성애자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할 때, 애초에 그것이 “사랑”할 권리가 아니라 “동성애”의 권리라고 따로 이름을 붙일 때에는 우리는 어떠한 차별을 비판하면서도 차별의 언어 위에 서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또 우리가 성차별을 거부하면서도 남편의 식구에게만 도련님 혹은 서방님의 호칭을 사용할 때에도 동일한 부조리는 발견된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오염에 균열을 내는, 관념의 제한을 넘어서는 의심이 필요하다. / 조재연
*참조
– 차누아 아체베, 《아프리카의 이미지: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속의 인종차별》
– 조지프 콘레드, 《어둠의 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