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뢰한>의 해석의 여지는 적을지도 모른다. 배우들은 정확한 연기를 해냈고 특히 전도연은 시퀸스 어느 곳에서도 압도적이다. 메세지는 명료하며 또한 건조하다. 그래서 해석의 여지는 적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혜경(전도연)의 “진심이야?”라는 짧은 되물음이 불행의 연쇄 앞에서 기어이 희망을 찾아내려는 절박함을 쥐었을 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서사구조는 다른 각도에서라면 더 이야기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제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하드보일드가 수행하는 것은 ‘정서’의 민주화다. 가장 비참한 자가 가장 고귀한 자로 대우받게 하는 것이 아닌, 가장 고귀한 자도 가장 비참한 자로 취급하는 민주주의의 언어를 빌려서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정서’를 가장 비참한 ‘정서’와 같은 좌표에 위치시킨다. 다시 말해서, 하드보일드는 정서의 위계를 파괴한다. 따라서 배신과 희생은 같은 값을 지니며, 증오와 사랑 역시 같은 값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하드보일드는 첫째로 그 정서들이 등위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야만 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특정한 상황 혹은 조건 속에서만 ‘정서’의 위계를 파괴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윤리를 욕망으로 탈색시킬 수 있을까.
신선한 인용은 못되겠지만 역시 홉스가 유용할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도덕철학의 절반쯤을 이 글의 방향에 맞추어 편의대로 정리하면 이렇다. 그의 윤리학의 독특한 성질과 그로써 기존의 윤리학과 불화하는 지점은 윤리란 ‘선’의 지위를 탈색하는 데 있다. 기존의 시각에서 ‘최고선’ 혹은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오로지 감정, 정념 그리고 욕구를 억제하면서 이성을 통해서만 도달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부정한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최고선’이라 부르는 목적이 욕망이란 낮은 단계-차라리 근본적이라고 해야 옳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세계의 모든 사물과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보존’에 있다. 그것은 스피노자에게서 출발한 홉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기보존’은 욕망의 충족으로부터 가능하다. 식욕은 신진대사라는 자기보존을 가능하게 하고, 색욕은 종 보존이란 자기보존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물욕은 좁은 의미의 생활이라는 자기보존을 가능하게 한다. 하 유치하고 진부한 설명이다. 물론 이런 유치하고 진부한 욕망만을 운운하지 않아도 된다. 욕망은 힘으로, 힘은 권력으로 번역되거나 연역될 수 있으며 이들 모두 자기보존과 자기실현의 지평에서 머문다. 이것이 멈추거나 억제되는 때는 이성과 종교적 교리가 살아 작용할 때가 아니라 -홉스의 언어를 그대로 빌리자면-“오직 죽음에 이르렀을 때”이다.
그러나 욕망이 모두 한결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욕망은 충돌한다. 한 존재의 욕망이 내적으로 충돌할 때 이야기는 쉽다. 그때의 존재는 스스로의 욕망에 우선순위를 매겨가며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거나, 제거하거나, 축소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두 존재 이상의 욕망이 외적으로 충돌할 때 비로소 ‘갈등’이란 것이 발생한다. 자원은 유한하지만 욕망은 ‘유한’보다는 크다. 그래서 충돌은 외적으로 더 빈번하며 자연스럽다. 자기보존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공유가 불가능할 때, 대상의 한 소유가 타자의 소유를 완전히 배제할 때 갈등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자연이 존재에게 허락한 “치명적 평등(fatal equality)”에 기인한다. 치명적 평등, 그것은 자연상태에서 존재 모두는 어떤 수단일지라도-심지어 타자를 죽음으로 몰아갈지라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의 소유에서 오는 평등을 지칭한다.
그래서 자연상태에서 존재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혹은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homo homini lupus)”란 존재조건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존재조건은 늘 폭력과 공포, 죽음을 상수로가질 수 밖에 없기에 대다수는 자기보존의 욕망을 안정적으로 실행시키고자 서로의 욕망의 합리적인 조정의 길을 찾는다. 그렇게 존재는 윤리를 지어내고 마지막으로는 사회계약이라는 익숙한 결론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보게된다. 이렇게 탄생한 윤리와 공공선 그 어디에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그저 욕망을 좀 더 안정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이러한 자연상태는 홉스가 그의 도덕철학과 계약론을 설명하기 위한 사유실험 정도의 가설상태이지만 경험의 세계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될 수 있다. 이때 그의 주장은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하여 윤리와 계약들이 지어졌다는 것보다 오히려 윤리와 계약들이 기능하지 않는다면 ‘치명적 평등’은 언제든지 경험의 세계에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윤리와 공공선 그리고 계약들이 무용한 세계. 그로써 윤리란 본래는 욕망에 불과하다는 비참한 자리에 위치하고, 욕망은 윤리로부터 탈색된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서로에게 피해자이자 가해자일 수 있는 세계를 진심으로 승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드보일드란 그렇게 전락(轉落)의 거리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치안은 늘 범죄보다 늦고, 범죄보다 늦은 치안은 공공선의 요청보다 화폐의 요청에 응답한다. 범죄가 은밀하게 폭력으로 공포를 생산한다면, 치안은 공연하게 폭력으로 파국을 배출한다. 범죄와 치안은 편을 나눴을 뿐이지 등위하고 화폐는 등위를 매개하는 ‘=(등호)’일 뿐이다. 그렇게 <무뢰한>의 세계는 ‘정서’의 민주화를 수행한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 형사 정재곤(김남길)과 살인범 박준길(박성웅) 그리고 살인범에게 구태스런 여지를 지닌 김혜경(전도연)이 있다. 정재곤은 박준길을 잡기 위해서 김혜경과 기만으로 관계를 맺고, 김혜경은 박준길을 위해서 정재곤과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도구화한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적인 세계였다면 대비해서 보았을 극의 중심이 되는 정재곤과 김혜경의 행위를 모두 탈색시킨채, 오로지 자기보존을 위해서 욕망을 충족시키며 서로를 도구화 하는 몸짓으로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드보일드가 매혹적인 것은 이 전락의 거리에서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드보일드가 둘째로 수행하는 것이자 마침내 완성하는 지점일 것이다. 하드보일드는 자기보존을 위한 욕망을 허락하고 승인하지만 윤리의 훼손은 결국 자기파괴와 마주하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홉스의 결론이 사회계약이 아니냐고 물음한다면 엇나간 것일테다. 누군가에게 빼앗기거나 살해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회계약이 필요로 하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마음껏 빼앗고 살해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자신의 안전과 함께 보장된데도 그 욕망은 더불어 스스로를 파괴한다는 이야기다.
영화 속 두개의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박준길을 위하여 정재곤의 돈을 얻고자하는 김혜경에게, 정재곤은 돈은 줄 수 있지만 도망가서 자신과 함께 살아줄 수는 없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김혜경은 “진심이야?”라고 짧게 되묻는다. 긍정을 뜻하는 그 짧은 되물음에는 기존의 서사 속에 마련되있는 자기보존을 위한 욕망-그리고 타인의 도구화-의 색체가 물들어 있지 않다. 물음에 긍정함이란 박재곤 대신 정재곤이라는 욕망을 실현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치명적 평등 아래 욕망의 실현이란 선로에서 이탈하고 싶은 희망에대한 절박함이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타자를 파괴하면서 욕망을 실현하고 그로 얻어낸 전리품으로 생존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욕망은 스스로를 파괴시켜왔기 때문이다. 존재는 존재 외적인 것으로부터 생존을 유지해나가지만, 그전에 무엇보다 스스로-존재자체-와 함께 살아나가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늑대가 된다면 늑대가 된 ‘나’와 살 수 있는 이는 드물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대사에서 미래를 물음에 욕망에 대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도망쳐서 보통 사람처럼 살거에요. 난 요리도 잘하고…”라고 할뿐.
정재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늑대가 된 존재로부터 끊임 없이 도주하려 노력한다. 특히 극의 마지막 장면은 이를 묵직하게 드러낸다. 장면은 이렇다. 결국 김혜경을 이용해서 박준길을 잡는데 성공한 정재곤은 김혜경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 정재곤을 경멸하는 김혜경의 표정에 그는 울부짖듯, 고백하듯 그리고 사죄하듯 윽박지른다. “잘들어 난 형사고 넌 범죄자의 애인이야. 난 내일을 한거지 널 배신한게 아니야” 그는 욕망이 허락되는 세계에서도 그 스스로의 행위가 욕망의 추동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는 김혜경의 칼을 순순히 응대한다. 아니, 응대보다 환대하듯 그녀의 칼을 포옹한다. 그것은 늑대인 스스로와 살기위한 비정한 정화 작업으로 또렷히 장면은 전한다.
말했듯 치명적 평등은 경험의 세계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일이다. 오히려 그것이 결국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계에서 비도(非道)를 추구한 끝에 성공에 오른자가 어느 순간 ‘윤리’라는 것에 발목을 잡히는 일도 우리는 동시에 종종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인사청문회에 나타난 어느 후보자들은 특히 그것을 실감나게 만든다고 하면 유치한 사례일까. 그러나 그것은 작지도 부정확하기만한 사례도 아니라고 믿는다. 부와 명예를 이미 지닌 후보자는 끝내 자신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제까지의 그의 삶에서 윤리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옵션뿐이었을 것이, 그가 그런 성공을 거둔 순간까지 무용했던 그것이, 어느 순간 강력한 당위가 되어 그를 넘어뜨린다. 쥐를 닮은 그 대통령도 임기를 마치고서는 가장 청렴한 대통령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하지 않았는가. 그 역시 부정한 스스로와 살 수는 없었던 것일까.
이런 순간에 이성주의자는 윤리란 자기보존의 욕망에서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존과 관계짓지 않는 이성에서 나오는 것임이 증명되는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해석은 자기보존을 너무 유물론적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에 일어난 오류이며, 윤리란 심리적 자기보존의 층위에서 바라봤을 때 이또한 욕망의 연장선이란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주장은 이 글의 목표도 아니고 짧은 글에서 전부 다루기도 어려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다. 이 글은 하드보일드라는 장르를 정의하거나 규정해보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뢰한>은 그저 그런 정의를 모범적으로 이행한 사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드보일드란 이렇게 쓰여져야 한다라는 식의 당위를 의도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런 재주를 가지지 못했고, 자격도 몫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글에서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하드보일드라는 장르가 가진 가능성이었다. 그것은 윤리란 부재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으로써 마침내 윤리의 존재를 알린다. 그것은 어쩌면 윤리의 귀류법(歸謬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지금의 세계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두 문법 동일한 양존에서 오지만 앞장서는 것은 후자다. 하드보일드는 그래서 예술 중에 가장 먼저 지금의 세계에 선고를 내릴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무뢰한>은 그런 가능성을 심층에서 적확하게 해내는 영화다. / 조재연
*참조
– 토머스 홉스, 최진원 역, 《리바이어던》
– 서양근대철학회, 《서양근대윤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