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하나야_김인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김인혜 개인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5. 19~6. 1 갤러리TYA) 전시 포스터(디자인: 장민정)

1
모든 얼굴은 익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흰 종이배처럼 발그스름한 물결 위를 떠돌며 나는 그것을 배웠다. 너의 낯설었던 낯은 눈부심으로 띄워졌다가 해석을 향해 흘러가고, 그 무게가 익숙함으로 젖어갈 때쯤 응시에서 모습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니까. 둥근 이마와 굴곡진 코, 눈동자의 깊이는 진부해진 이후 더는 낱낱이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해변으로 떠내려간 가면들이 뜨거운 모래 위에서 녹고 마침내 속살이 부드러운 점자로 솟아났을 때. 눈먼 나, 젖은 손가락으로 기쁨과 슬픔 그리고 노여움과 환희의 주름을 읽게 된다. 그리고 거기엔 더 이상 어떤 진부함도 남지 않는다. 외려 있다, 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의문뿐이다. 어째서 눈은 호수가 아니고 눈인지. 내민 뺨은 밀어내기보다 어떻게 수렁처럼 나를 끌어당기는지. 균형을 잃은 낙하산처럼, 때로는 표류하는 뱃머리처럼 능선과 그것을 어르는 노을 사이에서, 제자리에서 길을 잃는 나. 이제 모든 것이 생경하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겉으로는 차이가 없어 보이는 반복도 고유한 일회성을 갖고 있으며, 반복이 의미를 만든다고 말한다. ‘사실은’, ‘사실을’, ‘사실대로’와 같은 언급으로 ‘사실’이라는 단어가 반복될 때 사실이라는 중립적인 어휘는 덜컹거린다. 이렇게 어떤 단어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일상에 의해 죽어있던 의미는 갑자기 살아난다. 중복은 화자의 진심이 사전적 지식을 아스라이 초과하는 것이 되게 만들고, 남용은 그 배후를 의심하게 주선해 담화가 담아내지 못하는 내적 지식을 직감하게 만든다. 표면을 넘어서는 것과, 내가 발견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회의. 김인혜의 초상이 겸비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얼굴이 중복되고 남용될 때, 얼굴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낯보다 더 진실한 낯을 향하는 한편, 얼굴을 얼굴이 아니게끔 하는 아이러니에 동시에 도착한다. 이런 변주 속에서 당신이 ‘하나의 얼굴을 둘러싼 사실이란 도대체 몇 겹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이례적인 사례.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교직물로 나선다.

김인혜 ⟨곱슬머리 글랜스⟩ 캔버스에 유채 65.×91cm 2023

2
비평가의 것이든 혹은 감상자의 것이든, 작가는 요약을 환영하지 않는다. 작가는 작업이 간추려지는 순간, 그 안에 포함되는 데 성공한 것과 실패한 것의 운명을 생각하는 데 사로잡힌다. 이때 작가를 무너뜨리는 것은 전자의 행운보다 후자의 불운이다. 그러나 이번 요약은 괜찮을 것이다. 인쇄된 시선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게으름을 벗 삼아 세밀한 것들을 축약하려는 눈길이 차마 닿기도 전에 김인혜가 이미 어떤 요약을 성취한 까닭이다. 배경과 이목구비. 이미 갈무리된 채로 드러나는 그림은 어느 누구에게도 화면에서 무언갈 놓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같은’ 것을 만난다. 같은 것이 같이 펼쳐질 때, 그러니까 중복되고 남용될 때, 작가가 애초에 지녀야 했을 운명에 사로잡히는 것은 반대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시선은 여기에 화면에 거두어진 것들에 대해 안심하면서도, 빗겨나간 것들의 행방에 대하여 우울해진다. 이것은 어째서 얼굴인가, 그리고 제외된 것은 어떻게 얼굴이 아닌가.

하나의 얼굴만 마주쳤다면, 작가의 요약에 수긍한 채 입과 글을 다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나치게 간결한 표현과 형식만이 중복되고 중첩됐을 때, 이것도 얼굴이라며 강조하는 간결함은 얼굴이 어디를 향해 초과해 나아가는지 모색하도록 만든다. 그런 운명을 받았다. 여기, 그저 형태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가려내진 낯은 이미 당신이 익숙해진 낯이다. 수십 년을 겪은 어미의 미색을 이제사 살피지 않듯, 거기에 두 개의 눈과 귀, 한 개의 코와 입이 있다면 그저 안도하듯, 어떤 기울기와 높낮이, 넓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읽어야 하는 것, 읽게 되는 것은 낯의 요목조목이 아니라 낯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들이다. 희로애락을 오가는 정동情動은 더는 표정과 같은 일상적인 것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괜찮다는 말과 기분을 감춘 표정에도 누군가 어제의 부재에 얽힌 서운함을 읽어내듯, 당신은 여기에 읽어낼 것이 없어 길어낼 것을 지닌다. 하나 같이 구분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들. 그러나 섬세한 당신은 이런 반복에 유일무이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김인혜 ⟨동그란 시선⟩ 캔버스에 유채 53×45.5cm 2023

가련한 윤곽선 하나로 고정된 낯은, 사실 세밀한 것을 지워버린 까닭에 색과 결에서 배경과 구분되지 않는다. 얼굴이 그 디테일을 포함함으로써 얼굴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반대로 간결함으로 충만한 배경이 얼굴이 아니라곤 도무지 말할 수 없다. 배경조차 연속된 얼굴의 표현이라면, 제외를 통해 길어낸 것이 자리하는 처소는 그러니까 우리가 읽지 않고 가닿는 대상은 얼굴의 밖일지도 모른다. 분위기, 느낌이라 칭해지는 읽을 수 없는 대상은 주변에 산재해 있다. 김인혜는 이를 칭하고자 ‘아우라aura’의 개념을 빌린다. “서로를 바라보며 온전히 집중하는 찰나의 순간, 너의 얼굴 너머의 아우라를 본다. 아우라는 그 두께나 거리, 색채 등이 고정되지 않은 채 스스럼없이 뻗어 나와 공기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발터 벤야민은 종교적 기능을 지닌 작품이 사원 밖으로 옮겨진 이후에도, 한때 그것이 가졌던 흔적이 집요하게 들러붙어 아우라를 뿜어낸다고 보았다. 신은 없어도 신성한 분위기는 남은 상태. 낯을 잃은 후에야 만나는 낯들. 제외된 불행은 그렇게 구원된다.

‘사랑’은 어쩌면 지구에서 가장 닳고 닳은 단어일지 모른다. 누구나 쓰는 말이고, 벗과 연인을 오가며, 구호나 노랫말처럼 진실한 대상 없이도 사랑이란 낱말은 쓰임을 거부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주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신의 유일무이한 마음은 그 흔한 말을 통해 이해될 수 없고, 행여나 사랑이 최선이라면 지금보다 마음이 깊어졌을 때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할 것이란 불안이 때때로 혀를 붙잡았다. 그러나 너는 결국 그 남용에 진다. 그렇다고 패배가 단어의 흔함과 최선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외려 남용이 확신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란 단어의 반복이 일상의 의미를 무너뜨리고, 매번 차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어제의 ‘사랑해’와 오늘의 ‘사랑해’가 다르다는 사실. 똑같이 생긴 음절을 적고 발음하지만 안에서는 매번 다른 울림으로 피어난다는 사실. 그러니까 이미 ‘사랑’이란 단어는 오래전에 해체되어 버렸다는 사실. 김인혜는 초상의 운율로 이런 믿음을 포개어 놓았다. 남용된 얼굴은 얼굴이 담아내지 못하는 마음들을 발음한다. 그로써 얼굴은 오래전에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김인혜 ⟨A Little⟩ 캔버스에 유채 116.8×91cm 2023

남용에서 비롯된 열거는 절망을 재료로 삼을 때도 있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려는 시도다. 김인혜는 남용으로써 얼굴이 얼굴이 아니게 될 것이란 위협을 느끼지만, 동시에 얼굴이 얼굴이 아닌 것으로 비칠 때 이룩하게 될 낯의 여집합에 헌신한다. 물론 터무니없는 오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오독의 빛에 의지해 인간이라는 심해를 향한다. 그러니 낯 안팎으로 일렁이는 결들을 호수라 불러볼 수 있을까. 붓이 지나간 길을, 하나로는 이해 못하는 고저를 오가는 정서의 파랑으로 이해하고, 얇은 윤곽은 무표정으로 범람을 막아보려 하지만 주변엔 이미 넘친 물로 넘실대는 풍경들. 혹은 보습 대일 대지라 부를 순 없을까. 미색을 구분하는 측량이 지나가고, 표피를 가늠하려는 경작이 끝난 후, 보이지 않는 열매를 계절 내 기다렸다 안는 한 해의 시간들. 얼굴을 감싼 손은 꽃을 바치는 잎사귀일 수 있고, 그 사이로 끔뻑이는 눈은 움트는 새순으로서 눈일 수 있다. 이 짧은 신체에는 얼마나 긴 세계가 담겨 있는가.

3
모든 얼굴은 익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림은 아가미 없는 목에 자맥질을 종용하면서도, 질식이 후벼파놓을 구원을 믿고 나선다. 생명을 지탱할 밀과, 그것이 들어갈 식도를 붉게 할 유리를 절반씩 빻아 만든 빵. 떠내려간 가면이 침적된 모래를 서성이던 사람들이 낯선 낯으로 와 먹을 것을 사간다. 얼굴이 위태로울 정도로 가까워졌기에 멀어진 얼굴. 그러나 그 외면 때문에 당신은 우리의 얼굴을 지킨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중복과 남용의 직조로 만들어진 이상, 얼굴은 나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얼굴로 돌아간다. 그러니 작품의 개별적인 호명 이전에, 전시 전체가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반복은 일상적인 의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겠지만, 이곳에서 반복은 더 이상 진부함이나 일상과 연결되지 않는 낯선 세계를 비춘다. 그게 무엇이든 같은 것이 될 때마다 예언은 빛나며 빗나갈 테니까. 여기는 얼굴이 아닌 거리이며 당신은 다만, 여기를 헤엄쳐 지나가는 거라고 낯과 벽 사이를 서성이며 생각하는 것이다.

참조
김인혜, 「서로를 바라보며 온전히 집중하는 얼굴 너머의 아우라」, 『서울문학』 봄호, 대한, 2023, pp.137~144.
정지용, 「호수1」, 『정지용 시집』, 범우사, 2020, p.86.
진은영, 「오필리아」,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p.10.
———, 「방의 엘레지」,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창비, 2012, pp.92~94.
신형철, 「사랑과 하나인 것들」, 같은 책, pp.110~139.
———, “새벽까지 심장 타는 냄새”, 「한겨레21」, 2012. 11. 26.


▲ 김인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도록에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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