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저, 집에만 가져가면 사랑하던 것들은 모두 녹아내렸다. 그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웠는지에 관한 확신은 과거보다 낡은 것으로, 미신보다 수상한 것으로 이다지도 변천을 벗지 못했다. 아름다워요. 산만한 것이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쓰임새는 없는 것이지. 돈보다 더 좋은 것이에요. 꼭 그래야겠니. 집이라는 영토에서 길러졌지만, 고작 밤이 깊어서야 그 영토 안을 쭈뼛거리며 입장할 수 있게 된 이는 영토 밖의 너비와 시간만큼 사투리를 배웠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는 영토를 만든 그를 한 번도 알아보지 못한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를 아비라고 여길 수 없었다. 이방인은 가정에서 색료 냄새 거두지 않는 곳으로 또 저울 없는 도수장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생물적 아비를 부정하고 이념이라는 의붓아비를 섬기게 된 까닭이다. 이 불화로부터 구호 받기 위해서 번역자에게 사정을 해볼 수도 있고, 옛 언어를 더듬으며 교류에 나설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영토 안의 안온을 위한 것이지 사랑하던 그러나 녹아내린 것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방인은 그에게 건넨 녹아내린 것들을 위하여, 건너에 있는 그가 외려 ‘이방인’이 되도록 영토 밖으로 밀어버리려 한다. 녹은 것들은 응고될 것이고, 아비 역시 응고된 것이라면 녹아내릴 것이다. 당신은 거기 말고 여기서 아름다워라. 그렇다면 변천을 벗어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빙되는 것이어라.
아버지에 관한 서사라면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라캉의 지적처럼 아버지를 금기를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아버지의 법칙에 대한 수용을 거부함으로써 성취하게 되는 성장의 서사다. 이때 자식된 이는 아버지의 계보와는 차이를 갖는 자기 운명과 자기 몫의 삶을 표현하고자 그와 분쟁한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와 단절하는 것을 통해 또 그의 영토에서 탈주하는 것으로 서사는 완성된다. 이 경우 자식은 영토 외부에서 가치를 보존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반대로 그 가치가 영토 안에서는 인정될 수 없는 상대적인 것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른 하나의 서사는 아버지를 윤리적 화신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때 외부에 머물어 이방인이 된 자식은 문득 자신의 성장이 아버지의 희생 위에, 그의 욕망을 제물 삼아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헌신에 담긴 누추와 고단을 이해한 자식은 그것을 못 본 체 지나칠 도리는 도무지 갖지 못할 것임을 고백하고 영토 안으로 귀환하며, 아버지와의 화해에 나선다. 아들의 욕망이 아버지에 동일화되는 것이다. 이때 외부의 가치를 굴복시키는 것은 내부의 가치, 즉 윤리다. 이로써 영토 내부에 평화가 찾아온대도 자식은 외부에서 발견했던 의미를 포기하거나 부정해야만 한다.
결국, 영토 외부의 가치를 지켜내는 대신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도록 전락시키고 만다는 점에서 혹은 윤리적 의미를 획득하는 대신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서사는 한계를 지닌다. 오직 안부의 ⟪잘-못-하다⟫(킵인터치, 2020.08.20.-09.02.)는 전락과 포기, 어느 쪽도 만족스럽지 않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선다. 그것은 영토 외부의 가치, 그러니까 미적 가치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또 그것이 윤리적 죄의식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을 공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는 미적 유기체로서의 아버지라는 새로운 서사의 기입으로써 이행된다. 이때 아버지는 이방인을 맞이하는 영토의 주인이 아니라, 미적 영토에 처음으로 진입’돼버린’ 또 한 명의 ‘이방인’으로서 다뤄진다. 여기선 양심을 가책하는 윤리가 그늘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제, 영토 안에서 그의 삶과 관계를 표현했던 영토의 언어는 더 이상 사용될 수 없는 채로, 그의 누추와 고단에 놓였던 눈길은 거둬진 채로 자식은 물을 뿐이다. 아버지는 그럼에도 아름다운가. ‘그럼에도’라는 조건 이후에도 아름다움을 증명할 수 있다면, 분리된 것처럼 보였던 미적 영토가 사실 황폐한 영토에 교착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질 것이다. 그것은 한 번도 미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던 공간에 스미어 그곳을 미적 공간으로 바꾸어버리는 일이다. 이는 미美가 가진 역량에 대한 증빙이다. 그리고 그것은 부자라는 관계도 죄의식도 없이 그를 순수히 바라보는 첫 번째 시선을 만들어낸다.
2
영상 작업인 ⟨그;대화⟩는 아버지가 미적 영토로 어떻게 진입돼버리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업에서 안부는 아버지의 신상에 대한 몇 가지 서술을 아버지에게 제시하며 그것의 진위와 추가적인 교정을 표기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표기에 앞서 안부는 어쩐지 그에게 “허세” 없이 대화에 임할 것을 요구하며 허세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허세’라는 동일한 철자로 구성된 신조어나 은어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에, 이 물음은 안부보다 더 오랜 삶을 살아온 아버지에게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물음이 필연적이었다면, 그것이 아버지를 그가 머물던 영토 내부의 언어에서 탈각시키는, 또 이를 통해 영토 외부로 진입하게 만드는 과정을 함축하고 있는 까닭이다. ‘허세’라는 철자는 영토 밖에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유가 없다면 모를까, 이유가 있다면 화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안부는 “이유 막론하고 화내지 않”아야 한다며, 이 대화에서 어떤 이유도 ‘화’로는 갈 수 없음을 말한다. 화를 잃어버린 아버지는 그에게 함축된 ‘금기’ 역시 함께 분실한다.—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안부는 답답함을 드러내고 언성을 높이는 것을 참지 않기에, 그가 미적 영토의 주민임을, 반대로 아버지는 이방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아버지에 대한 어떤 ‘거짓’ 인식에서도 분개할 수 없다는 명령은 그를 둘러싼 윤리적 맥락마저 벗겨낸다. 여기서 ‘허세 없음’의 명령은 금기가 부재한, 그리고 거짓 인식으로 표현되는 허위—가상—가 실재와 동위치된 미적 세계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표지다.
타인의 얼굴이나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그 형상을 평가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나지만, 아버지의 외모를 보며 그것이 아름다운지 평가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외모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은 거둬져야 할 일이라지만, 그 널린 기회가 한 번도 아버지에게 당도하지 않은 까닭은 그가 미적으로 사고 될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관점의 차이⟩는 아버지에게 박탈되었던 그 기회를 처음으로 부여한다. 금기를 함축하는 아버지였다면 그의 잠은 금기로부터 비켜난 탈주의 시간을 의미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의 잠 이후에야 현관을 조심스럽게 열듯이. 그러나 작업의 시선은 그 시간을 확인하고 성취하려는 비스듬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시선은 아버지의 잠 뒤에 어떤 행동도 염두에 놓지 않고, 그를 바라보려는 행위 자체만이 목적인 것처럼 그를 정면에서 어떤 껌뻑임도 없이 바라본다. 반면 그가 윤리적 화신으로 등장했다면 시선은 그의 몸에 베인 낯익은 체취를, 주름과 얼룩을 찾아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식의 성장을 위해 고된 노동 후에야 잠에 들었을 테니까. 그러나 여기엔 어떤 고단과 누추도 담기지 않았다. 어떤 구체적임도 생략된 뭉뚝한 작업에, 예리한 선은 오로지 어깨서부터 허리를 거쳐오는 둔부의 구간에서만 사용되었다. 무방비 상태로 오직 어떤 신체에서만 예리한 선을 드러내는 인물, 어떤 근거도 상황도 없이 그저 유연함을 보여주는 인물은 모두 감히 관능에 도달하지 않아왔을까. 아름답다는 말은 이제 여기서마저 쓰임새를 갖게 된다.
도무지 이익일 수 없는 양육의 행위를 고집하고, 이익을 예상할 수 없는 자식의 미적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떤 이익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매정하고 물질적인 자본의 경제논리를 추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윤리적 성격으로 수용하는 것은 안부의 목적이 아닐 것이다. 자본의 경제논리와 불화하면서 이익과는 무관한 비합리적 선택을 ‘기꺼이’ 지속하는 것, 그것은 미적 행위의 나상裸像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작물을 기르듯 교환되고 사용될 상품을 생산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생산은 그저 창조를 제외하면 이후의 통제는 어찌할 수 없어지는, 생산물은 그저 생산물에게만 되먹임되는 미적 창조에 가깝다. 따라서 ⟨Shadows/Highlights⟩에 등장한 인물은 적어도 전시의 문맥 속에서 마땅히 아버지의 형상이라 추측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망설여진다. 아비의 작업복은 화가의 작업복을 오가고, 인물은 노동자인 아비와 예술가인 자식 사이를 진동한다. 그가 설령 노동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누추하지 않을 것이며, 미적 창조를 위한 심미적 노동일 테다. 또 아비의 작업장은 자식의 작업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채의 기름과 기계의 기름이 분별되지 않듯이 또 푸른색 점프수트가 오직 작업복이라는 이름만을 지니듯이. 아버지의 손은 자본의 명령에는 수긍하지 않는 정신과 자유를 담은 자신만의 태그와 같은 표식을 생산품 어딘가에 기입했을지도 모른다. 시대에 무엇도 상실하지 않은 순수한 ‘그’를 여기서 만날 수 있다.
누구나 알고 있을 한 노래의 화자는, 지구가 둥근 까닭에 우리가 자꾸 걸어가기만 한다면 온 세상 어린이를 모두 만날 수 있다고 안도한다. 이 만남을 ‘이해’로 고쳐 읽을 수 있다면, 노래는 온 지구를 돌아도 모두가 공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형의 지구는 나눠진 영토가 배타적으로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교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따라서 가까이선 분리돼 보이는 영토는 멀리서 본다면 연접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영토임을 알려준다.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교착되고 연접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이는 아버지가 미적 영토에 이방인으로서 진입될 수 있는 정황과, 한 번도 미적 가치로 규정될 수 없었던 내부에 미적 가치가 스밀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준다. ⟨Profile⟩은 그래서 ‘원’의 형태로, 분리되어있지만 교착된 영토를 조감鳥瞰해 보인다. 작업은 그것이 세계 전체의 조감이라는 것을 확약하듯, 여기에 모든 색이 존재하고 활약한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여기에 모든 색이 존재하고 조금도 쉬지 않고 꿈틀거린다. 그리고 모든 색은 어디든 존재할 수 있다. 자꾸 걸어가기만 한다면 미적 가치는 어떤 영토에도 국한됨 없이 활주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디에 있는 누구도 순수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주선할 것이다. ⟨CAKEY⟩에서 아버지와 자식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케이크를 만든다. 그러나 ⟨Profile⟩ 이후라면 서로의 영토가 차이를 지니더라도 그 끝은 연접되어 서로에게로 연결될 것임을 안다. 이제 자식의 미적 창조는 아비의 가사 노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아비는 거기 말고 여기서 아름다우려 한다.
3
정체가 모호한 공간. 사회는 간간이 그것의 미적임이, 지배하는 편이든 저항하려는 편이든 어느 편으로부터 규정되지만, 단 한 번도 미적으로 규정되기 힘든 공간. 아름답다는 말이 윤리 아래서만 성취되거나, 그 외부에서만 찾아질 수 있는 공간. 아버지의 영토는 혹은 더 나아가 가족의 영토는 그렇게 다가온다. 감상적인 이들이 고귀함을 지닌 것보다 가장 비천한 이마저도 고귀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비로소 평등의 이념이 증명되듯이, 가치의 증명은 가치가 가능한 것 사이에서가 아니라 불가능한 것 사이에서 발생할 때 비로소 절대적이게 된다. 그렇다면 한 번도 미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던 공간에 스미어 그 영토를 미적 공간으로 바꾸어 버리는 일은, 미적 가치를 증명해내는 일에 있어서 무엇보다 절대적일 수 있다. 그 증명이 사회를 배경으로, 공공을 배경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잘-못-하다⟫는 기껏해야 상대적이거나 드물게만 찾아지는 예술의 가치가, 그것이 더더욱 불가능한 영토 내부에서 혹은 영토의 주인으로부터 발견되도록 주선한다는 점에서 절대적이고 급진적이다. 변혁에 대한 사유가 깊어져 서정이 되는 순간은, 그리하여 뭉뚝하기만 했던 삶이 외려 가장 순진한 표정을 지닌 예술에게서야 베이는 순간은 이렇게 일어나고 만다.
안부가 “허세”라는 철자의 의미를 주거하던 영토에서 탈각시키는 것으로써 ‘아버지’를 미적 영토에 밀어버리며 작업을 시작했듯이, 전시는 작업노트를 통해 “잘-못-하다”라는 철자의 의미를 우리가 주거하던 영토에서 탈각시키는 것으로써 시작되었다. 어떤 것에 “잘”함과 “못”함은 그것이 가닿아야 할 목적지가 있는 것을 전제한다. 그 목적지에 가까운 정도에 따라 “잘”과 “못”은 결정되고—안부가 말하듯 그 목적지의 중간 위치에 “잘 못”함이 존재한다—, 다른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잘못”이 된다. “하다”는 어근에 의존해있는 고작 희미한 어미일 뿐이다. 이는 주거하던 영토의 문법일 것이다. 그러나 외려 미적 영토에서는 “잘”과 “못”의 의미가 희미한 것에 불과해지고, “하다”는 어근의 자리로 이동한다. 이는 “잘”과 “못”을 분간해 줄 목적지가 평면의 미적 영토에는 없는 까닭이다. 목적지가 존재하지 않기에 “순진무구하다해도, 호락호락 하지 않다 해도, 결과는 정해져있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다”라는 말은 끝까지 자리를 버텨내어 여전히 무언가를 ‘하려’한다. “하다”는 여기에 힘을 지니고 있다. “잘하지 못할 수 있다. 못하지 않을 수 있다. 그저 지속하기를 바란다.” 바로 여기에 “잘못하다”의 의미가 있다. 그러니 ⟪잘-못-하다⟫는 아버지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누추를 고백하거나, 미안함을 토로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직 이로써만 녹아내렸던 것들은 어디서든,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다시 응고될 것이다. / 조재연
*참조
안부, ⟪잘-못-하다⟫ 작가노트, 2020.
진은영, 「가족」, 『일곱 개의 단어로된 사전』, 2003.
황국명, 「아버지 이야기의 역설」, 『문학동네』 16호, 1998
이 글은 『관사적관계/잘-못-하다』(안부, 전시 도록, 2020)
게재를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안부 passmethaton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