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 어쨌다구_정희영: 링,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사각을 뜻하는

정희영, <링,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사각을 뜻하는>, 2019, 인사미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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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동안 윤리는 현자의 돌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냈으니 그것은 바로 폭력이다. 윤리는 이제 어느 사태에서든 어떤 대상에서든 또 어떤 시간에서건 폭력을 증류해낼 수만 있다면 그것을 ‘악’이라 부를 수 있다고 자신 있고 대담하게 소리친다. 범죄, 테러 행위, 사회 폭동, 전쟁 그리고 그로부터 비명을 지르고 눈물짓고, 피를 흘리는 인간의 군상들…을 두고 어떻게 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냐고 그는 윽박지른다. 그러니 우리는 윤리를 논할 때 단 한 마디를 준비하면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그럼 상대도, 우리도 입을 앙다물 준비를 할 것이다. 이로써 폭력이 윤리 전반에 연역되는 것은 쉽고 진부한 일이 되었다.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것, 대화와 토론을 거치지 않는 것, 강제로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하는 것, 위력으로서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혼란 속에서 종용하는 것까지. 우리는 모조리 폭력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윤리가 현자의 돌을 발견했을 때, 동시에 세계에서 소실된 것은 대문자로 쓴 ‘정치’의 근원적인 원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난주 토요일(19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 퀴어들을 비롯한 이들이 행진을, 여전히 행진을 하는 상황에서도 ‘폭력’은 너무도 쉽게 낯빛을 내밀었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위치에서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반대가 있다면 마땅히 토론을 거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퀴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회에서 합의 없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은 폭력적인 일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기습적으로 연단을 향한 이에게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와 “나중에”라는 연호가 응답되었고, 육식은 폭력이라는 구호는 오히려 채식이 폭력이라고 응답된다. 대관절 윤리는 그 낯빛을 전혀 바꾸지 않고도 차별금지와 페미니즘을 그리고 채식까지도 폭력으로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이러한 운동을 폭력이 아닌 것으로 소명하고, 그들이야말로 폭력이라는 것을 규명하고 지탄하는 데 소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운동들을 저지하는 그들의 말짓과 몸짓들은 폭력이 맞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들도 역시 폭력이다. 그런데, 폭력이 어쨌다구.

우리는 결국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권의 근거를 토론을 통해서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인권은 그것을 옳다고 비준해 줄 어떠한 메타 논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1789년에 프랑스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읽혔을 때, 그것이 ‘선언’—주장(의견)과 구분되는—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밖에 없는 까닭과 같다. 인간과 인간과 인간…은 차이를 들먹이길 좋아하는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무한한 차이, 특수성, 개별성 등을 가진다. 아니 그것은 철학이 아니어도 좋다. 과학과 생물학은 인간을 그 무한한 차이로 안내한다. 그래서 우리는 터치 아이디와 페이스 아이디 따위를 믿고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토론을 거칠수록, 근거를 과학적이며 이성적으로 획득하려는 움직임은 인권을 오히려 앙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시무시한 인권선언이 야기하는 평등은 그런 차이를 깡그리 ‘폭력적으로’ 제거해버리고 말았다. 차이란 외면해버릴 일이다. 그리고 감히 폭력적으로 지구의 한 국가, 한 도시, 하나의 부류인 사람들이 인간을 대표할 수 있다는 듯이 “인간은…”하고 뱉는다. 평등은 아무 근거 없이 진리로서 선언되었다. 그때의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그래야만 하고 또 옳을 수밖에 없다는 근거 없음의 근거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소실한 정치의 근원적인 원리란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던 것들의 순수한 모습이 폭력이었다는 것이다. 악을 증류할 때 폭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폭력은 오히려 정치를 증류했을 때 그것의 순수한 원리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근거가 없는・근거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마다 그것은 전체주의라는, 민주주의의 윤리에 어긋난다고 하는 그러니 폭력이라는 선량한 협박과 윽박에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지만. 진리는 폭력을 통하여 전체에게 선언되고, 전체에게 강제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사실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었다는 것. 차라리 비합리성의 합리성일 것으로 구성된 세계를 인정한 후에야 우리는 구조들이 합리적으로 가하는 이치에 대해서도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 여지는 우리에게 다시 소실된 ‘정치’를 소생시킬 기회를 만들 것이다. 역사를 만들었던 사건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진리의 정치를. 정희영이 기획한 전시 『링,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사각을 뜻하는』은 그 여지를 생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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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제목과 관련된 김소연 시인의 “링, 동그라미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복서에게는 사각을 뜻한다”는 이렇게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원만하게 보이는 그러니까 합리적인 이치 위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합리성이란 이름뿐이고 링은 사실 각진 그러니까 폭력적인 사각의 모양을 지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위의 복서, 폭력을 원리로 한 투사들이다. 비로소 제목은 비합리성의 합리성을 가리킨다. 그러니 폭력을 제재로 한 전시가 그려낸 모습이 지옥도가 아닐지라도, 지난 대통령을 규탄하는 비폭력적인 집회일지라도 폭력은 이미 도착해 있다. 전시의 작업들은 스스로들이 모두 동등한 것이라는 것처럼,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것인 양 고유명을 감추었다. 그것들은 일련의 나열이다. 그리고 나열은 동등한 것을 열거할 때 사용되는 방식이다.

즉 전시는 “폭력이란 「너를 보려 두 눈을 도려낸다」이며 「파도」이며 「우는 남자」…다”라고 말하는 대신 “폭력 그리고 「너를 보려 두 눈을 도려낸다」 그리고 「파도」 그리고 「우는 남자」 그리고 … 그리고 …”를 전하고 있다. 깨진 유리 조각・우는 인간(일반적인 물리적 폭력의 이미지)에서 시작해 세월호의 파도(정당화된 국가적 폭력), 촛불집회의 현장・멸공하는 인간(대항 폭력), 콘서트장・달려가는 사람들(감각에 배당되지 않은 구조적 폭력)까지 그것은 모두 동등히 폭력이다. 폭력을 증류해낼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악’으로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을 증빙하고자 전시는 현전해 있다. 그 증빙으로 알려질 것이다. “그것은 폭력입니다”라는 응답에도 뒷걸음질 치지 않고 오히려 그것만을 통해 사건을 지속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응답을 하고 있는 이들이 만든, 감각에는 배당되지 않았던, 구조적 폭력을 볼 수 있는 눈—감각—이 있다는 것을.

이우성, 「땀 흘리며 달려간다」, 2019, 천에 수성페인트, 아크릴릭 과슈, 165X300cm

이우성의 「땀 흘리며 달려간다」의 존재들은 모두 다 다른 옷, 다른 얼굴, 다른 표정, 다른 피부색을 하고 있다. 그들은 제각기 모두 다르다. 이곳에는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가 섞여 있을 수도 있고, 4대강을 사랑하는 퀴어가, 지구는 오래전부터 우주연합에 가입했기 때문에 정식 비자를 발급받고 입국한 외계시민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들, 그 끝도 알 수 없는 무한 같은 차이화된 다수는 그러나 어쩐지 모두 같기로 한 것 같다. 폭력이라 하면 일종의 전체주의의 형식처럼 같은 옷, 같은 표정, 같은 얼굴을 묘사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폭력은 이미 감각할 수 있는, 감각에 배당된 것이기에 차라리 구조적인 폭력을 묘사해야 하겠다. 그러나 작업은 이러한 진부한 압박마저도 벗어난다. 작업은 폭력의 발생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발생에 가담한 가해자들을 일제히 그렸다.

이우성, 「땀 흘리며 달려간다」, 2019, 천에 수성페인트, 아크릴릭 과슈, 165X300cm

그들이 같은 이유는 달리기 때문이다. 작업에서 존재들의 차이는 무한히 발견될 수 있지만, 또 수없이 차이를 만들 기회와 권리를 부여받았지만, 무한히 다른 존재들이 어째서 같은 방향을 달리는 행위로 같아진다. 그들은 존재적으로 같은 것이 아니라 발생적으로 같아지려 한다. 장면에 있거나, 장면에 선행했을 선두가 있을 것이다. 그 선두가 뛰고 뒤따르는 이가 뛰었을 때,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었을 때 존재는 존재의 결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달려야만 존재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된다. 반드시 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늘 서열과 성적, 위계에 연루된 폭력이 그로부터 발생한다. 누군가 뛰고 있다, 뛰고 있기에 뛰어야 한다, 그리고 뛰게 된 존재는 단순히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가 못 된다. 그는 다르게 살지 않는 한 폭력에 가담한 가해자다. 그렇게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가 있다. 전시는 구조적 폭력이 있다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은 이렇게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것은 폭력이 아니란 말인가. 뛰는 사람들, 「땀 흘리며 달려간다」를 뒤에서 바라보면 존재들의 다름은 소거되어있다. 옷, 얼굴, 표정, 색의 모든 차이가 소거된 채 뛰는 동작만이 남아있다. 여기엔 ‘뜀’이라는 폭력만이 잔류되었거나 증류되어있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그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는 작업의 뒷면을 전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무영, 「유투브 스타의 관점에서」, 2019, 단채널 영상, 30분
이우성, 「캔들 라이트」, 2016-2017, 드로잉 애니메이션, 단채널 비디오, 4분 26초

다음으로 이우성의 「캔들 라이트」는 그것 하나로는 과거 정부의 폭력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비폭력’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작업은 하필 김무영의 「유투브 스타의 관점에서」와 같은 전시에 속해 나열되어 있다. 그러니 그것은 숭고하게는 대항폭력이거나 고작 폭력일 수 있다. 「유투브 스타의 관점에서」에서 출연한 유투브 스타는 흔히 세상이 돌아가는 일들에 밝지 않아 잘못된 편을 든다거나 은밀한 자금을 받았다거나 악랄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가 야기할 자유의 폐사斃死를 염려하며, 북한의 사주를 받은 이로부터의 적화통일을 저지하기 위해서 꿋꿋이 저항하는 투사에 가깝게 표현된다. 그렇다면 그가 그런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갖고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놀랍게도 그가 소유한 것 역시 근거 없음의 근거다. 인권을 비준할 메타 논리가 없는 것처럼, 과거 정부의 유무죄를 판단하기 위해서 법적 근거가 법정에서 확인되기 전에 우리가 이미 확신했던 것처럼 합의와 과학을 문제 삼지 않고 그는 「캔들 라이트」의 목소리처럼 실천한다. 「캔들 라이트」는 현장의 목소리만을 남겨놨는데, 그것은 현장의 목소리를 옮겨왔다고는 하나 “박근혜 퇴진”이란 구호가 명료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맥락에 따라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둘을 구분할 수 없다. 이 둘은 결정結晶의 모양을 바라본다는 조건에서 같다.

김지영, 「파도」, 2015, 종이에 목탄, 150x247cm

김지영의 「파도」에도 폭력은 나타나 있다. 그것은 존재에게 폭력의 진입로를 마주하게 한다. 김지영이 “폭력이 야기한 막연한 공포를 미술로 시각화”한다고 했을 때 이 ‘폭력’이란 국가의 폭력 앞에서 두려워하는 폭력이 아니다. 오히려 폭력의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가담자로서 같은 ‘가해하는 폭력’으로 들어갈 때 느끼는 공포이다. 제대로 된 조사조차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떠한 과학의 개입조차 불가능한 상황에서 국가는 세월호가 불의로 야기된 사건임을 입증할 근거를 가지고 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존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사가 충분히 실시된다고 하더라도, 물리적인 근거가 충분히 설명되어 이 파도 위에 기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것도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존재는 답이 불가능할 때까지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원인을 추궁해야 한다. 이때의 답은 오직 ‘국가란 무엇인가’나 ‘이게 나라냐’라는 그 어떤 확실한 답도 댈 수 없는 물음을 만드는 것으로써만 가능하다. 문제가 대화나 합의를 통해서 답을 낼 수 없는 것일 때, 합리성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것일 때, 존재는 국가에 가해하는 폭력이 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작업은 무엇도 기입이 불가능하도록 검다. 혹은 이미 모든 게 기입되어 수없이 덮어쓴 상태로서 검다 할 수 있다. 무엇도 기입할 수 없거나, 기입이 끝나도 읽어낼 수 없는 검은 생성은 어떤 언어도 이 앞에서 무용함을 뜻한다. 그러니 계속 물음을 생성해야 한다. 정지할 수 없는 생성, 정지할 수 없는 파도로서 텅 비어있지만, 무엇도 기입할 수 없고 무엇도 읽어낼 수 없는 것 앞에서 이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폭력밖에는 남지 않은 절박함, 그 앞에서의 공포가 「파도」에는 표현되어 있다.

이의록, 「화이트아웃」, 2016, 슬라이드 프로젝션, 가변크기

윤리에서 차이를 말하는 이라면 그들은 하나같이 동일성의 폭력을 지적한다. 차이지어진 것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범주로, 결국에는 사물과 같이 상품화하는 것이 차이의 윤리의 제일가는 적이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투명한 감각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의미를 줄 수는 없다. 그들이 말하듯 어차피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면 차이는 주어진 것일 테고, 어떤 의미도 발생할 수 없다. 이해가 해석학적으로 공통의 지평에서 만나는 것일 때 차이는 어떤 공통의 지평도 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해가, 의미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면 필요한 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세상을 왜곡하고 차이를 질식시킨다고 해도 의도(의지)를 가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왜곡된 시각이다. 그래서 이의록의 「화이트아웃」은 촬영 이후에 사진을 긁어냄으로써 훼손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와 같은 방식이야말로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라는 주장에 편을 들고 그것을 위해 렌즈를 촬영 이전에 훼손하고 세상을 관찰한 것에 가깝다.

김지영, 「너를 보려 두 눈을 도려낸다」, 2019, 알루미늄, 유리, 합판, 사운드, 가변설치
이의록, 「라그랑주 포인트」, 2019, 단채널 영상, 35분
이의록, 「라그랑주 포인트」, 2019, 단채널 영상, 35분

그때서야 우리는 어디에 주목해야 할지를 어느 것을 편들어야 할지를 알게 된다. 구조는 이미 주체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다. 그것을 제어하기 위해 우리는 반대편으로 폭력을 가해야만 한다. 그것은 김지영이 보기 위해 보는 것을 도려낸 것과 같다.(「너를 보려 두 눈을 도려낸다」) 투명한 유리가 아니라 유리를 모조리 깨고 나서야 우리는 그것을 둘러싼 프레임 즉, 폭력 지었던 구조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폭력에 폭력을 가해야만 폭력이 상쇄되어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화된 「랑그라주 포인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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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폭력이다.”라고 정희영은 리플렛에서 두 번째 문단을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폭력은 진부한 것이 되었다. 현실에서뿐 아니라 작업에서마저도 폭력은 차고 넘친다. 어느 곳에서는 폭력을 애국과 같은 것으로 치장해 기념하고 다른 곳에서는 폭력의 피해자와 희생자, 그에 얽힌 사건을 현재적으로 복원해 스스로를 진보적인 것인 양 자찬한다. 체제에 기생하든지, 체제의 피해자로 그 악랄함을 폭로하고 두려워하든지. 선택지는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할까. 참신한 기획이라면 전시는 새로운 용어나 개념을 만들어 하나의 선택지를 더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정희영은 그러지 못했다. 대신에 그가 하는 것은 선택지를 내파시키거나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기획으로부터 우리는 선택을 잃는다, 선택은 이제 불가능한 것이 된다. 우리는 이미 가담자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지난한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헌신적인 일이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일에는 호기심이 가지만, “다시” 시작(지속)하는 것엔 희망이 발생한다. “죽음에 이르도록 증오할지라도“ 그는 폭력과 이별을 짓지 않는다. 폭력을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일이 있고, 스스로를 폭력의 피해자로만 기억하지 않기 위해서 폭력이 필요하다. “다시 폭력이다.”

우리는 이미 가담자다. 그러나 이는 우리를 겸손하게 토론과 소통으로, 비폭력으로 돌아가자는 성찰을 야기하려는 속셈은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차이를 귀중히 여기고, 보존하고 그것을 하나로 셈하는 동일성을 유예한 ‘체’로 깨끗하게 있는 그대로 세상을 감각하고 소통을 이뤄내자.’ 그것은 그저 둘러싼 폭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역겨운 말이다. 전시가 상기시키는 것은 오히려 우리는 이미 가담해 있을 정도로, 폭력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나아가 그런 폭력이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가치들을, 사건을 만들어낸 정치를 실천할 정도로 우리에겐 ‘힘’이 있다는 오래된 미래이다. 실패한 적도 있지만 폭력으로 이룩한 가치들이 존재하는 한 폭력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정희영은 리플렛의 마지막 문장에서 진은영 시인의 시구를 인용하며 “‘친구, 정말 끝까지 가보자. 우리가 비록 서로를 의심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도록 증오할지라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여정이 있는 자들이므로, 적어도 첫 문장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지만 오히려 첫 문장이 지켜지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도록 증오”해야만 한다. 겸허하게 말해서 이 글은 어느 미치광이가 쓴 글이다. 그러니 이렇게 끝내자. 세상이 불타는 것을 보고 싶다. / 조재연

*참조
-김현, 「폭력의 정치경제학」, 『민주주의와 인권』,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9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폭력비판을 위하여』, 도서출판 길, 2008
-서동진, 「모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왜 부정은 그토록 어려운가」, 『말과활-7호』, 2015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폭력과 시민다움』, 난장, 2012


전시 『링,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사각을 뜻하는』
라운드테이블(10.26.)을 위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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