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물, 현전, 투쟁하이데거는 ‘눈앞에 있음 Zuhandensein’으로써 현전하는 존재와, ‘손안에 있음 Vorhandensein’으로써 도구화된 존재를 구별했다. 사물이 도구적 용도로 파악되는 한 존재는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다. 가령 대리석을 재료 삼은 조각은 대리석 계단이 감춰놓은 것을 드러낸다. 일상에서 대리석 계단은 통속적인 부유함의 이미지로 보인다. 그러나 대리석 조각은 작품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던 물질의 현전을 보여준다.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하이데거는 그렇게 고흐의 구두가… 자세히 보기: 사물, 현전, 투쟁
- 눈앞에 없는 사람이별에 성실한 이가 마지막으로 내리는 결단은 사진을 지우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약속했던 망각을 부여받지만 동시에 어떤 저주도 함께 앓게 된다. 그는 이제 빈 사진첩으로도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 사진에 기대지 않고도 영원히 동반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일상의 암기가 간수할 만한 것을 선택해 만드는 기억의 연금술에서 비롯된다면, 망각은 사라진 것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남아버린 야금술을 말미암는다. 노순택의… 자세히 보기: 눈앞에 없는 사람
- 오라, 시간도 공간도 남김없이“시간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은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있는 것이다.” 수전 손택이 소설을 두고 한 이 말은 미술 앞에서 모두 미끄러진다. 텍스트는 늘 왼쪽 상단에서 시작하지만, 그림은 언제나 모든 면이 동시에 발생해 한꺼번에 밀려온다. 지명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손쉽게 장소를 이동할 재주 역시 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림이 머물도록 허락한… 자세히 보기: 오라, 시간도 공간도 남김없이
- 눈을 감아 보이는 밤불을 끄고 눈을 감아도, 조명이 눈꺼풀을 깨문 자국 사이로 기어이 빛이 들어오고 만다. 분명 없는 것인데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때, 나는 속수무책으로 어둠을 빼앗긴다. 양평 구하우스 상설전에서 다리우시 호세이니(Dariush Hosseini)의 ⟨Wide Shut 2⟩(2018)를 지나며 눈이 묶인 밤을 떠올렸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Eye’s Wide Shut⟩(1999)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호세이니는 눈으로 관찰한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서야… 자세히 보기: 눈을 감아 보이는 밤
- 예술을 믿게 하는 예술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조심스럽다. 그것이 터무니없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었다가 조급하게 예술을 원망하게 될까 봐 그렇다. 그러나 예술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바꾼다는 이야기라면 믿어보기로 했다. 아니 전력으로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도미야마 다에코(富山妙子)의 자취가 그 말을 증명한다. 도미야마는 분명 수많은 삶을 바꿔냈다. 그는 전환 시대의 투사였다. 1921년 일본 고베에서 출생한 도미야마는 세계의 폭력과 불의에 맞서며 격동의 역사를… 자세히 보기: 예술을 믿게 하는 예술
- 대오의 끝에서내 비겁과 작음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 나는 자격 미달의 운동권이었다. 비극이 아닌 조그만 일에 분개하는 나는 늘 비켜서 있었다. 광장을 향하기로 마음을 먹는 일은 더뎠고 현장에서는 충돌이 두려워 앞장서지 못했다. 정당에 적을 둔지 오래였지만 누군가 나의 허물을 모르고 덜컥 동지라 부르게 될까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투사처럼 나서는 이를 볼 때면 열등감에 괴로웠다. 나는 무얼 바라… 자세히 보기: 대오의 끝에서
- 사전에 없는 마음인간의 감정이 결국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서글프다. 시곗바늘 대신 심장 소리가 좁은 방을 채웠던 숱한 새벽이 고작 물질 기관의 일이라면, 우리에겐 예술보다 신경 전달 물질을 조절할 향정신성 의약품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김학량의 개인전 <짱돌, 살구 씨, 호미>(5. 5~6. 5 전주 서학동사진관)를 나오며 서두에 했던 말을 취소하기로 했다. 전시는 제목처럼 소담치 못한 사물의 초상을 화폭으로 옮겼다…. 자세히 보기: 사전에 없는 마음
- 사람이었네화가 정지현, 그는 개인전 <ONE WAY>(4. 14~5. 16 상업화랑)에 깊은 밤 풍경을 목탄으로 담았다. 사람보다 사물이 재잘거리는 시간. 인간 형상(人形)이 제 머물 곳으로 귀향한 자리에 빈 처소만이 남았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한 걸음을 더 옮기는 순간 불행히도 어느 노인과 마주치고 만다. <두 개의 빛>(2021). 밤을 모르는 듯 그는 수레에 폐품을 싣고 귀향과는 먼 곳으로… 자세히 보기: 사람이었네
- On The Ground<디딜 곳 없는 사다리>(4. 6~5. 1 드로잉룸)를 보며 트리나 폴러스가 쓴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2009)을 떠올렸다. 여기에는 기둥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수많은 애벌레가 등장한다. 주인공 ‘줄무늬 애벌레’(이하 줄무늬)가 여정의 이유를 묻자 누군가 답했다. “그건 아무도 몰라. 하지만 틀림없이 굉장히 기막힌 것이 있을 거야.” 이에 수긍한 줄무늬는 다른 애벌레처럼 남을 짓밟고 밀치면서 기둥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정상에… 자세히 보기: On The Ground
- 이력서.hwp“유년 시절, 어머니께서는 청력이 좋지 못하셨습니다.” 내 이력서는 대부분 여기서 시작했다. 당신은 내가 듣는 많은 소리를 듣지 못했고, 내가 건네는 말들은 늘 희미해진 후에야 가닿았다. 같은 것을 듣지 못할 때면 나는 내가 듣는 것을 스스로 의심해야 했고,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면 반드시 전해진다는 말은 믿음 잃은 동화처럼 들렸다. 학년이 바뀌면 나는 친하게 지내던 이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자세히 보기: 이력서.hwp
- 다독임을 안고가난한 재능에 부끄럼 짓고 듬뿍 불안하고, 또 내내 제 글이 불편하던 날들 안에서 이제는 자그마치 저를 기쁘게 믿을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 같아 기쁘고 감사합니다. 칭찬보다는 늘 절실했던 다독임인 양 못내 뭉클했습니다. 이 다독임을 푸근히 꼬옥 안고 살고자 합니다. 자 앞으로도 공백 앞에서 설레기를, 잘 버티겠습니다. 다른 곳에 먼저 적었던 소감입니다. 못내 수줍어 길게… 자세히 보기: 다독임을 안고
- 메모 02“조금 아는것은 위험한 것이다. 깊이 마시지 않을 거라면 피에리아의 샘물을 맛보지 말라.” 알렉산더 포프는 그의 장시(長詩) ‘비평에 대한 에세이’(An Essay on Criticism, 1709)에서 그렇게 말했다. 많이 아는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모름마저도 알기에 더 알려고 노력하겠지만, 조금 아는 사람은 그가 다 안다고 생각해서 더 알려고 하지도 검증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포프는 그것을 취한 뇌라 불렀다. 그래서 말은… 자세히 보기: 메모 02
-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렇게 김승희 시인은 희망이 외롭다고 쓴다. 희망은 좀처럼 드물게만 놓여있어서 외롭고, 또 그것 때문에 맘 편히 망가져버리지도 못해 외롭다는 것. 그래서 비로소 광장이 된 거리가 제공해주는 것은 징후나, 미래따위의 낱말이 아니라 차라리 절망같은 희망이다. 광화문 끝까지… 자세히 보기: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 그래봤자 자본론 그래도 자본론 그리고 김수행몇 개나 되는 혁명이 실패하고 얼마간의 변덕을 기억하는 우리에게 자본이나 자본의 밖에 대한 말들은 언제나 드물게만 물음됐던 것 같다. 그 얼마동안 우리는 그것의 모순들을 마주할 때마다 젠체하듯 또 참신하고 세련되고자 애쓰듯 근대성이니 신자유주의니 하며 그의 이름을 애둘러 피해갔다. 하지만 그간의 우회가 일부의 정밀한 풍경을 묘사했을진 모를 일이지만 그것이 단 한번도 전체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리는 일은… 자세히 보기: 그래봤자 자본론 그래도 자본론 그리고 김수행
- 메모 0111년 10월 16일, 월가 점령 시위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68혁명을 언급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 그는 그곳에서 대중들과 작게는 변하지 말 것을 크게는 더러 더 순수하고 아름다워지기를 약속했다. 저 약속을 때때로 상기할 때면 작년 이맘때 즈음이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철도 민영화… 자세히 보기: 메모 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