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파업 때 끝까지 싸운 이는
노조 간부가 아니라 연극반원이었다네요
― 심보선, 「예술가들」(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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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가장 구태스러운 질문이 가장 전위적인 예술을 만들어낸다. 오민수의 예술이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느꼈다. 우리에게 그의 설치는 넓은 의미의 ‘참여’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옹호처럼 보인다. 화염병은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예술은 화염병이 될 수 없다. 둘 사이의 긴장을 포기하면 예술은 사라지고 만다. 이 자명한 명제는 예술이 더는 현장을 찾지 않은 채로도 다툼을 만들어내는 완숙한 닻이 되어주었다. 구체적인 현안은 이제 예술의 대상이 아니니, 예술은 그저 실재에서 물러나 그것을 주조하는 형이상학과 싸워야 할 몫을 갖는다는 것. 건설 노동자의 분신 대신에 인간 소외를 은유하는 알레고리, 구축 당하는 빈민 대신에 폐허의 미학을 건설하는 멜랑콜리적 구성, 정부의 언론 장악 대신 어떤 표현도 가능한 초현실적 세계관의 구축…, 이들은 현안에서 물러나지만 갈음을 통해 총체성에 닿는다. 장기적으로 혁명은 이 총체성 위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우린 미술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비판이 감미롭게 들리고 가장 안전한 단어로 변모할 때, 창작은 정치를 심미화하는 데 그친다. 혁명을 노래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최종심에 다다를 때까지 예술은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오민수의 예술은 여기에 대한 답이다.
비판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에서 그치거나, 타자를 향한 아름다운 위로를 건네는 것으로써 자위하고, 부조리와 대비해 오직 작가의 결백을 탄원하고 마는 것. 오민수는 이 모든 것에 거리를 둔다. 비판은, 그것이 비판인 한에서 감미롭기보다 불편한 것이며, 안전하기보다 위험한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택배 물류센터 노동자 감전 사망 사고(〈전기는 흐른다〉, 2020), 평택항 노동자 압사 사망 사고(〈철과 피〉, 2021), 배달 노동자의 사회 안전망(〈킥스타트〉, 2023), 아리셀 화재 참사(〈아리셀의 손가락들〉, 미공개) 등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참사를 숨김없이 발음한다는 데서 불편하고 위험하다. 정치적으로 위험할 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위험하다. 나는 그의 작품에서 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본다. 참사에 대해서 발언하려 했지만 시공간은 완결되어 있고, 누구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입을 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여기서 말은 오직 사건의 몫이거나, 그것에 결착된 사물의 권능이다. 그래서 작품에선 예술가를 찾을 수 없고, 다만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로 사물만이, 현실만이 남는다. 이것은 사물의 독백이지만, 그러나 언젠가 말 잃은 작가의 비명일 것이며, 마침내 현장에서 어깨를 겯었던 투사의 함성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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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수는 분명 스스로도 그 가능성을 의심하는 비판에 대해, 가망 없는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공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당대를 사로잡았다. 배달, 조리실, 공사장, 물류 창고, 택배 상하차 등 예술이 차마 접근할 수 없었던 노동 현장을 누비며 그가 기어코 ‘미감’을 찾아냈을 때, 예술은 망설임 때문에 차마 발설하지 못했던 비판을 비로소 욕망할 수 있는 여지를 느꼈다. 그러나 오민수의 비판은, 예술이 자율성을 통해 삶의 다른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을 고유한 영토를 점유하고 있어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순수한 표정의 서정시조차 비판을 짊어졌던 여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예술의 본질이 적敵이 되려고 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듯 예술의 운명은 왕복 운동하는 것. 곧 타율성에 맞서 자율성을, 자율성에 맞서 타율성을 실행하며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기존 연결에 맞서 다른 연결 방식을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민수는 현실과 싸우면서 현실을 예술로 재구성하지만, 동시에 순수한 영역에 남기를 고집하지 않고 사적 삶으로 들어가는 타율성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미학적 타율성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드러나는 ‘일상성’을 통해 새로운 자율성을 규정하고자 한다. 자본주의 비판은 당연하다. 어떻게 비극을 긍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 해서 오민수가 당연했던 적은 없다.
오민수에게 다시 묻자. 비판의 형식을 띠면서도 순수의 영역이 아니라 일상으로 들어가는 미학적 타율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상에서 계급투쟁을 발언하고, 활동가로서 문화운동을 부르짖는 방식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예술이 곧 비판이 되기를 희망하지만, 그것이 또 다른 이데올로기 체제의 ‘기정사실의 정리’로 귀결되는 것과는 대별한다. 작가가 최근 부산 공간힘에서 선보였던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2024)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을 먼저 읽어낸 다음,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인 것이 아닌 일상에서 비판을 향해가는 오민수를 생경하게 만나게 된다. 퍼포먼스로 구현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조현병을 앓았던 어머니에 대해서 발화한다. 1980년대 어느 부잣집의 식모이자 의류 공장의 노동자였던 그녀는 언젠가부터 조현병을 앓았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의 원인으로 아무리 발버둥 치며 나오려 해도 탈출할 수 없었던 경제적 현실을 지목한다. “현실은 점점 더 잔혹하게 어머니를 졸라올 뿐이었고 자유를 갈망하면 할수록” 또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수록 그녀는 더 미친 여자가 되어갔다.
조현병은 주로 신경 전달 물질의 이상이나 유전적 소인에 의해서 발병한다. 그것은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다분히 세태와는 무관한 ‘질병’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 원인에서 원인을 다시 한번 소급해 들어갔다. 조현병을 조현병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조현병에 걸린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가. 오민수가 한 대목에서 “사람들은 어머니가 점점 미쳐가고 있다고 할 뿐이었다”고 말할 때, 앞선 질문의 대답은 사람들 혹은 사회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규범. 증상을 만드는 것은 조현병의 인자겠지만, 그를 비정상으로 사회에서 탈락시키는 원인의 원인은, 노동력 나아가 부部, 경제성(력)을 중심으로 인간을 판별하는 자본주의의 세계로 좁혀진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사회적인 것을 일상으로 빨아들인다. 개인의 경험, 독백에 갖혀있는 일상을, 그것이 놓인 사회로 개방해 냈다. 기존의 서정적 예술이 조현병 환자의 가족으로서 느끼는 절망감을 토로하는 데 그친다면, 사회적 예술은 예술이 조현병 환자가 경험하는 절박한 현실을 대변하는 데서 멈춘다. 그러나 오민수는 이 양쪽을 왕복하면서 절망감을 느끼도록 조성하는 사회를 되묻고, 절박한 현실을 경험하도록 주선하는 세계를 반문한다. 어쩌면 작가는 한 가지를 덧붙이는지도 모른다. 조현병 환자가 창작한 예술이 나오지 않는 것의 배경으로서 예술적 조건의 결여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가 쓴 『사양』(1947)에는 유부남과의 사랑에 빠진 가즈코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불륜의 오명을 두고 그녀가 내리는 결단은 ‘혁명’이다.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를 뒤집어버리겠다는 것. 나는 오민수의 작업을 볼 때면 가즈코의 결단을 떠올리곤 했다. 혁명은 거시적인 인식이 아닌, 소박한 일상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노동자와 장애인 (…) 내가 지금까지 이런 존재에게 관심을 가져왔던 까닭은 나 자신이 그들이 나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동료였고 가족이었고 심지어 어떤 때에는 내 자신이기도 했다.” 그저 가까이 있기 때문에, 혹은 내가 ‘나’인 까닭으로 알리바이를 대는 이 사소하고 소박한 미학적 타율성.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이념보다 주체와 세계가 떨어지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닻이기도 하다.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에서 화자는 떠오르는 비눗방울 사이에서 말을 이어나간다. 비눗방울을 인어공주와 연결한다면, 이는 의지를 가졌으나 그것을 발음하지 못할, 말 잃은 자들의 물거품된 은유일 것이다. 화자는 그 물거품에 목소리를 부여한다. 혀가 굳은 이가 새 혀를. 다리를 빼앗긴 이가 새로운 다리를 지니게 된다면 그는 무엇을 폭로하고, 어디를 향할 것인가. 이 물음을 통해 우리는 그를 존재하고, 가고, 말할 수 있는 주체로 계시해야 하는 용기를 부여받는다. 광인이 자기 삶을 만드는 것. 나아가 광인의 예술이 불가능하다는 통념을 거부하면서 창작에 천착하는 것은 그 자체로 미학적 모험이다. 그리고 이제 그 광인의 위치를 ‘기계로 바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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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음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예술이 쓸모없음을 통해 순수함을 담지한다는 상투성은, 예술이 어떤 필요에도 무관심한 것이라고 말하는 착각에서 번진다. 분명 대리석 조각은 대리석 계단이 드러내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판매나 용도에 묻혀있는 물질감을 노동의 안식, 그 영원한 공간으로 데려가 찬미하게 한다고 해서 ‘쓸모’를 제압했다고 여길 수는 없다. 쓸모없음이란 홀로 해방되는 것이기보다, 누구나―무엇이든―쓸모없게 될 가능성을 여는 ‘주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들은 자본주의 계율을 전복하는 자들이다. 오민수가 천착하는 쓸모없음은 어떤 독립된 절대적 휴식의 신성함에 서리지 않는다. 그의 설치는 단독자가 아니라 ‘대오’다.
분명한 것은 우리 곁에 기계가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기계와의 공존 없이는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 현대 문명 서비스의 혜택을 받는 사람에게는 기계와의 공생이 매끈하고 편리한 서비스로 느껴지겠지만, 노동자층에서 그것은 절박한 생존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기계는 하나의 ‘주체’ 혹은 ‘개체’로서의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나는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발견한 기계의 영혼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 노트)
이 말들은 어쩔 수 없이 신유물론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 환경의 모든 귀퉁이에서 기어 왔다는 것을, 그곳에 스스로를 은닉했다는 것을 인정하라. 환경이 신체와 마음 내부에 있다는 것을, 일상에서 정치적으로 당신 안에서 전진하고 있음을 인정하라. 비인간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내려는 헛된 시도를 단념하라. 그 대신 당신 역시 참여하고 있는 배치 내의 비인간과 더 정중히, 전략적으로, 세심하게 개입하도록 노력하라.” 제인 베넷이 『생동하는 물질』(2009)에서 사물이 지닌 미감의 해방이 아니라 그것이 참여하는 정치를 선언할 때, 또 여성과 노예 다음으로 참정권을 인정받을 주체로 비인간을 예언할 때, 이는 오민수로부터 합류한 대오의 강령처럼 보인다. 오민수의 설치는 사물에 들씌워진 관념을 벗기고 숨은 미감을 찾아내는 자유보다 더 먼 곳을 향해 나아간다. 이때 비인간은 인간에 의해서 족쇄에서 풀려난 타자가 아니라, 스스로 독립을 획책한 주체다. 계급투쟁이 계급의 투쟁이기보다 계급을 만들어내는 투쟁이라면(루이 알튀세르), 정치가 막다른 길에 처한 곳에서 새로운 주체는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낸다. 프롤레타리아, 여성, 흑인이 그랬듯, 지금 새롭게 투쟁에 합류할 계급은 비인간이다. 나는 오민수가 발견한 “기계는 하나의 ‘주체’” 그리고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발견한 기계의 영혼”을 그렇게 읽었다.
반복하자, 오민수의 설치는 ‘대오’다. 이 대오는 의도와 계획 없이 또 다수결이나 협상도 없이 오로지 물질적인 반응을 통해 노동을 멈춘다. 같은 책에서 베넷은 2003년 미국 북동부 대정전을 비인간 행위자가 작용한 사례로 분석했다. 그녀에게 이 사건은 단순한 기술적 실패가 아니라, 사물(전력망, 송전선, 소프트웨어 등)이 능동적으로 작용한 복합적 상호작용의 결과다. 전력 시스템은 인간의 의도나 계획에 따라 작동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전력망의 복잡한 상호 작용에서 예측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사물은 단순히 인간의 통제에 따라 작동하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사건의 원인 제공자이자 결정적인 역할에 선다. 파업이 인간 노동자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생산 활동을 중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면, 기계 행위의 중단은 스스로의 내적 작동 방식과 물리적 한계에 의해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전기는 흐른다〉에서 어깨를 겯은 7개의 기계는 팔뚝을 높여 흔든다. 육중한 소리로 웅성거리며 구호와 민중가요를 부르짖는다. 자본의 명령에 따랐던 노동 현장의 리듬과 속도는, 이 순간 통제에서 벗어나 제 리듬과 속도로 행진한다. 빠르게 회전하는 그들의 낫은 시위를 진압하려는 치안을 막듯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철의 노동자다.
〈전기는 흐른다〉는 2018년 CJ대한통운의 대전 물류 터미널에서 발생한 감전 사고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23세의 일용직 김모 씨는 퇴근하기 전에 컨베이어 벨트를 청소하다가 누전된 전기에 감전돼 사망했다. 단돈 천 원의 누전 차단기를 설치하지 않아 발생한 참사였다. 작가는 어두운 밀실에 7개의 스피커를 설치해 현장의 소리를 담았고, 그 위엔 회전하는 날을 설치해 그곳의 움직임을 재현했다. 철과 플라스틱, 모터, 반도체까지, 사물은 기존의 모든 용도에서 벗어나―저항해―공간에 현전한다. 감각적인 조명과 리드미컬한 움직임. 이들은 일견 미감을 말미암아 미학적 자율성으로 드러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말했듯, 오민수의 설치는 왕복 운동이다. 순수한 영역에서 예술작품의 지위가 완성되려는 순간, 작품은 굉음과 쇳소리로 미적인 처소를 타율적인 사회의 영토로 전락시킨다. 누구도 여기선 조용히 ‘감상’할 수 없고, 안온하게 ‘관조’할 수 없다. 미술관은 이제 그날의 물류 터미널로, 감상자는 현장의 공기와 진동을 감각해야만 하는 노동자로 존재한다. 노동자가 들어온 적은 있어도, 이곳이 공장이 된 일은 없었다. 장례나 파업이 치러지는 것 또한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이는 오로지 기계만이 할 수 있는 과업이다. 작가의 말대로 “죽음을 잊기 위해 언제나 같은 곳에 한없이 멈춰 서는 사람들” 그러나 사물은 잊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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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의 시공간은 닫혀있고, 누구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다. 법적 진실과는 싸워야 할지 모르나 실체적 진실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니, 어떤 인물의 경험을 도려내는 것만으론 세계를 재구성해 낼 수 없을 테다. 그렇다면 이 닫힌 공간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가능한가. 말하자면 오민수는 팩트에 입각하지 않은 채로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기를 쓰고 발설하려는 자들의 세계에 있다. 이제 그가 왜 비인간을 내세우는지 헤아릴 수 있다. 그는 사건의 진실을 복원한다거나, 과거에서 미래의 길을 읽어낸다거나 하는 취지하고는 무관한 곳에서 제작한다. 작가의 태도는 사건의 진행에 개입해 그것을 진보로 이끄는 영웅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찌할 수 없어 일어났다. 이는 그가 정치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민수의 예술은 역설적이게도 정치적인 작품으로 읽힌다. 오늘날 사회의 의미심장한 경향 중 하나가 정치의 부재라면, 예술은 정치를, 그리고 그 정치에 헌신할 주체를 발명해야 한다. 사물 속에서 인간은 역사를 만들지만, 역사 안에서 인간은 사라지고 오직 사물만이 남는다. 인간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연사의 이념’이 옳다면, 그러니까 역사가 몰락의 과정일 뿐이라면 관점은 인간에서 사물로 뒤집어져야만 한다.
거대한 수조 위에 날카로운 초침의 쇠막대가 두꺼운 원형 철판 위에서 시계처럼 회전한다. 이들은 둔중한 쇠사슬에 매달려 있고, 천장에선 주기적으로 물이 흘러내린다. 〈철과 피〉의 이야기다. 작품은 2021년 평택항에서 발생한 압사 사고를 경유한다. 당시 이선호 씨는 용역 회사의 지시로 청소를 하다가 컨테이너에 깔려 유명을 달리했다. 컨테이너 결함과 그것을 사전에 발견해 내지 못한 인재로 인한 사고였다. 그러나 참사 앞에서 오민수는 엉뚱하게도 ‘철’에 대해 사유한다. “철은 청동기, 철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인간 문명의 변화를 불러온 물질이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발전이 왜 인간을 죽이게 되었는가. 철이 전쟁의 도구가, 역으로 그것을 만드는 노동자를 죽게 하는 것에 대해 주목했다.” 높은 열에서의 변형성, 식었을 때의 강성과 예리함. 이는 인간에게―의도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다른 인간을 죽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무릅쓰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을 두고 〈철과 피〉의 ‘철’은 스스로 목을 매고, 물을 떨어뜨려 산화하고자 한다. 책임자 문책도, 시스템의 개선도 불가능한 아수라에서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철의 존엄은 그것에 연루되었던 스스로의 몰락을 선택해 책임을 지는 것뿐이다. 타인의 죽임이 아니라 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선언하는 것, 이것이 사물이 정치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허무맹랑한 일이라는 것을 오민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아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만들어진 관념대로 사고하는 것은 사물을 모욕하는 일이며, 현실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막아버리는 포기라는 것. 말하면서도 스스로 그 가능성을 의심하는 말을 시작하게 한 힘은 여기서 나온다. 우리는 사라진 연인에게 가장 성실하다. 아니 그가 떠났기에 그를 더 사랑하는 것처럼 느낀다. 불편한 옷과 신발, 망가진 휴대 전화가 그렇듯 이러한 종류의 성실함을 따진다면, 우리는 쓸모라고는 전혀 없는 사물에 지독히 성실하다. 모든 사물의 용도를 정확하게 지정해야 할 최고 주권자인 아버지 ‘자본’조차도 여기선 이방인이기에, 우리는 충실한 장자이거나 반항하는 탕아가 되는 대신 고아가 되어간다. 오민수의 작업이 만드는 것은 그러한 방황의 상황이다. 흐르는 물에 따라 인간이 알고 있던 철의 개념을 잃어가는 사물은, 인간에게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의지를 내려놓게 만든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1932)에서 말했듯 역사는 비인간을 제압하면서 문명을 구축해 왔지만, 동시에 그것은 비인간의 거대한 힘 속에서 거꾸로 ‘대응’해 온 과정이기도 하다. 철의 사라짐 앞에서 인간은 그 사라짐에 대응해 철을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철은 이 순간 대속으로써 피를 흘린다. 그렇다면 인간은 여기에 어떻게 성실해야 할 것인가.
어쩌면 그 속죄양 속에서 〈킥스타트〉는 천사를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토바이, 안개 속에서 점멸하는 헤드라이트, 찢어지는 엔진음 그리고 달리는 대신 주어진 하얀 날개…. 질주할 수 있기 때문에, 좁디좁은 차와 차 사이를 통과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도로의 가장 저급하고 위험한 사물이 될 수 있었던 사물은, 이제 달리지 않고 굉음을 내고, 조명이 필요 없는 곳에서 빛을 비춘다. 여기서 가속 없이 발생하는 기계음은 비명이며, 어둠 없이 켜진 빛은 눈물이 된다. 배달 노동자의 사회 안전망을 의식한 작품에서, 오민수는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 비명을 지를 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혹은 그것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상황을 사물에게 전가한다. 높아가는 배달 수수료에 대한 논평은 드물지 않게 존재해 왔지만, 그 수요에 동반된 배달 노동자는 시야에 비치지 않는다. 그들의 파업은 간간이 있었으나, 파편화된 구조에서 연대는 불가능하고 대체할 인력이야 얼마든지 있었던 까닭이다. 오민수가 배달업에 종사했던 어린 날을 회고하며 “나를 들켜선 안 됩니다”라고 고백했듯, 죽음의 질주를 멈추는 방식은, 반대로 그 오토바이를 인간의 시야에 밀어 넣는 일이다. 아니 오토바이에게 필요한 것은 그를 사라진 것으로 만드는 바퀴를 무력화시키는 사물의 파업이다. 드러남(인간)의 감춤과 감춤(사물)의 드러남. 이 역시 왕복 운동이 아닐까. 황량한 도로 위 홀로 세워져 있던 이륜차. 그에게 인간의 부재가 정치로 성립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정치는 인간에게 이륜차가 부재한 순간 복각된다. 인간으로는 그 부조리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은, 오민수는 치열하게 동어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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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는 1965년에 “우리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 신화를 잿더미로 만들면서만 인간의 어떤 것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고 적었다. 이 문장을 사물에 국한하는 것은 오독이겠지만, 적어도 인간이 무언가 깨닫기 위해 몰락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 맥락을 같이한다. 평등의 정치는 가장 비천한 자가 가장 고귀해지는 순간이 아니라, 가장 고귀한 자가 가장 비천한 자로 내려앉는 것으로써 집행된다. 그래서 오민수는 이곳에서 가장 먼저 모든 것을 탕진해 버리는 사람이다. 사물의 대오에서 오민수는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그 행진을 뒤따른다. 기계의 표면에서 작가의 예술성을 발견해 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기존의 용도에서 탈락해 스스로 결착하고, 저절로 작동하며, 악보로 채 적지 못한 굉음을 알아서 낸다. 그렇게, 이후에 온 인간은 부조리의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젖어 사물의 시위를 ‘지켜보는’ 감상에 그치는 것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정치와 예술이 근본적으로 연동돼 있다고 제시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고 들리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라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들을 수 없었던 비명으로 무언가 주장할 때 정치는 시작된다. 몰락한 인간. 그러나 오민수가 인간에게 수치만이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물과 인간이 같아졌다면, 우리는 그 강철 대오에 합류해야 하는 용기를 요구받는다.
이 글은 가장 구태스러운 질문이 가장 전위적인 예술을 만들어낸다고 단언하며 시작했다. 어떤 사건을 구체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세련치 못하고, 물활론에 그치는 은유는 순진할지도 모른다. 이들은 예술이 이룩한 자유를 뒷걸음치게 만든다는 비판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에는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김수영). 우리에게는 다시 그 구태스러움에, 타율성으로 향해 가는 길도 남아있다. 화염병은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예술은 화염병이 될 수 없다. 둘 사이의 긴장을 포기하면 예술은 사라지고 만다. 사라져도 좋다. 지금은 개새끼들과 싸워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임화는 스물여덟에 “오호 적敵이여 너는 나의 용기이다”라는 묘비명을 내걸고 시인으로서 나섰다. 이 문장을 다시 읽는다. 오호 적敵이여 너는 나의 용기이다. 이미 죽을 자리를 정해놓고 출발한 예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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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박재희 옮김), 『독일 이데올로기Ⅰ』, 청년사, 2007
루이 알튀세르, (서관모 옮김),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 『마르크스주의를 위하여』, pp.383-435
신형철,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pp.44–61.
자크 랑시에르, (김정한 옮김), 「미학 혁명과 그 결과: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 『뉴레프트리뷰Ⅰ』, 길, 2009, p.492.
제인 베넷, (문성재 옮김), 『생동하는 물질』, 현실문화, 2020. pp.269~295.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pp.36–71.
◼︎ 『비평웹진 퐁』 크리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