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지영은 세계를 팽팽히 죄고 있는 ‘필연’의 매듭을 파고들어 그것을 무한한 ‘우연’으로 풀어헤친다. 그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작품은 하나의 ‘소명’, 우연에 의미가 깃드는 순간이다. 시간, 중력, 유전자, 신경 회로, 법, 경제, 질서…, 피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갖가지 것들. 세계가 늘 불가피와 불가역의 천진한 만남으로 직조될 때, 작가가 하는 일은 씨줄과 날줄이 이루는 필연의 뜨개 사이를 비틀어 코가 빠진 자리로 우연을 흘러내리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조건 그랬어야 하는 ‘사건’은 어쩌다 그렇게 된 ‘사고’로 눈을 뜨고, 이와 함께 다른 모습으로 나아갈 무한한 ‘가능성’을 끌어안는다.
“평범하고 사소한 이미지를 ‘모르는 이미지’로 되돌린다.” 윤지영의 이 말은 일반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평범’과, 변덕스럽지 않은 ‘사소’함을 뒤집어 우리가 ‘모를’ 우연으로 향하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우연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균열에 불과하다. 우발적인 마주침이 우발적으로 사랑에 미끄러질 때 과거가 운명의 이끌림으로 전환되듯, 우연한 일이 한 사람의 손끝에서 예술의 ‘의미’와 만나는 순간은 ‘소명’으로 번진다. 그러니 작가의 문장은 이렇게 다시 발음할 수 있다. 평범하고 사소한 모든 것은 미美의 소명을 안고 태어난다.
이 논리를 작가가 과거에 보여주었던 〈파동하는 이미지〉를 통해 검토해 보자. 꽃이 땅에 흩어진 모양은 필연의 결과다. 꽃의 생김새는 그의 유전적 형질과 주변의 환경에서 구성되었으며, 이후의 낙화는 중력과 기후라는 질서가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 ‘음계’라는 코바늘로 필연을 풀어헤친다. 떨어진 꽃잎이 음표로 옮겨지는 것과, 그들의 간격이 리듬으로 번역되는 것은 운명이 쓴 적 없는 우연한 사건이다. 운명이 쓴 것은 그저 사라지는 일. 그러나 노래가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작품에서 꽃은 마치 노래 부르기 위해 태어난 듯 악보의 생을 살아낸다. 소명이다.
그렇다면 신작 〈날아가는 말〉은 어떠한가. 새의 비행 역시 필연을 따른다. 지구의 자기장을 쫓아 날개를 펴는 일에 예기치 않은 순간은 없다. 그러나 작가는 꽃을 악보 위에 올렸듯, 새를 문장 위에 겹친다. 문장을 삼키고 의미를 해체하는 것 또한 운명이 쓴 적 없다. 그러나 이 텍스트 위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하나의 핵심을 더해 보자. 이번 신작은 인간의 필연까지 살라버린다. 차용한 글은 탈북자 조경일의 수기다. 한 사람은 그의 유전적 형질은 물론 태어난 사회, 계층에 의해 결정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가 이 궤도를 이탈하기로 결심했을 때, 삶은 어느 장소로도 갈 수 있는 우연으로 풀어헤쳐지고, 마침내 자유를 위해 태어났다는 소명으로 번졌다.
굴레가 자유로 나아가는 과정을 표현하는 데 〈날아가는 말〉의 새는 얼마나 적확한 활자인가. 조경일의 삶은 고정된 활자로는 표현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의 활로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글자로 써야 할까. 목적지에 얽매이지 않는 주체가 나서야 하고, 의미와 문법으로 도무지 묶어지지 않는 글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윤지영의 새만이 할 수 있는 소명이다. 〈파동하는 이미지〉에서 작가가 꽃의 소명만 찾았을 뿐, 악보의 운명은 그대로 두었다면 신작에서 소명은 전방위로 확장됐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관념. 결국 신작은 세계의 전부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세 층위의 필연, 우연, 소명을 모두 가로지른다. 하나의 물음을 던지며 마무리 짓자. 우리가 이 작품과 만나는 것도 소명이었을까.
◼︎ 인천문화재단 자문글, 윤지영 개인전 《날아가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