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참새: 마음의 색과 모양

갤러리ERD, 김참새 개인전 《영향의 피로》

김참새 개인전 《영향의 피로》(4. 6~30 갤러리ERD 서울) 전시 포스터

김참새는 내면의 언어를 색과 형태로 번안한다. 회화와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무형의 감정을 미술이라는 그릇에 담아왔다. 그가 최근 갤러리ERD에서 개인전 《영향의 피로》(4. 6~30)를 열고 ⟨Mask⟩, ⟨Nothing⟩ 연작 등 총 22점의 회화를 선보였다.

김참새는 낭시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학력만 보면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 같지만, 작가가 되기까지 한시도 방황하지 않은 적이 없다. 유년 시절부터 미술을 배운 그는 정작 입시에서 고비를 맛봤다. 창의성이나 감성보다 규칙에 따라 틀에 박힌 그림을 그려야 하는 상황이 적응하기 어려웠다. 결국 재수를 결정하고 입시 과목이 비교적 자유로운 한국예술종합학교 진학을 목표 삼아 작은 화실에서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국내 대학이 아니라 프랑스로 유학을 가라는 것. “어느 날 선생님이 내게 신문을 가져다주면서 프랑스에서 미술을 공부한 어느 화백의 일대기를 소개해 줬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작업하는 방식이 한국보단 프랑스에서 빛을 볼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고민 끝에 김참새는 리옹으로 향했다. 어학원을 다니면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했고, 1년 만에 낭시국립고등미술학교에 합격했다.

⟨영향의 피로⟩ 목판에 유채 40×40cm 2023

감정의 형태와 색

그러나 난관은 다시 찾아왔다. 한국에서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이 입시미술의 뿌리박힌 규칙이었다면, 반대로 프랑스에선 개성과 자유가 문제였다. 교수는 십 년 넘게 학원에 다니면서 체득한 관점과 테크닉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학교를 그만둬야 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작가가 요구받은 것은 퀄리티보다 퍼스널리티, ‘나다움’이었다. “나는 내가 미술을 굉장히 잘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곳에선 그림을 제일 못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1년을 넘게 방황하다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김참새가 찾은 방법은 아카데믹한 습관으로 물든 오른손을 버리고,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삐뚤빼뚤 뒤죽박죽 그어진 스트로크엔 이전 같은 능숙함은 없었지만, 대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김참새의 오리지널리티가 담겼다. 만약 그가 대상의 외면을 재현하는 데 그쳤다면, 정밀 묘사에 훈련된 오른손을 두고 왼손으로 그리는 화법은 적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 세계는 시각적 형태가 아니라 심상적 형상을 향한다. 감정은 모양도 색도 질감도 없다. 추상적 대상에 재현을 바탕 삼은 미술로 다가가는 한 작가는 진통을 면치 못한다. 불확실한 것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불확실한 도구가 바탕이 되어야 했다. 김참새가 묘사하는 정서는 슬픔과 기쁨처럼 정지 상태의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감정을 오가는 정동(affect)이다. 유동적인 대상을 형상화하는 데엔 왼손이 제격이었다.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 지 10년이 지나면서, 왼손을 사용하는 게 능숙해질까 봐 걱정될 때가 있다. 앞으로도 내게 미술은 낯설고 새로운 것이었으면 좋겠다.”

이번 전시에서 김참새는 주변 환경과의 관계로 내면에 누적된 감정을 다뤘다. 어딘가에 머물고, 누군가와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쌓이고 접히는 존재의 주름을 ‘영향의 피로’라 명명했다. 피로로 이름 지었지만, 꼭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적절한 스트레스는 생활이 늘어지지 않도록 긴장을 주고, 활동에 몰입감을 불어넣는다. 작가는 이러한 감정의 퇴적을 유채 레이어로 구현했다. 작업에 가까이 다가가면, 단순한 도상은 겹겹이 펼쳐진 산맥, 굽이치는 파도같이 세밀한 마티에르로 드러난다. 고저를 오가고 존재를 휩쓸어 가는 정서의 역학을 디테일에 담았다. 과장된 모양과 색은 자신의 감정을 오랫동안 성찰한 결과다. 감정에 동반된 태도에 따라 이목구비의 위치를 바꾸거나 생략했다. 분노는 빨간색, 슬픔은 파란색과 같은 클리셰를 따라가기보다는 색을 관찰하며 느꼈던 감정을 반영했다.

⟨Mask 7⟩ 목판에 유채 75×45cm 2023

⟨Mask⟩ 시리즈는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 외적 인격을 일컫는 ‘페르소나’를 다뤘다. 그림엔 저마다 형형색색 가면을 쓴 인물이 등장한다. 기존에 설치로 선보였던 작업을 페인팅으로 다시 펼쳤다. 장르는 달라졌지만, 각 화면의 인물이 다른 작품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동선을 고려했다. 가면 캐릭터가 지닌 감정은 양가적이다. 자신의 본모습을 감췄다는 죄책감과 그것으로 타인의 눈을 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동시에 담았다. 갑갑한 마스크를 벗고 자유로워지고 싶지만, 동시에 속살을 들키고 싶지 않은 모순을 초점 없는 눈으로 표현했다. 특히 이번 신작엔 마네와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를 재해석한 작품도 있다. 미술사적 맥락, 시대 상황 등 클래식에 동반된 배경지식은 때때로 인물 자체에 대한 몰입을 막는다. 작가는 제스처는 모방하되, 감상자가 캐릭터의 감정에 집중하도록 디테일을 제거하고 형상만 남겼다.

⟨Mask⟩가 인간의 낯에 담긴 감정을 표현했다면 ⟨Nothing⟩ 연작은 정서의 고유한 형태에 접근한다. 표정이나 행동으로 드러나는 기분이 아니라 내면에 깃든 감정의 모양을 상상했다.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흘러가는 마음을 포착하기 위해 매일 일기를 쓰고, 즉흥적으로 드로잉했다. 이 과정 끝에 반복되는 도상과 색을 찾았다. 뾰족뾰족한 잎을 지닌 꽃부터 풍선처럼 부푸는 원, 과육처럼 겉과 속이 다른 비정형까지. 때로는 그날그날의 감정을 상형 문자로 번역한 수필같이, 때로는 내면을 시각화하는 이모티콘을 만들 듯 시리즈를 완성했다. 아무리 다채로운 형상을 빌리더라도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물성을 기반으로 하는 미술이 온전한 추상에 가닿지 못하는 게 운명이라면, 인간을 이해하고자 그침 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작가의 사명이다. 창작이 익숙해지기보다 어려웠으면 좋겠다는 김참새의 말은 그렇게 이해된다.


『아트인컬처』 202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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