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실연이 알고 있는 혁명_다자이 오사무: 사양(斜陽)

Gerhard Richter, Betty, 1977

두 개의 문장이 있었다. 하나는 1845년 봄에 마르크스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라 쓴 것이며, 다른 하나는 1873년에 랭보가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헛소리 1」)라고 적은 것이었다. 문장은 작가보다 말이 많아, 장르도 목표도 다른 두 명제는 각기 창궐하면서 마침내 조우하여 새로운 명제를 만들어냈다. 사랑이 다시 발명되기 위하여 삶은 바꿔야 하며, 삶을 바꾸기 위해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내 사랑이 불현듯 유산된 것은 ‘새’ 사랑을 납득하지 못하는 세상 때문이니 다시 말해, 사랑이 다시 발명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즉각 응답한 것은 예술을 혁신해야 한다고 했던 아방가르드였지만,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이 명제는 삶에 어느 언저리에서도 정치를 그리고 대문자로 쓴 정치일지도 모를 ‘혁명’을 기어코 찾아내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아 씨팔 이게 다 세상 때문이야 라고 할 수 있게 된 거다.

그래서 《사양(斜陽)》의 카즈꼬가 우에하라에게 거부당했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치경제학 입문》을 읽고, 레닌과 카우츠키와 같은 사회주의 책을 탐닉한 것은, 그리고 혁명을 결심한 것은 결코 논리의 비약이 아니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사양(斜陽)》은 일본의 패전 이후에 몰락한 귀족 가문의 이야기다. 가문은 시대의 전화(轉化)의 관성에 담가져 헤매이지만 카즈꼬는 ‘다른’ 주인공이다. 그녀는 전쟁과 몰락이란 타성의 변화를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이상으로 새로운 변화를 창조하려고 한다. 삶에서 귀족을 지우고 노동을 하며, 미천함과 비천, 그리고 비참해질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부정(否定)’하는 사랑에 투신한다. 부정(不正)한 사랑이 아니다, 그녀는 유부남과의 사랑이 부정(不正)하게 여겨지는 세계를 ‘부정(否定)’하는 사랑을 한다. 타성으로 변화한 세계의 부정(不正)은 낡은 도덕이기에 그녀는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제 도덕혁명의 완성이랍니다. (…)사생아와 그 어머니, 하지만 우리는 낡은 도덕과 끝까지 싸우며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입니다. 부디 당신도 당신의 투쟁을 계속해주세요.”(317쪽)

말은 사실 이렇게 시작했다. “혁명은 도대체 어디서 일어나고 있을까요?”(317쪽) 그리고 문제는 이것이다. 이별과 실연은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혁명을 알게 돼버리는 걸까. 그것은 사태가 존재에게는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 없어졌다는 과거와의 단절 즉, ‘사건’으로 인식될 때 이 인식론적 단절을 말미암는다. 이것은 ‘사건’을 사상적으로 대우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는 대부분의 사태를 ‘사고’로 받아들이길 요청한다. 그것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고 그러니 되돌려야하며 스스로는 사고의 이전으로 회기해야한다는 것. 하지만 어떤 사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는 사태 이전과 같이 사유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리고 되돌아갈 수 없는 상실의 인정에서, 존재는 이전의 인식과 단절하고 새로운 인식을 만든다. 카즈꼬의 단절은 이렇게 나타난다. “전투개시.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랑. 그것뿐이다. 로자가 새로운 경제학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듯, 나는 지금 사랑 하나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282쪽) 그러고선 사건의 존재는 이제 이유를 초과하는 ‘원인’을 추궁한다.

부정(不正)한 사랑을 사고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마음을 접거나, 서러워지거나 하다가 제자리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그리고 부정(不正)한 사랑에 빠진 이유를 그의 매력쯤이나 스스로의 얼빠짐 정도로 남기면 된다. 사고의 존재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원인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건의 존재가 될 때 그는 이유를 초과하는 ‘원인’을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원인은 늘 세계에 있다. 새 사랑을 부정(不正)한 것으로 취급하는 세계에 대한 ‘부정(否定)’, 즉 그것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두고 원망하거나 한탄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럴수 밖에 없도록 그 필연을 만드는 세계의 민낯을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 그 후에 존재는 자신의 삶의 유치하고 사소한 언저리에서도 세계를 대상으로 사유하는 일인 정치를, 또 마침내 혁명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삶을 가지고 정치를 시작한 이들은, 정치의 장소인 광장에 나온 이들은 늘 두 가지의 의미를 감지하고 있다. 빵과 자유를 달라는 말은 결코 충분한 빵과 충분한 자유를 요청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한 편으로 충분한 빵과 충분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세계 부정(否定)하고 신세계(新世界)를 내놓으라는 협박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드물지만 세월호를 교통사고나 과적이란 ‘이유’를 초과해 ‘사건’으로 사고하려는 이들은 세월호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를 부정(否定)하고는 다른 세계를 쟁취하고자 하며, 반대로 가진 이들은 이를 알기에 이유에 대한 응답만을 할 뿐 이를 초과하는 것에는 ‘정치적’이니 ‘선동’으로 취급하며 업신여기려고 한다. 실업과 임금, 출산, 주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이유에서 멈추라는 윽박으로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편과, 꼭 초과해 원인을 추궁해 ‘세계’의 문제로 치환하려는 편은 늘 불화한다.

다시 두 명제로 돌아가자. 마르크스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 썼고, 랭보는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라고 썼다. 이 두 명제가 “변화한 세계”와 “다시 발명된 사랑”을 은유했을 때, 둘은 삶은 정치라는 은유를 선명하게 재확인시킨다. 분명히 그랬다. 철학은 지탱되어야하고, 제도는 준비되어야 한다지만 세계의 변화는 늘 화려하거나 깊은 곳이 아니라 유치하고 졸렬하고 사소한 삶의 언저리에서 출현했다. 김수영 시인은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어느날 고궁을 나오며」)하냐고 스스로를 자책했지만 왕궁과 왕궁의 음탕을 꾸짖는 것은 50원 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을 때 시작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김수영 시인 조차 그랬을 것이다- 그래야 정치는 더 강한 연결 고리로 존재 자신을 묶고 자신의 일이 된다. 다자이 오사무는 사랑을 혁명으로 위대하도록 은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은유는 오히려 혁명을 사소하게 만드는 쪽에 가깝다. 사랑만큼 어느 누구나 빠져들고 그래서 심각하게 사소한 일. 대신에 우리는 늘 원인을 묻자. 그래야 혁명은 온다. 카즈꼬의 입을 빌려 다자이 오사무는 확신했다. “나는 확신한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서 태어났다.”(270쪽) / 조재연

*참조
– 다자이 오사무, 신현선 역, 《사양(斜陽)》,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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