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은 삶을 짓는 자 편에_백은하: 기억의 활용(상상과 실재)

백은하, 몽환 夢幻, 2017, 대안공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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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은 실재의 반의어로 사용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실재를 위협하거나 적대하는 것만을 수행하지 않고, 실재에 의해 폭로된 이후에 말소되지 않는다. 살아가는 이라면 그가 걷는 동안 환상은 그의 한 편을 부축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거나 ‘정의로운 대한민국’과 같은 믿음은 지난 십년 동안 보탬이 되지 않는 환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엔 여전히 선한 사람이 존재한다거나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그것이 마음껏 환상임을 지적해 조롱한다고해도 멈춘 걸음을 재촉하고 부축했다. 또 비단 이러한 거대한 환상만이 존재를 버티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지극히 소박하거나 개인적인 환상이 존재를 지탱하기도 한다. ‘우리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영원할 거야’라거나 누군가와 늘 함께 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 혹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까지. 감히 환상이라고 부르기 무서운 이 가상들은 어느 한 번 증명조차 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이것 없이 우리의 삶은 실재를 버틸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여전히 삶에서 환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학과 기계가 전능하도록 창궐하는 시대에도 인간적인 일들이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대와는 다르게 지극히 유물론자임에도 불구하고 테리 이글턴이 21세기에 새삼스럽게 등장한 무신론자의 입장(리처드 도킨슨 등)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을 때, 그가 우려한 것은 우리의 삶을 깊은 수준에서 사유하는 것에 대한 소실이었다. 맹목적인 근본주의가 힘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는 일은 분명 통쾌한 일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동시에 쓰러진 것과 다르지 않은 이성에 대한 맹목적 신뢰를 퍼뜨린다. “이성은 그 자체보다 더 깊고 끈질기며 덜 허약한 내적 에너지와 자원에 기댈 수 있을 때에만 주도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 한데 안타깝게도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이러한 진실을 거의 간과해 버린다.”(「신을 옹호하다」, 146쪽) 이성이 납득할 수 없거나 가망 없는 일이라 판단 할 때, 인간은 믿었기 때문에 살았던 것처럼 살기 위해서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신’마저도 소생시키며 삶을 움직인다. 계산되지 않은 영역, 쓸모없는영역 그리고 가장 무능한 영역을 빌려 인간은 가장 깊은 곳-인간적인 곳-으로 도약한다.

예술은 가능한한 그런 비계산과 비실용 그리고 무능의 영역을 실재-화(化)시키면서, 삶에서 환상의 농도를 짙게 만드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그렇게 예술은 예술의 몫을 다하기 위해서 더욱더 계산되지 않는 것에, 쓸모없는것에, 무능한 것에 최선을 다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지독한 실재-계산이 가능하고, 쓸모가 존재하고, 유능만이 인정받는- 앞에서 삶을 살아낸다. 반면에 인간이 걸어간 자리 뒤에서 예술은 스스로의 가치 없음을 탄백한 일이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작가 백은하의 작업은 그 어느 작업보다 가장 고통을 순순히 감내한다. 그가 순순히 감내하는 까닭은 환상이 인간을 부축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위한 예술의 몫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모른다거나, 덜 알고 있다면 작업은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피해가거나 증발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백은하는 그것을 모른 체 하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고통스럽기를 선택한다. 전시 《기억의 활용 -상상과 실재》는 동화적인 세계를 다루면서도 그 고통을 안았기에 여기저기 포슬포슬함이 느껴진다.

2
전시(⟨몽환 夢幻⟩ 연작)에서 주로 드러난 것은 “과거의 어느 곳에 존재했던 공간들의 이미지와 느낌”(작가 노트)을 표현하고자하는 장소이다. 그것은 ‘과거’라는 낱말로 익숙한 것을 표상하면서도, ‘어느’라는 말로 불특정 지으면서 낯선 것의 표상을 같이 공존시킨다. 그래서 작품 속의 잎사귀가 없는 나무, 화초, 해바라기 등은 마치 그것의 전형적인 모습-익숙한 것-을 하고 있으면서도 상대적인 크기를 달리한다든가 색을 증발시킴으로써 낯선 모습과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공존은 장소에 위치한 캐릭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자연을 배경으로 하기에 도마뱀의 형상을 한 동물의 존재는 익숙한 것으로 드러난다. 반면에 그곳에 동물과 얼마 차이나지 않은 크기의 인간이 위치한다는 것-그것도 비키니를 입고서-은 무척 낯선 일이다. 그렇게 표현된 모든 것은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낯선 것이며, 모르는 것이지만 익숙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불안한 대위의 전개는 파열음을 내려다가 곧 인간의 표정에서 감추어진다. 인간은 편안하거나 적어도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연작에서 인간의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불안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진정 불안한 장소의 인간은 잔뜩 고개를 들고 경계할 뿐 마음껏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인간의 시선은 대부분 안정적으로 프레임 밖을 향한다. 그리고 이윽고 인간의 그러한 표정은 이 낯선 이를 포근히 쳐다보는 동물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된다. 인간의 몸보다 부쩍 커다란 자연이란 낯선 공간에서 여인을 동물은 놓치지 않고 응시한다. 그 보살핌 안에서 인간은 실재의 세계-프레임 밖으로-에 시선을 던진다. 혹은 그 반대의 경우의 해석도 역시 성립한다. 낯선 자가 낯선 곳-프레임 밖-을 살피니 동물이 향유하는 익숙함이 보호된다.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의 공존은 늘 불안함을 창출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존이 만들어낸 불안함은 그 공존에 의하여 해소된다.

둘 중 어느 것이 실재이고, 가상인지 또 누가 화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프레임 안은 ‘꿈’이란 환상의 공간이고, 화자를 포함하는 환상의 공간의 재료들은 모두 실재에서 왔다. 중요한 것은 그 둘이 서로를 연대하면서 불안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몽환 夢幻⟩ 연작 이외의 작업에서 보이는 것은 그 해소된 불안이 나아가야할 너머인 것처럼 보인다. ⟨골목⟩과 ⟨통영⟩ 그리고 ⟨기억의풍경,봄⟩에서 눈에 띠는 것은 지평선이다. 세 풍경은 모두 그것이 불안이 해소된 뒤 내딛어야할 실재를 지칭하듯 새로운 지평을 생산하는 데 종사한다. 실재는 존재에게 강제력을 발휘하는 물질적이고 낯선 것으로 팽배한 세계이다. 이것과 맞서기 위해서 존재는 환상적인 것들과 뒤섞거나 모조리 환상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불안이 해소된 이후에야 존재는 환상 너머 걸어가야 할 실재를 꿋꿋이 마주한다. 환상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환상이 제도화’되는 것과 환상 그 자체는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환상의 제도화는 존재를 소외시키지만, 환상 그 자체는 존재에게 세계에 틈을 보여주거나, 가능성 을 쥐어 준다. 그것이 《기억의 활용 -상상과 실재》의 메시지 중 하나라면 기꺼이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3
하나의 작업은 대부분 쓸모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은 대부분 매대에 올라가는 데 실패하며, 대부분 무능한 것이 된다. 작업은 물질로서 그러니까 실재로서 탄생했지만 사실 실재한다는 것은 형상 그 이하다. 그것은 오직 경험 이후에 의미로 작성될 때 즉, 환상의 영역으로 들어와서야 가치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의미가 풍부하고 풍요로운 것은 그것이 실재로는 무가치한 까닭이다. 정리하자면 백은하의 작업은 가치 없음을 선언해야하는 예술이 더 침전하여 가치 없는 것들을 취급할 때의 서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했듯 가치 없음을 선언함으로써 가치를 얻고, 실재하지 않기에 실재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작업은 가치 없음의 고통을 반복하여 감내함으로써 아름다운 것이 된다. 니체는 말했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몰락은 패배가 아니다. 삶을 짓는 자의 편에서 몰락은 삶을 지켜낸다. / 조재연

/ 대안공간 눈 ‘새싹 이음 프로젝트’ 기고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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