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사람도 누구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체로 정신병자밖에 없다.
대리언 리더, 배성민 옮김, 『광기』, 까치, p.97
1
내 세계에는 얼굴이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하루엔 낯을 가지지 않은 존재들이 장기적으로 오가고 있었다. 사물을 통과한 사실과 장소는 자욱으로 남아 언제든 돌이켜볼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건넨 낯은 도무지 잔류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커피 머신과 졸음을 참을 줄 아는 포스기, 그들처럼 살과 피를 가진 기계들. 인형人形 없이 운영되는 가게는 조금도 새롭지 않다. ‘안녕하세요’라는 안부를 묻는 인사에 이제 모두가 물음표를 떼었듯이, 혹은 녹음에 부친 인사에 대꾸가 허무한 것처럼, 우리가 일으키는 파문엔 서로의 주름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니 이따금 당신이 달라진 게 없냐며 모습 중 어디가 변하였는지를 물을 때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지난날과 오늘을 대차대조할 노력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도, 예민한 관찰력을 지니지 않은 연유도 아니었다. 그 물음만이 얼굴을 분실한 세계를 떠올리게 만들어, 상실의 죄책을 상기시킨다. 얼굴은 신체의 마중물이니 낯의 탈거奪去는 신체의 탈거. 그때마다 넉넉하지 않은 입을 벌린 사물들이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너도 사물이지, 너도 사물이지 하면서.
기록과 흔적은 존재의 의무다. ‘존재’가 존재하는 한, 기록과 흔적은 자의와 타의에 의해 혹은 그 둘과 상관없이 세계에 새겨진다. 그러나 전부가 잔여되는 것은 아니다. 기록이 사유 위에서 기억할만한 것과 기억해야 하는 것으로 선택된다면, 흔적은 의지와는 거리를 둔 채 비결정적으로 결정되는 것에 해당한다. 보편적인 강제로서 기록과 흔적은 존재와 무無의 가장 큰 차이인 까닭에 이 둘을 나눌 때 가장 큰 안건으로 상정된다. 기억은커녕 흔적조차 남지 않은 존재는 그 지위에서 탈락한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는 낯을 비롯한 신체의 생生이 은폐되어 사물로 전락했던 배경에서 함께 요구된 일이었다. 눈은 요구를 수용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사물에서 생은 발견되지 않는다. 생은 스스로에 기입된 목적을 부인하거나 그것의 부재를 선언할 때 발생하지만, 기입된 목적에 영영 매인 사물에 생이 존재할 리 없다. 존재가 노동의 제공을 기입한 상품으로서 세계에 낯을 내밀 때, 그가 잔여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일 테다. 문신, 화장, 성형, 다이어트, 신체 단련, 카메라 필터 등을 통해 이미지 자체가 되려하는 신체는 생의 표현이 가로막힌 존재의 비명이다.
2
무엇보다 정의철의 회화는 표면의 재현이라는 과제로부터 벗어나 있다. 회화가 시간을 거머쥐려는 변혁에서도 놓지 않았던 표면은, 외려 생 아래에 매장된다. 표면은 빛과 대상의 조우. 여기서 빛은 삶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린 외투를 빛낼 뿐이다. 회화의 시선은 두 눈이 아니라 오직 외눈으로 존재하며, 평면 위에서 생을 표현할 굴곡을 균질하게 마모시켰을 뿐이다. 정의철이 대상에서, 특히 신체 안에서 재현하는 것은 대상의 삶이다. 그러나 표면과 삶 사이의 전복만으로 존재의 탈락이 복원되지는 않을 것이다. 낯을 잃게 만든 기입은 수 없이 점철되어 있다. 그러니 삶은 그 점철보다 더 많은 횟수로, 더 더미로 기입을 덮어써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정의철이 발견한 것은 몸을 가득 메운 생’들’이다. 몸의 어느 부분도 무의미하거나 하찮지 않다. 모든 부분들이 살아 있는 까닭이다. 대상엔 무한히 많은 장소가 있지만, 어느 것도 ‘발생’하지 않는 장소는 없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제 신체를 구성하는 것은 기입된 목적도 이미지도 아니다. 오히려 신체를 구성하는 행위들, 삶들이다.
첫 개인전 ⟪낯설다⟫(대구 모리스갤러리, 2016)부터 신체는 술렁이거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초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에서 이어지는 공통된 형상 중 하나는,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운동적 형태를 띠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떤 동작 중이기를 마다하고 서 있거나, 멈춰 있다. 그러나 이는 그다지 정적인 상태가 될 수 없다. 대상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그는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고 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이 태도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노출되고, 부동이 격동으로 추출될 수 있는 내막은 비결정이 지닌 잠재에 있을 것이다. <Unfamiliar 11>(2016)에는 바닥 아래 정지의 형상을 띤 인물이 등장한다. 이 형상은 인물을 지치게 한 모든 단계가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제 모든 힘을 소진했고 엎어진 채로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한편 인물은 알람을 듣고 일어날 채비를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날이 밝았기에, 그는 덮었던 것을 바닥으로 끌어 내리고선 모든 근육을 깨우고 있다.
무엇보다 이 장면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모든 표면이 벗겨져 근육과 뼈가 드러난 내면의 표현이다. 이는 네소스의 독을 제거하고자 피부를 찢어 벗겨낸 헤라클레스의 역량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후의 작업에서 정의철은 표면의 전복을 형이상학의 시선으로 추상화하지만, 여기서 그는 표면을 탈피하는 것에서 그친다— 이 형상이 소진 이후의 정지인 경우, 인물의 침전은 그가 스스로를 주검과 가까운 고갈로 몰아갈 만큼 격동의 운동을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을 증빙한다. 역량은 힘의 너비로 측정되지 않는다. 외려 크기는 제 생명을 얼마큼 제물로 하는지에 대한 깊이로 검증된다. 모든 살갗을 제하고 핏물마저 마르는 죽음에 이르는 깊이가 인물이 지닌 힘을 표현한다. 반대로 그의 정지가 기상을 위한 웅크림을 나타낼 때 그의 역량은 이 정지 이후의 모든 단계를 소화할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인물은 이 몸으로도 일터에 나아가야만 한다. 정지는 인물을 주검으로 만든 과거로도, 주검을 디딘 미래로도 진행시키므로 비결정적이다. 그렇게 전후사前後史의 생 전부가, 정지가 만들어낸 비결정성에 의해 신체 안으로 집결한다. 생을 모색하는 몸은 이런 것이다. 정의철은 그렇게 나선다.
⟪낯선시선⟫(대전 이공갤러리, 2018)에서 우리는 비로소 생의 더미를 만날 수 있다. <Unfamailiar> 연작(2017~2018)에서 낯은 더 이상 윤곽에 의해 일관된 선분으로 구획될 수 없으며, 어떤 면도 자신의 넓이를 지킬 수 없이 서로에게 침투하거나 범람하며 흘러내린다. <Unfamailiar 50>(2018)을 하나의 낯으로 환원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시선은 이를 얼굴이라 인지하면서도, 개체 하나하나에 시선을 주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분주해진다. 만약 형상이 최종적으로 얼굴로 판정된다면 그것은 얼굴을 구성하는 일반적인 요소 눈, 코, 입 등이 결합하기 때문은 아니다. 여기엔 이들이 이목구비가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가 차고 넘친다. 도리어 이 형상이 얼굴로 판명나는 까닭은 이런 것이다. 얼굴이 경험으로 구성된 시간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 희로애락을 아우르는 복수複數의 감정이 흐를 홈을 지닌다는 것. 의지가 품는 표정을 감추거나 드러낼 주름이 새겨졌다는 것. 그러니까 삶이 여기에 있다는 것. 외풍에 의해 흔들리는 나뭇잎이 제각기 다른 곳을 향하면서 나무라는 전체를 만들 듯, 이 요소는 제각기 행위하며 얼굴에서 멀어져가며 낯을 생성한다.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은 얼굴 가까이에서 본 세세한 변화가 아니었는가. 행복과 사유, 각오, 결단 등의 순간은 떨리는 몸, 입술의 오므림, 좁아진 눈썹, 일시적인 주름일 뿐이었다.
낯 가장자리의 흐름은 하부를 향해, 반대로 중심의 흐름은 상부를 향해 나아간다. 어떤 것들은 너비를 확장하지만 다른 것들은 좁아져 간다. 몇 개의 것들은 이동하는 데 주력하지만 이외의 것들은 적재되는 데 신경 쓴다. 이’들’은 얼굴이라는 단 하나의 구상이 아니라 무분별한 개체들의 집합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작가는 정체와 유동, 굳음과 깨짐으로 잇달아 발생하는 줄기 중에서 어느 것 하나 통제하거나 의도할 수 없다. 자신들만의 표현, 욕망, 느낌, 분위기,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그들에게 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획책한 이들에 누가 멍에를 기입할 수 있을까. 출생의 뿌리도, 기입된 목적도 소거되거나 부재하는 순간. 제각기 운명의 키를 지니고 제멋대로 활개치는 개체들은 사물이 될 리 없다. 여기에 작가나 작품이 투신하는 예술의 자율성에 관한 질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삶의 무한한 표현들을 자율화하고 그것이 보이도록 만드는 것—보도록 만드는 것—에 관한 질문이 존재할 뿐.
개인전 ⟪나를마주보다⟫(갤러리밈, 2019)에서 정의철은 거울의 비유를 도입한다. 그림 속 형상의 반전을 증빙하듯, 그는 제일 먼저 제목의 일부를 뒤집어 놓는다. 존재는 거울을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을 테지만, 이는 전부가 아니다. 거울이 지닌 가장 강력한 서사는, 자력으로는 불가능했던 신체의 조우를 주선한 매체가 종국에 상에 비친 이를 배반한다는 것이다. 거울은 존재를 비춰내지만 전부를 담지 못한다—혹은 거짓으로 담아낸다—. 비극적이게도 존재는 거울 속 상像이 ‘나’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 거짓이 ‘나’라는 상정을 통해서 자아를 형성해야 한다. 결국 그는 거울 속 무언가를 자신이라 지각하는 동시에, 이를 부정해야 하는 모순에 다가간다. 존재는 자아가 ‘있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안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란 의혹에 시달려야 한다.
작가는 화면 위로 반영된 신체의 상에, 그가 모를 사이 포함됐을 거짓을 의식한다. 따라서 기존 작품에서 신체 위로 확신했던 삶의 현전은 한 걸음 물러난다. <쉼_12>(2019)의 인물은 <Unfamiliar 11>(2016)와 같은 정지의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그전엔 보이지 않던 표면이 회귀해 있다. 소진의 절정에 도달할 역량을 지닌 생과 그 절정 이후로도 존재하는 생에 대한 확신은 약해져 있다. 무엇보다 <손이 낯이다_110>(2018)과 <낯선얼굴_20>(2019), <그리운 낯_29>에서 손가락만은 과거의 작품과 다르게 삶을 내보이기를 그만둔 듯 명료한 윤곽에 의해 그려졌다. 이 손들은, 흘러내리고 솟아오르는 것으로써 무분별하고 개별적인 자유를 선보였던 그 신체의 일부로 그려지지 않았다. 삶을 지님으로써 어렵게 ‘손’이 되었던 그것은 이제 손의 형태를 지니기 때문에 쉬이 손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는 쉽게 판단되어선 안 된다. 작가는 생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선, 미뤄왔던 정의철의 작업 과정에 대해서 비로소 이야기해야 한다. 관객은 그의 그림을 캔버스 위에서 만나지만 화면은 애초에 필름지에 그려졌다. 작가는 투명한 필름지에 두껍게 물감을 칠하고, 그것이 마르면 떼어내 캔버스에 붙인다. 이때 작가가 캔버스 위로 노출하는 것은 그가 기획했던 앞면이 아니라, 기획된 적 없었던 뒷면이다. 시각적인 마티에르는 손이 닿자마자 거울 속 존재에 대한 믿음처럼 일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높거나 낮도록, 넓거나 좁도록 활개쳤던 신체의 삶들은 회귀한 표면과 윤곽과 함께 이제 평평하게 균질해진 것마냥 보인다. 그러나 드러난 뒷면은 도리어 더는 볼 수 없는 앞면을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오직 연상, 상기, 추리 등의 형이상학적인 방법을 통해 도달 가능한 곳에 뒷면이 위치한다. 작가는 활개쳤던 신체의 삶들을 영원히, 결코 빛바래지도 닳지도 않는 곳으로 옮겨 놓았다.
삶은 표현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진실은 그것이 참으로 진실인 한에서 표현으로 담아낼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설피 진실을 표명하기보다 진실이 거주할 구조물을 구축해야 한다. 작품의 뒷면은 삶이 은닉되면서 보존되는 장소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그러니까 닿을 수도 확신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해서 작가는 침묵을 지키는 대신 그것의 ‘있음’을 지켜내기로 한다. 이성에 따르는 학문에서 어떤 주장을 진실로 만드는 것은 근거의 존재다. 참 증거가 있기에 그 주장은 인정된다. 그러나 예술이라면 증거가 없더라도 그것을 애써 믿어볼 줄 안다.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없기에 유신론에 가담하는 것. 이는 오직 예술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작가도 여기에 가담했을 것이다. 그는 대상을 그리는 대신 대상의 위치를, 대상을 제외한—그러나 그렇기에 대상을 둘러싼— 배경을 빈틈없이 그린다. 삶은 거짓되었다는 위협으로부터 작가는 텅 빈 공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배경으로 빨려들어 가지 않는 저 미지의 뒷면에 삶을 위치시킨다. 거기에 삶은 내내 있을 것이다. 정의철의 초기작부터 뒤집어져 있던 뒷면은 거울과 결합하면서 신체의 내재적인 정립을 비로소 완성한다.
개인전 ⟪오롯이 나에게⟫(대전 갤러리고트빈, 2020)에는 작가의 미소가 담겨 있다. 존재가 신체를 내재적으로 정립한 후, 그에겐 이제 마지막 과제가 남는다. 이제껏 정의철이 헌신했던 신체의 내재적인 정립은 외부와 교섭하지 않은 독립적인 규명에 해당한다. 그것은 외부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의 자발성을 증명하지만, 존재의 권능을 설명해주진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유아가 거울에 비친 상으로부터 자아를 자각한 뒤 외부의 물건을 밀고 부수고 삼키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듯, 스스로 신체를 확인한 존재는 이제 삶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외부에 출몰해야 한다. 따라서 숲(<이 숲은 마음이 빽뺵하다> 연작>, <나의 본연의 숲>, <언제어디서무엇을어떻게/일어나>), 산(<이 산은 마음이 빽뺵하다>, <위로>), 하늘(<하늘풍경>)처럼 외부의 처소가 처음으로 정의철에게 등장한다. 그리고 주제와 형태는 반복된다. 우리는 신체의 형상과 다르지 않은 외부의 풍경을 만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반복했던 만남을 여기서 또 한 번 되풀이한다. 신체가 거주하며 살아가는 곳. 그렇기에 거기에도 삶이 있다.
동시대 안에서 수없이 의혹과 반론에 휩싸이는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과 달리, 자연과학의 진리는 적어도 패러다임의 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게다가 더는 공백이 남아 있지 않은 흔한 것들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반대로 그 흔한 것들에 의혹과 반론을 품는다면 발끝의 의심은 진리의 머리를 쥐고 흔들 것이다. 세상의 논리가 일괄적으로 명령한 초록, 갈색과는 다른 이색異色을 띤 나무, 구획되지 않은 하나의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각기 다른 공간을 펼치려는 하늘, 그리고 수평이었던 태초부터 더 없는 높이를 지닌 오늘까지 영겁의 시간을 한 번에 보여주겠다고 솟아오르는 산. 이들은 좀처럼 물음하지 않았던 것들에 의혹과 반론을 제기한다. 그들은 굳어진 진리에 종속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일부의 예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예외’들’이라는 것. 외려 진리는 ‘전부가 예외’라고 선언하려는 것일까. 낯이 제각기 운명의 키를 지니기에 사물이 될 리 없듯, 자연 역시 사물이 될 수 없다. 자연 역시 삶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머리까지 흔들렸던 진리는 새 답을 옹립해야 한다. 말했듯 패러다임의 이동까지 자연과학의 진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의 신체는 동질하게 활개치는 삶을 지닌다. 그러므로 세계 그 어느 것에서도 삶은 존재하고 만다.
3
내 몸이라 하지만 내 손에 닿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나의 뒷면, 등을 당신은 ‘여기야? 여기야?’라고 물으며 헤집을 테지. 내가 웃을 때 이빨이 몇 개인지, 이따금 어디에 흰머리가 올라오는지, 어느 쪽 턱을 괴는지는 타인이 아니라면 모두 손가락 사이로 흘러 빠져나가는 생이다. 그런 것들이 놓침 없이 남았을 때, 우리는 인간인 것이 확실했다가 아니었다가 하는 점멸을 반복한다. 기록과 흔적이 존재의 의무라는 말은 기록과 흔적을 남겨야 하는 주체의 의무이지만, 그것들을 부러 찾아 줄 다른 존재에게 의존된 일이기 때문에 타인의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타인의 낯을 기억할, 그로써 타인의 생을 사물로 전락시키지 않을 책무가 존재한다. 나는 안다.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지 않았던 사람들이 내 대신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표현 대신에 위아래로 흔들리는 어깨로 슬픔을 찾고, 내려앉은 시선으로 망설임을 찾는 일. 그리고 그것을 모른 척하지 않는 일. 서로의 생은 서로만이 지켜줄 수 있다. 그러니 나는 다시 안다. 오늘 밤 누군가 얼굴을 그리고 있다면 이로써 다른 누군가의 생도 시작되리라는 것을.
정의철의 작업은 시선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를 생을 표현하도록 발명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며, 생을 신체의 자리에서 지워버린 세상을 바꾸려는 원대함을 더더욱 지니고 있지도 않다. 얼굴이 빠져 있는 세계. 이러한 낯의 부재 앞에서 차라리 존재의 전락을 교사한 세계를 탄원해야 했을까. 그러나 정의철은 한사코 죄책을 보는 이에게 물었다. “사실 얼굴이 전부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얼굴만을 절대적으로 평가하면서, 오독하면서 산다. 얼굴이 한 개인의 모든 것을 대신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작품이 문제 삼는 시선을 만든 세계(의 이데올로기) 대신에 그렇게 ‘봄’ 자체와 먼저 싸운다. “시간이 지나고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얼굴을 보지 못하는 시선을 탄핵하고 또 다른 시선을 발명해야 한다는 것. 이는 작가가 넘어서려 하지 않았던 한계일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의 계발에는 제도와 체제의 변혁과 함께 다른 과제도 있을 줄 안다. 바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일이란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일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그의 작업 이후에 세계가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다. 그러나 그 세계를 사는 이들이 바뀌는 일이라면 기다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이여. / 조재연
참조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8
심혜련, 『아우라의 진화』, 이학사, 2017
자크 랑시에르, 박기순 옮김, 『아이스테시스』, 2019
정의철, ⟪낯설다⟫ 전시 도록, 2016
정의철, ⟪낯선시선⟫ 전시 도록, 2018
정의철, ⟪나를 마주보다⟫ 전시 도록, 2019
정의철, ⟪오롯이 나에게⟫ 전시 도록, 2020
이 글은 ⟪Look at me now⟫ 도록 게재를 위해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