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_백지훈: Nontype

백지훈, ⟪Nontype⟫, 비영리공간 싹, 2020. 전시포스터

1
확실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기에 의심이 가해진다 전해지지만, 때로는 확실히 믿기 위해서 절박한 마음으로 시험에 들게 한다는 것도 있을 줄 안다. 그러니 폭발은 미움 없이도 일어나는 법이다. 그것이 산산이 부서지기를 바라는 저주 같은 동기란 가지지 않고, 외려 그 폭발 이후에도 무언가 남아있기를 바라고 있다. 노도 치는 불길과 귀청을 찢는 폭음에도 기꺼이 버틸 수 있는 어떤 것이 저 재 위와 잔해 아래에 남아있기를.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비로소 본질이라고 할 수 있거나 핵이라고 여겨질 무언가를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엔 있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치장이나 세련됨을 위하여 겹쳐있었고, 어느새 독을 흘린 것 마냥 악취가 나 그것을 제대로 보는 것조차 힘이 겨운 때가 있었다. 의심하는 자가 생겼고, 믿지 못하는 자가 생겼다. 그러나 믿고 싶기에 폭발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심술궂기보다 말했듯 절박함에 서리어 있다. 백지훈의 ⟪Nontype⟫(비영리공간 싹, 2020.11.14.-27.) 을 보면 그런 마음이 떠올랐다. 분명 여기에 무언가 남아있어라.

분할이라면 경계가 매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경계는 산탄에 할퀴고 찢겨져 투박하다. 콜라주였다면 흰 배경이 동반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상 주변에는 그것의 원래의 배경이었을 흰 바탕이 동행한다. 더욱이 의미로 여겨지지 않았던 흰 바탕의 여백들 역시 따로이 모여있다. 이들은 틀림없이 폭발 후의 잔해들이다. 폭발은 일어났고, 그 잔해들을 백지훈은 모집하거나 조합했다. 그러나 잔해들을 불러 모음이 폭발 이전의 온전한 모양으로 돌아가기 위함은 아니다. 미술은 제조나 조립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퍼즐처럼 이전으로는 돌아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돌아가지 않기 위해 작업을 파산시켰다. 현대 예술의 역사는 곧잘, 금기들에 대한 위반과 그로써 예술 안에서 가능한 것과 금지되는 것들을 모두 탈주하며 자신의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확장과 변천을 거치더라도 유지되는 본질은 무엇일까. 폭발 후에, 소각된 것 이외의 잔해들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2
⟨nontype_02⟩ 연작의 정렬은 다시금 그의 폭파가 형상들의 분할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머리, 가슴, 배와 같은 배분으로 나뉘지 않는다. 외려 그들은 미술의 본질적인 점, 선, 면, 농담, 색 그리고 바탕 등으로 나뉜다. 나뉘는 것은 부분이 아니라 층위다. 점은 미립자에서부터 담아낼 수 없는 먼 행성으로 도달할지도 모른다. 선은 비율을 분할했던 선으로부터 투시선을 지나 추상의 감정까지 관통할 궤도를 모두 그릴 수 있는 것 같다. 색은 인간이 가닿지 못할 검은 바다로 갈 수도 있고, 반대편의 빛이 가지 못할 창공의 끝자락으로 향할 수도 있다. 바탕지는 양피지에서 껌종이와 캔버스 그리고 도화지 모두를 찢으면서 질주할 것이다. 이 문장들이 모두 미래형으로 쓰이는 것은, 언급한 모든 것들이 담길 수 있는 그릇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오직 반대에 있다. 글은 언급한 모든 것들이 잠재하고 있는 씨앗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그런 한에서 ⟨nontype_02⟩ 연작은, 사조나 의식으로 구분되었던 미술사에서 그것들을 모두 검토할 수 도 있지만, 그들 중 어느 것도 시작하지 않은 응결물이다. 모든 것들을 발화시킨 후 맺힌 결과점의 응결물이자, 그것을 용해해서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응결물. 모든 것의 출발이면서, 모든 것을 지난 후에도 하나로 축약될 수 있는 이것은 오직 ‘그린다’라는 행위이다. 양압과 음압이 교대한 후폭풍이 지나간 여기, ‘그린다’라는 행위만 남아 있다. 이 연작들 속에서 대상도 주체도, 구체도 추상도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주제도 찾아볼 수 없는 느낌은 여기서 나온다. 그것은 마치 “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만 있을 뿐.”이라는 곰브리치의 중요한 첫 문장에 대한 이견처럼 보인다. 미술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린다는 것이 있을 뿐. 오직 그리는 행위에서만, 그리는 동안에서만 미술가는 미술과 함께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특히 ⟨nontype_02_12⟩는 어느 것도 물질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린다’라는 행위가 폭발 이후에도 남아 있을 수 있는 완고함을 지녔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그리는 것은 단순히 빈 여백을 개입해 들어가는 물질적 침식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간의 침식임과 동시에 공간을 생성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nontype_02_12⟩에는 오직 점, 선, 면 등의 영역 경계의 외부만이, 다시 말해서 그들이 창출해낸 새로운 공간만이 집적됐다. 무엇도 그리지 않은 공간은 무엇이든 그릴 때만 생성된다. 미술이 출현하기 전 여백은 그저 공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이 출현한 이후라면, 즉 ‘그린다’라는 행위가 단 한 번이라도 존재하였다면—후에 세상에 모든 미술품들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여백들은 그저 공란이 아니라 그린 것이 생성한 바탕으로 또 채워질 배경으로 위상은 달라지고야 만다. 그림들이 사라져도 ‘그린다’는 행위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외려 그것들이 ‘그린다’는 것을 지속시킨다.

그린 후에는 늘 노폐물이 남는다. 색을 풀거나 씻어냈던 물, 습작의 종이들 그리고 흔히 펜똥이라 지칭되는 것까지. ⟨type_n⟩ 연작은 그리는 행위가 지속되거나 종결되는 와중에 발생된 그런 노폐물을 닦아낸 것처럼 보인다. 다른 작업과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면 잔해들이 겹겹이 집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예외적으로 하나의 바탕지 위에 있다. 그리고 이는 폭발 속에서 잔존한 본질을 발견하려고 했던 작업과는 다르게, 폭발의 대상도 되지 못했던 제외한 예외들을 모집했기 때문이다. 폭파에는 심술궂음보다 절박함이 있을 것이라 적었다. 그 절박함이, 넝마들마저 모이게 했을 것이다. 결국, 폭발의 잔해물 속에서 타버리지도 부서지지도 않은 본질을 발견할 수 없게 돼버린다면, 그것은 이 넝마 속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버려져 있으리라. 물론 그것은 가능성이 큰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리는 것에 대한 그리는 자의 태도는 남는다. 그리는 자에겐 ‘그림’의 넝마마저도 절박하고 소중하다.

3
첫차를 기다리는 이가 모두 새로운 아침을 시작하는 이인 것은 아니다. 차마 막차를 탈 수 없었기에 기다림을 재촉하며 첫차를 꼬박 기다리는 이도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이 꼭 시대에 대한 은유 같을 때가 있었다. 막차는 지나간 시대의 마지막을, 첫차는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면, 새벽을 꼬박 버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지난 시대와 단호히 단절을 맺지 못하고, 새로운 시대가 오고서도 지난 시대의 무언가를 소실시키지 않고 지속하려는 이일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의 예술이 모든 것을 혁신하려고 하면서도 그것이 여전히 ‘예술임’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새벽을 꼬박 버틴 이가 보존한 것이 있기 때문임을 알고자 한다. 예술은 결국에 지난 것을 모두 폭발시키며 다음 시대를 이행한다. 그러나 그 폭발에 유감이나 심술을 담는 것이 아니라, 폭발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을 기꺼이 믿으며 폭발에 참여하곤 그 잔해를 끌어안는 이가 있다. 그는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리는 것보다는 그리는 것이라는 소박한 본질에 영영 메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미술은 이다지도 남는다.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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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비영리공간 싹의 ‘싹수 프로젝트’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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