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억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흐르는 구름과, 눈을 껌뻑일 때마다 쏟아지지 못해 기우는 달이 있는 밤들이라면 망각은 기억을 쉬이 앞질러 갈 터였다. 그러고도 믿지 못하여 낡은 서랍 깊숙이 넣은 사진을 조각조각 내어 버렸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숨이 남아있을지 모를 심장을 태우는 일이었다. 심장 타는 냄새가 새벽 내내 났지만, 아침 안개가 그것을 머금곤 해가 뜨자마자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괜히 타고난 자리, 지글지글 끓던 곳을 정말 다 타버렸을까 보았을 때 그 자리엔 그을음조차 없었지만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비로소 내가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을 통해서야 기억할 수 있던 것이었고, 기어코 사진조차 없이도 선연히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온전히 내가 얻게 되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날 밤, 나는 어렴풋한 것들을 내어준 대신에 지울 수 없는 것들을 새로 확인한 셈이었다. 그렇게 망각만이 내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때서야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파열의 발견만이 내가 어디서 온 이가 아니라, 여기서 시작해야 하는 이임을 알려주었다.
이제는 한 존재의 결정結晶을 영혼으로 규정할 수 없기에, 영혼을 대신하는 것으로 기억이 내세워진다. 존재가 삶을 살아내면서 삶에서 도출해내고 보존시켜온 응결물인 기억은 어떤 그가 왜 ‘그’인지를 알려준다. 따라서 기억의 반대말인 망각은 한 존재의 정체를 위협하는 적인 것처럼 드러난다. 어떤 인물이 기억의 일부 혹은 전부를 잃은 것이 사건이 되고, 그것을 불현듯 쟁취해내면서 진실을 성취하는 결말의 서사는 어렵지 않게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개체들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문제는 그들이 공동의 기억에 머무른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때의 기억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무엇을 기억하느냐의 문제가 곧 어떤 공동의 정체를 가질 것이냐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러한 수행은 개체로서나 공동체로서나 모두 망각을 적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기억은 늘 주어지고 경험한 전부를 가리키지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대상의 일부를 기억하고, 동등하게 일부를 망각한다. 다시 말해서, 망각만이 무엇을 기억할지 결정해준다.
망각만이 무엇을 기억할지를 결정해준다면, 망각은 기억의 적이 아니라, 기억과 배후적으로 동의어이거나 연대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망각이 존재의 정체를 위협한다 쉽게 단언해서는 안 된다. 언급한 것처럼 존재는 그가 지나온 시간이 생성해 낸 현재이며,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미래이다. 이때 망각한다는 것은 그가 망각한 만큼의 세월을 그에게서 들어낸다. 즉 과거 없는 현재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것이 곧 과거와의 단절로 인한 존재의 탈루脫漏나 결여를 의미하지 않는다. 외려 이는 과거보다 현재에 시간의 앞자리를 내주는 것에 가깝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그것이 이루는 미래마저 불명료하게 하며, 시작과 끝의 지점을 모호하게 한다는 점에서 존재를 현재에 고정시킨다. 즉 삶도 죽음도 아닌 존재로서 삶에 처하게 만든다. 또 그것은 존재를 스스로가 누구인지 온전히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과거도 미래도 없는, 정신도 육체도 상관없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를 입증해야 하는 즉자적卽自的 존재인 동시에 기투적企投的 존재로 이끈다. 그러니까 과거에 의거한 존재는 이제 스스로 현존해야 하며, 원한적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는 스스로를 다시 그러나 새롭게 세상에 던져야 한다.
남지연의 《Story(story)story))》(갤러리 H, 2020.5.13.-5.26.)는 기억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이야기’로 지칭한다. 이 지칭으로 전시는 ‘기억’을 ‘망각’과 동등히 다루거나, ‘기억’보다는 ‘망각’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억이 없는 자리, 즉 망각의 자리에서 지금 여기 현재를 위한 기억의 새로운 이름. 그것이 ‘이야기’다. 그에게 기억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정보이거나, 되불러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떠오른 회상과 잊혀진 실념失念의 조합에서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왜곡”이란 단어를 “해석”이란 단어와 차별하지 않고 있다. 기억에 의거한 것은 드물지 않게 습관일 뿐이다. 그것은 이전의 자리에서 해왔던 대로 움직이라고 존재에게 명령을 가한다. 하지만 현재에 시간의 앞자리를 내어주었을 때, 기억이 망각과 다르지 않음이 인정되었을 때, 기억을 딛고 망각에 도달했을 때, 그러니까 주어진 것을 딛고 해석과 차별되지 않는 왜곡에 기쁘게 도달했을 때, 존재는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난 현재를 향유할 자유를 성취한다. “Story(story)story))”를 남지연은 “이야기의 이야기의 이야기”로 읽는다. 기억과 과거를 보존하고 수호에 앞장서는 자들과 달리 기억은 이야기가 되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그것의 왜곡을 막고자 괄호를 부여할 테지만 이야기는 또다시 왜곡되어 이야기가 될 터이다. 그것은 존재가 ‘현재’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이야기의 이야기”는 이렇게도 들린다. 현재의 현재의, 또다시 삶을 위해, 현재.
2
남지연은 그렇게 기억과 망각이 동등히 존재하는 것을 통해 도달한 현재를, 즉 이야기를 감각화한다. 그리고 나는 이 감각의 형태를 또 하나의 원근법으로 부르고자 한다. 미술 특유의 원근법의 전통은 모든 것을 관찰자의 눈에 집중된 형태로 드러낸다. 이때의 시선은 두 개의 눈이 아닌 가시적 세계의 중심이 된 하나의 눈이다. 끝을 알 수 없는 하나에 집중된 소실점으로부터 각 모서리를 향한 가상의 선들 위로 세계의 모든 사물과 존재는 정돈된다. 그리고 이 정돈은 세계의 중심이 된 하나의 눈, 즉 관찰자를 위한 정돈이다. 관찰자에게 가까운 것은 크거나 짙게, 먼 것은 작거나 옅게 나타난다. 세계의 일부일 한 인간의 한쪽 눈조차 세계 전부의 중심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형식이지만 초기 르네상스의 열망의 내용을 표출한다.
그리고 기억의 원근법이 더해진다. 기억의 원근법은 수용된 모든 것을 존재의 내면에 집중된 형태로 드러낸다. 이때의 시선 역시 두 개의 눈으로 구성되는데 하나의 눈은 과거를, 하나의 눈은 현재를 바라본다. 그리고 소실점처럼 끝없이 형상들을 빨아들이는 망각점이 있다. 한쪽의 과거의 눈은 이내 껌뻑인다. 그렇게 과거를 바라보는 눈이 현재에 앞자리를 내어줄 때마다, 하나의 집중된 망각점으로부터 뻗어나온 각 현재의 외부를 향한 가상의 선들 위로 세계의 모든 사물과 존재가 정돈된다. 이 정돈은 시간의 중심이 된 하나의 눈, 즉 현존재를 위한 정돈이다. 지금 여기를 위해 관찰자에게 남는 것은 형상을 갖는다. 그리고 지금 여기를 위해 관찰자에게 사라져야 할 것은 망각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시적인 삶을 사는 인간에게 기억은—특히 기록이란 의미에서— 시간의 영원의 향유일 것이고, 반대로 망각이란 경험한 시간을 영원의 시간 바깥으로 내버리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남지연이 표출하고 있는 기억의 원근법은 말한다. 무한히 뻗쳐 나갈 한시적인 시간 이후의 것은 시간의 주변에 불과하다. 무한한 시간에서 그 일부일 한 인간의 현재조차 시간의 전부의 중심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형식이지만 과거와 미래의 시간에 잠식당하는 현존의 열망의 내용을 표출한다.
⟨Pager text 1 ; 1-2-3-4-5-6-7⟩은 기억과 망각이 조합되는 과정을, 즉 기억이 이야기로 변천하는 과정을 연작의 형태로 드러낸다. 1945년 신문의 무선호출 수신기 광고와 기사는 그 정보를 그대로 따를 때 PC-삐삐를 통해 50자까지의 한글과 영문의 자유로운 문자 서비스가 실시되며, 그것의 이용료가 한 달에 14,500원이라는 것, 또 이를 위해 “골드 번호”를 미리 선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린다. 그리고 이 주어진 정보는 망각점을 통과함에 따라서 휘어지거나 번지면서, 흩어지거나 조각나면서 영원한 시간의 외부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현재의 시간과 가장 가까울 연작의 끄트머리 속에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1945년의 사실들이 선명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말로 서술하거나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이다지도 연기 같고 물결 같은 일렁임으로 남아 있다. 남은 것은 앞서 언급한 무선호출 수신기의 ‘정보’가 아니다. 우리는 결코 그날을 지나온 과거가 지금의 정체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남은 것, 혹은 —망각에 의하여 또 동시에 기억에 의하여— 형성된 것은 ‘정서’다. 이제 우리는 과거 없는 현재에 서게 된다. 과거 없이 스스로를 세계에 기입시켜야 한다. 50자 안에 담겼던 메시지들의 서랍은 출처도 내용도 알 수 없도록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졌기에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 남는다. 그날의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퉁명하고 쾌쾌한 분위기들. 저 일렁임에 그것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에 내가 지금 여기를 새롭게 살아내고 있음이 틀림없다.
기억의 공동체. 이 낱말은 공동의 기억인 역사를 바탕으로 형성된 공동체를 의미하고, 기억이 정체의 형성에 관련함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역사와 민족에 대한 생각이라면, 반대로 ⟨남북정상회담_워홀의 마오⟩는 기억해야 했으나 잊어야 했던・잊을 수 있던 것들을 다룬다. 역사적인 일이지만 미처 개인적 층위에 머물고만 것은, 역사로 기입되기 전까지 개인에게 기억의 의무를 부과한다. 특히 권력에 의해서 왜곡되거나 은폐가 가해진 과거사일수록 그런 의무는 강하게 부과된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라는 의미로 정돈된다면, 즉 국가 내지 공동체가 그 기억을 주관하게 된다면 개인은 기억의 의무를 벗고, 망각을 수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무지와 망각은 다르다. 현재를 구성한다는 것은, 기억 이후에 망각을 통해서 일렁이는 모습으로 남은 것들이, 정서로 남은 것들이 현존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이 좋았다’라는 말과는 거리를 둔다.
작품은 어딘가 그 충격과 관련된 장소, 인물, 상황들을 망각의 원근법 안에 정돈하고 있다. 그날 몇이 죽었고, 어떻게 멸절되었는지 낱낱이 기억한다는 것은 참혹한 일이다. 그날을 낱낱이 기억해서는 현재라는 위치에서 출발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과거에 대해 소극적으로 타협하거나 야합하려 한다는 평가를 벗어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말했듯 망각은 무지하고는 거리를 둔다. 그것이 없었던 일이 되거나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충격과 참혹함과 함께 살아감이란 개인에게 지극히 가혹한 일이거나 그 과거를 딛고 얻은 현재가 중요한 까닭이다. 제목에서 인용한 “남북정상회담”은 ‘그날’의 구체적인 참혹함에 대한 망각 이후에 나서는 행위였을 것이다. 형상으로 등장한 ‘마오쩌둥’의 일부도 그렇게 등장했을 테다. 참사라고 불리는 것들 이후에 다른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말처럼 야만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구체적인 기억은 없지만 일렁이므로 또 일렁임으로 참사에 대한 분노, 서글픔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 망각은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애달픈 조건이다. 그러나 현존에 대한 근원으로서 흔적을 여전히 간직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앤디 워홀의 실크 스크린의 조악한 인쇄 위로 사라진 구체적인 인상을 남지연은 망각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조악한 인쇄에도 남은 것들은 망각이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다.
⟨One image and five different stories_and another one⟩은 예술의 조건으로서 망각을 전한다. 영상 속에 텍스트들은 제각기 다른 서술을 하고 있으면서도, 일정의 교집합을 공유함으로써 반드시 ‘사실’이라고 불릴 것 같은 몇 개의 행위들을 설정한다. 사태는 오후 2시에 일어났으며, 여자는 전화의 수신인이고 남자는 발신인이라는 것, 그리고 2년만에 통화에서 오래전에 빌린 책을 다시 돌려받으려고 한다는 것까지. 교집합된 정보가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서 다른 서술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태가 정돈됨에 망각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만약 모든 진술이 일치하면서도 각 행위에 공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서술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공백을 추궁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다만 공백이 있어 사태를 다르게 보는 새로운 서술이 가능해지고, 그 추궁을 통해 의미와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즉 공백의 자리에 의미와 진실이 개입된다. 정보만이 존재할 때, 존재는 그곳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의미로 맺어져 있지는 않다. 그것으로는 어떤 의미도 진실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만을 말해 주고선, 왜 있었는지 무슨 의미인지를 전하지 않는다. 그러니 예술에게 망각은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의미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예술은 기억의 공백에 제조된 것들을 기입한다. 그렇기에 예술은 한사코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지 않고, 빽빽하게 메워지고 채워진 자리에서마저도 공백을 찾고자 분주했다. 그리하여 영상 위로 흘러가는 수많은 사태에 대한 제각기 다른 변주들은 의미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예술의 분주다.
3
사진은 어떤 사태가 과거에 있었다는 것을 가장 명징하게 증빙해주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사진 속의 피사체와 그것의 배경을 보면서 그날의 정황을 명료히 기억한다, 단 사진기 뒤로 있었던 모든 것을 정확히 망각하는 한에서. 우리가 사진 안에 담길 때 본 것은 렌즈이거나 렌즈 뒤에 있던 것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사진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보지 않았던 뒤편에 있던 배경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이때 사진은 인간이 가장 절실하게 망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열망의 표징이면서도, 동시에 도무지 망각에서 탈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운명의 표징이기도 하다. 망각과 가장 절실하게 멀어지려는 순간조차도 망각이 기억의 상수라는 것, 오히려 기억의 가장 예리한 조력자가 망각이라는 사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망각과 기억을 분획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간을 가련하다고만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 일찍 ‘예전부터 그랬다’라는 말을 배우는 인간이 ‘지금 여기’가 맨 앞임을, 언제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선언하는 생에 대한 의지의 표현인 까닭이다.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 그리하여 기억에 지지 않게. 존재는 과거에 지지 않을 것이다.
결코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출발지에 선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그리움도, 외로움도, 절망도, 그리고 꿈도, 사랑도, 희망도, 또 역사도, 문명도, 우주도, 세계도 지금 여기서 시작한다. 무한한 시간이 내 앞과 뒤에 너절히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맨 앞에, 정면에 있다. 《Story(story)story))》에 담겨 있는 기억의 원근법처럼 그것이 나의 외눈이다. / 조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