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 마이클 타이슨, 1987년 8월 인터뷰에서
1
너에 관한 모든 지혜를 얻었기에, 쌓아 올린 그 지혜로 말미암아 비로소 결별을 짓는다. 가장 아름다운 것과 가장 창피한 것을 동시에 나눈 우리는 이다음에 무엇을 남기게 될지 이제 알고 있다. 서로의 가장 헌신적인 것과 가장 추한 것을 교환해온 지금. 그리고 나는 네게 마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반대로 너는 내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충분히 노력했던 지금. 포말은 모래 위에 새겼던 모든 낱말을 이치가 예정했던 대로 지울 것이다. 잡고 있는 것보다 놓아주는 데 더 큰마음과 지혜가 필요하다지. 실험, 경험, 증명, 검토 그리고 결론까지, 시작점에는 탄생하지 않았던 현명함은 엇갈릴 이 날을 위해 이다지도 적재되어왔을까. 그러나 여기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우리가 성숙해지기 전, 사랑의 시작점에서 영원을 기약했던 순간과 새 삶의 출발점에서 혁명의 꿈에 젖었던 순간이다. 원대하고 급진적인 사유는 오직 성숙이 부재한 순간에 존재하고 맒을 천천히 깨닫고 있다. 결실 맺는 사랑과 도래할 혁명은 미래에 있다지만, 어찌하여 이룩과 번성은 그것으로부터 멀어짐을 만드는 것일까. 또 출발하지도 않은 채로 다른 목적지에 도착하고 마는 것일까. 시간을 거듭할 때 생기는 지혜가 무언갈 내려놓게 만든다면 차라리 걸음을 어리석음에 향하도록 돌린다. 거칠고, 미성숙하고, 비이성적이며, 비발전된 ‘시작’으로 돌아가 다시 네게 무엇을 ‘고백’하려 한다.
인류사 이래로 가장 많은 예술을 유통하는 시대. 그 어느 시기보다 많은 전시, 음악, 공연, 서적 등이 오늘의 세계엔 펼쳐진다. 그리고 이는 비단 양적인 일만은 아니다. 매번 새롭게 출생하는 작업은 그것이 이전 담론을 어떻게 뛰어넘었고 어떻게 다른지 작가와 비평가의 입을 빌려 누설된다. 안팎으로 선고된 죽음 앞에서 매번 새 몸을 가지고 부활하는 예술은 결과적으로 지금 여기가 가장 최선임을 말하는 셈이다. 그러나 가장 성숙한 예술이 창궐하는 오늘은, 과연 가장 아름다운 세계일까. 투명하고 명료하게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 대신 진실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 세계의 전부에 대해 함구하는 대신에 차이와 부분을 모색하는 것, 부정과 비판에 손사래 치며 저어하고 행복과 사랑으로 위무하는 것. 그렇게 자애롭고 포근한 인간의 얼굴을 한 예술을 앞에 둔 우리. 그러는 동안에 영영 떠나고 잃어버린 벗. 그러는 동안에 현명해지려고 부단히 애썼던 나. 그러나 지금의 지혜를 오랜 글과 삶에 비출 때마다 떳떳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헐어진 성터를 헤메이며 가슴을 쥐어뜯었던, 처음의 약속을 다시 떠올린다. 미거한 글로, 또 뻔하거나 순진한 투정으로 남은 이야기로 지금의 예술 전부와 대질할 수 없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나는 알고 있지. 그러니 비판 대신에 지난날의 약속은 어디 갔냐고 울음 짓는 연인처럼 그저 비명 지르려 한다. 비명이다.
2
말에서든 그림에서든 앞선 하나의 낱말, 하나의 색은 뒤에 올 복수의 낱말과 색을 예정한다. 마찬가지로 한 시대의 문학, 하나의 그림 다음에 어떤 것이 오는지 역시 수순을 따른다. ‘예술’이란 그것을 예술로서 보게끔 만드는 규범적 궤도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보란 것은 당연하다는 듯, 패러디와 비판의 방식이든 오마주와 계승의 방식이든 모두 한 장면의 미래를 이행한다. 대리보충은 원본을 부식시키면서도 원본(이 무엇인지)을 완성한다. 그러나 완성돼나간다는 이 ‘역사’에서 이행된 것이 무엇인지, 그의 공약이 얼마나 달성되었는지는 누구도 묻지 않는다. 이제 모두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혹은 ‘혁명은 어째서 오지 않니’라고 묻지 않는 것처럼. 이현수의 ‘시작’점은 여기에 있을 테다. ⟪난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EVERGREEN⟫은 미래가 아닌, 지난 정거장을 향해 길을 거스른다. 시작엔 누구나 과감하다지. 아그네스 마틴, 에드먼드 드 왈, 조르조 모란디, 사이 톰블리, 로니 혼 등 그는 원본을 인용하지만, 이는 ‘다음’의 쇄신을 위함이 아니다. 전시는 외려 원본을 습작 내지 에스키스의 형태로 돌이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작품은 원본의 성취가 아무런 말도, 색도, 형태도,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을 무지한 ‘시작’의 시점으로 역행한다. 정돈된 머리를 전처럼 헝클어트리고, 또렷하게 뱉도록 훈련된 말을 빼앗아 울음을 짖게 하며 그것이 처음에 무엇을 기약했는지만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그네스의 조각⟩의 시간은 아그네스 마틴이 작업의 구상을 끝내기도 전, 백 년의 시간을 훌쩍 거슬러 그것이 위태롭거나 보잘것없는 순간으로 되돌아가 있다. 기쁨, 순수, 사랑, 자유, 우정. 이 순진한 낱말은 마틴이 작업에 붙인 이름들이다. 그러나 차이나 타자, 존재 같은 것이라면 모를까 이 단어들은 이제 어떤 역량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이들은 그만큼 흔해빠지고 진부해졌다. 시작의 시점에서 이들이 과연 지루한 것이었을까. 혹은 이들이 시작되려 할 때 스스로가 과연 무료했을까. 아직 시작도 안 했을 때, 가치가 흔해질까 봐 두려운 적은 없었다. 외려 진부하다는 이유로 가치를 고백하는 데 인색해질까 두려워 떨곤 했다. 마틴의 미니멀리즘은 태그를 생략함으로써 저자를, 테크닉을 발휘하지 않음으로써 작품의 지위를, 마침내 형상을 외면함으로써 그림의 목적마저 제거해버린다. 미니멀리즘적 사유의 시작은 무엇을 뺄 수 있는지 고민하기보다, 아무리 감산하더라도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불변항을 발견하려 했을지 모른다. 그러니 마틴이 드러냈던 것은 감산의 역량이 아닌 제곱된 빼기에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끝끝내 지워버릴 수 없었던 저 제목들 ‘가치’의 목록이다. 어떤 사유, 서사를 발명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기쁨, 순수, 사랑, 자유, 우정이라는 순진한 결론으로 회귀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떤 기발한 발상이나 이야기도 결론에 이르러서는 고작 저 가치들로 그치지 않았나.
그러나 오늘날 창궐하는 스펙터클 앞에서 미니멀리즘은, 그것이 재현이 아니라 경험과 공간을 창조하려 했다는 세간의 평가로 쉽게 만족하고 싶다. 혹은 감산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 감산에 의해 떨어져 간 것들을 헤아리고, 총량을 재며 ‘이렇게나 많이 덜어낼 수 있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과는 다른 모습이다. 미니멀리즘 그리고 아그네스 마틴을 처음으로 돌이키기 위해선 이미 감산으로 앙상한 곳에서 다시 한번 감산을 제곱해야만 한다. 그때 비로소 가치는 더욱 순수한 응결물로서 모습을 드러내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떨어지고도 남은 것을 보게 할 것이다. 그로써 우리는 미니멀리즘이 시작의 시점에 무엇을 기약했는지 기억해내게 된다. ⟨아그네스의 조각⟩은 마틴의 작업을 밑그림 내지 에스키스의 형태가 될 때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마틴이 끝끝내 감산하지 않았던 것은 색과 형상. 그러나 이현수는 그것마져 그려지지 않았던 처음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로써 시간은 색마저 남지 않은 가장 큰 감산으로 돌아간 순간을 향해, 또 캔버스에 접근하지 못한 채 옹벽의 흔적으로 새긴 허무한 순간을 향해갔다. 샤프로 남긴 형상 또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리라. 그러나 이번에도 가치만은 줄지 않는다. 이것으로 우리는 또다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라. 이들은 영원히 시작되지 않아 영원히 지속된다.
장식에 적합하지 않은 울퉁불퉁한 표면, 입과 손을 대기엔 거친 마감, 무언가를 보관하기엔 물렁한 유토의 물성. 〈에드먼드에게 물레가 없었다면〉은 도예가 상품으로서 드러내야 할 그 어떤 것도 승낙하지 않는다. 여기에 보이는 것은 작가의 엉성한 손과 서툰 솜씨, 그래서 부단히 움직여야 했던 시간, 보잘것없는 재료다. 무슨 수를 쓰든 상품이 되지 못할 이 도자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호칭은 ‘예술’뿐이다. 그러나 작품을 외면할 길이 없다. 작자의 이름, 창작의 과정, 재료의 물성. 이 셋은 예술의 전부 아니었던가. 20세기 아방가르드가 외쳤던 ‘예술과 삶의 일치’라는 구호를 시작부터 실현하고 있었던 것은 공예였다. 도자는 삶의 가장 가까이에서 생이 거주할 공간을 보호하는 벽으로서 미술관이 아닌 일상에서 교환의 논리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밤을 지켰다. 장인의 미거하고 비천한 손으로 흙과 불의 괴로움을 견뎌낸 작품은 값을 치르며 교환되는 순간에도 공간의 한편을 장식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삶에 통합되도록, 그 삶의 표현에 동반하도록 스스로를 요구했다. 설령 장식장 한편에서 관음적으로 대우되더라도 거기서 빛을 발하고 있던 것은 비인격적이고 평등한 삶이지 계급의 표식은 아니었다. 도자는 장인이 길에서 주워 모은 보잘것없는 흙과 돌이 섞여 있고, 고귀한 삶에는 개입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진 하등한 정서로 빚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고귀함의 예외들은 그것이 거주할 고귀한 삶을 구성함으로써 평등해졌다.
도자를 소유한 사람의 기품을 구성하는 것이 미거한 장인의 손과 지난한 과정 또 비천한 재료라는 점에서, 그러니까 고귀함의 구성물이 고귀함의 반대편에 있다는 점에서 상반된 두 가치는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량 생산과 기계 공정 앞에서 이름, 과정, 물성은 모조리 제거된다. 이름? 그것은 이제 한 사람의 호칭이 아니라 팩토리의 브랜드가 아닌가. 과정? 그것은 장인의 손을 숨기기 위한 공정이 아닌가. 물성? 여기에 흙과 돌이 남아있어 보이기는 한가. 그렇다면 〈에드먼드에게 물레가 없었다면〉이 공예를 되감을 때 시작점에 회귀하는 것 역시 이름, 과정, 물성일 것이다. 작업의 울퉁불퉁한 표면은 계획을 온전히 실행하기에 부족하고, 지시를 서둘러 이행하는 데 뒤죽박죽이 된 손의 ‘과정’을 돌려놓는다. 장식적인 도자가 되기엔 한참이 부족한 재료를 확인시키는 물렁함은 작품의 ‘물성’을 되돌린다. 그리고 과정 및 물성에 결부된 비정밀과 조잡함은, 오직 그것이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을 작가의 생산물이라는 표식을 새기고 만다. 에드먼드 드 왈의 도자는 손으로는 형성될 수 없는 완벽한 곡선을 지니고 있다. 그의 도자는 거주 공간이 아닌 장식장과 결합함으로써만 완성됐다. 그의 매끈한 표면은 물질을 숨긴다. 그러나 이현수가 되돌린 물레가 없었던 시점. 사라진 모든 것은 회귀한다. 〈에드먼드에게 물레가 없었다면〉은 도무지 장식장에 들어갈 만한 것이 못 된다. 이 도자는 거주 공간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예술과 삶의 통합이란 오래된 약속에 다시 귀를 기울인다.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은 없다. 물론 물질은 존재하나 자체의 고유한 의미는 없다. 우리는 오직 컵은 컵이며 나무는 나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조르지오 모란디가 자신의 작품군 ⟨Still Life⟩를 두고 한 말이다. 그에게 정물화(Still Life)는 “시간을 초월하는 법”이었다. 유리, 사기, 금속 각기 다른 재질로 만들어진 대상들은 적어도 그의 그림 안에서 균일한 텍스처를 내보인다. 모든 것은 평평해져 있고, 여기엔 시간도 육신도 모두 사라진 것처럼 그림자조차 없다. 구체적인 사물들은 모두 추상적 개념으로 전환됨으로써 조르지오 모란디의 그림은 사물의 구체적인 낯과 상황을 넘어 추상적 본질을 모색한다. 따라서 ‘컵은 컵’ 그리고 ‘나무는 나무’라는 단언은 어떤 맥락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본질을 가리키는 의미로 읽힌다. 그러나 어쩐지 이현수의 ⟨모란디 파르페⟩는 사라져버린 구체적인 맥락이 모두 회귀해 있다. 쉽게 부서질 파스텔, 결국 굳은 채로 금이 갈 유채, 언젠가 흘러내릴 유토 등은 모두 상황과 시간을 초월하는 것보다는, 온 세월을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파르페는 언젠가 녹아 없어질 고작 일시적인 고체의 이름. 이 고체와 만났을 때 모란디의 그림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거기엔 사물과 그 사물이 놓인 세계의 영원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려 모란디는 세계의 영원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영원 앞에 놓인 세계를 말한 것이라고 돌이켜진 과거는 말하려 한다.
영원한 세계는 향긋한 말일지 모르나 어딘가 섬뜩한 데가 있다. 그 세계가 지옥이라면? 아니 그 세계가 지금 여기라면? 우리는 이 영원함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실 세계는 이미 영원한 것으로 간주된다. 수없이 반복되는 비극과 비애에도 바뀌지 않은 세계를 목도한 바 있다. 현재가 과거를 극복한 것이라면, 1991년 이후 시간엔 과거란 없는 편에 가깝다. 또한 미래가 지금을 부정함으로써 가능해진다면, —우리에겐 수정만 있었을 뿐— 부정이 시도된 적은 없으니 미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없음으로부터 우리는 세계에 환멸과 무기력을 동시에 느낀다. 극복과 부정의 역량을 지닌 주체는 사라지고 말았다. 반대로 주체를 되살리기 위해선 세계를 영원에 결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과 세계를 대조시켜야만 한다. 이현수의 작업은 원본의 시간을 되감는 것이다. ⟨모란디 파르페⟩와 ⟨Still Life⟩(1931)는 시간대가 다른, 같은 그림이다. 그렇다면 ⟨Still Life⟩는 영원한 사물이 아니라 ⟨모란디 파르페⟩에 가해진 영원의 시간 앞에서(이후에) 희미해진 것이 된다. ⟨모란디 파르페⟩의 다채로운 색과 각기 다른 재질은 영원과 대조될 때 시나브로 깎이어 ⟨Still Life⟩의 무채색과 균질한 평면을 갖게 될 것이다. 단단한 산맥도 시간 앞에선 물렁하다. 그것을 확인할 때 존재는 비로소 과거, 현재, 미래를 경험하며 세계를 변혁하는 주체로 형성된다. 주체가 약속하는 ‘영원’이란 그런 법이다. ‘컵은 컵’, ‘나무는 나무’ 이 두 존재 모두 다 사라져가는 것들 아닌가.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자율성이라면, 벽에 그린 낙서에서 그와 같은 것을 찾을 수는 없을 테다. ⟨Cy가 키우던 비둘기⟩에 예술가는 부재한다. 이는 비둘기가 펜을 물고 있어서는 아니다. 작품이 예술가 대신 비둘기의 자율성을 드러내는 것 역시 아니라는 점에서, 비둘기는 예술가가 다른 것으로 대치된 상황을 나타내지 않는다. 비둘기는 작가의 부재를 상징할 뿐이다. 이때 존립하는 것은 오직 명령과 주문에 어긋나지 않고 그저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던 사물의 ‘자율성’이다. 주어진 홈을 따라 흐르거나 중력에 따라 기우는 것은 ‘삶’이라 부를 수 없다. 이미 예술사 안에서 수없이 그어진 길을 저어하고 탈주를 감행하고 나서야 예술의 지위가 부여되듯, 주어진 홈에 다른 구멍을 내어 새로운 길을 만들고서야, 그리고 중력에 의해 무너지지 않고 무게를 지탱하며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삶’은 발생한다. 사물은 그것을 존재하게 만든 명령과 주문을 올곧이 따르는 한에선 삶을 내재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곳에는 정해진 목적과 규격만이 있다. 우리는 무슨 수를 쓰든 저 벽에 ‘벽’ 이상의 자유가 있다고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때까지 명령과 주문에 싸우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벽에 기입된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식들은 그 부재에 의구심을 만든다. 저 수많은 원이 예술의 산물이라면, 그 옆에 얼룩은, 상처는, 나아가 벽 전체의 모양은 예술(자유)의 산물이 아니고 대체 무엇인가.
사이 톰블리의 작업은 캔버스 안이 아니라 캔버스 밖을 향해 펼쳐져 있다. 어린아이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작가의 낙서는 캔버스를 투과해 야외의 미숙함과 교류한다. 수많은 원의 기입은 톰블리의 낙서와 같은 시내 곳곳의 무늬를, 사물을 바라보는 무정한 시선이 아니라 예술을 바라보는 의욕적인 시선으로 바꾸어 놓는다. 다시 말해서 낙서는 스스로를 예술화하는 대신 낙서의 주변에서 예술’적’인 것을 생산해낸다. ‘모든 것은 예술’이라는 공허한 메아리를 부르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명령과 주문으로 가득한 세계에 그것에서 저항하고 삶을 추구하는 것이 존재함을 기억하려 한다. 이미 처음부터 예술가는 예술이 아닌 모든 것—즉 예술적인 것—을 예술로 만드는 책무를 지니지 않았던가. 이현수가 환기하는 것은 이 최초의 책무다. 〈에드먼드에게 물레가 없었다면〉이 미숙한 손과 보잘것없는 재료로 예술의 지위를 돌이켜냈듯, 톰블리의 작업은 사물 내부에도 노동자의 비숙련, 비훈육의 산물, 즉 주문과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유의 존재를 입증함으로써 예술’적’인 것의 돌아옴을 만들어낸다. 이윽고 사물의 세계에도 자유가 발견된다. 반복되는 원의 궤적은 톰블리의 캔버스에서 완결되지만, 벽에서는 끝나지 않는다. 톰블리보다 더 많은 원을 그리고도 새의 부리가 연필을 놓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일 테다. 선분은 하나의 원과 다른 원을 이음으로써 동시에 삶이 끊어진 자리를 잇는다. 이를 위해 톰블리의 작업은 마땅한 시작점인 벽으로 돌아가 있다.
‘그림’이라는 낱말의 출처가 ‘그리움’과 같다는 말은 낭설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삶의 어떤 특정한 장면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고 느낄 때 기억을 대신하고자 그림과 사진은 남겨진다. 지금 이 순간이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기쁨과 함께, 이 장면이 사라져간다는 곤란함이 기록엔 들어 있다. 기록은 존재 증명인 동시에 다시 그것과 만날 수 없다는 부재 증명이다. 그러니 로니 혼의 근심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여행한다’는 개념보다 ‘동물이 이주’한다는 개념으로 이 땅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아이슬란드에서 경험한 빙하를 재현한 ⟨Water Double⟩(2013~15)엔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던 기쁨과 함께 다시 그곳으로 가더라도 같은 감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란 설움이 섞여 있다. 그리고 단순하게는 아이슬란드에 대한 그리움일 이 작품은, 더 짙게는 작가의 부재에 대한 절망과 함께 비춰진다. 작가는 한 작품을 내보임으로써 자신을 작가로 만들어줄 하나의 생각을 다시 쓸 수 없도록 소진한다. 어떤 것을 작품화하면 또다시 작품의 대상이 될 무언가가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신분을 증명해줄 소득증명서도 명함도 지니지 않는다. 전시가 끝나고 새로운 작업이 발표되기 전까지 남아 있는 것은 과거(작가였음)의 증명뿐이다. 작가는 늘 자신의 작업을 발표함으로써 스스로를 제거한다. 새로운 작품은 그렇게 늘 사라질 각오로서, 마지막 작품으로서 등장하는 법이다.
그리고 한 작가에게 새로운 작품이 마지막 작품으로서 등장한다면, 새로운 예술은 예술이 종말된 폐허에서 등장할 것이다. 예술의 창궐 만큼이나 숱하게 예술의 종언이 선언되는 것은 그런 까닭을 지니고 있다. 지금의 시간 이후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 이는 시간상으로는 가장 마지막에 있을 테지만, 수순적으로는 가장 처음의 위치에 놓인다. 이현수가 로니 혼의 시간을 되감으면서 맞닥뜨려야 했던 근심은 그런 것일 테다. ⟨Water Double⟩이 경험, 영감에 대한 박제로서 부재 증명을 이룬다면, ⟨다이소에 다녀온 로니⟩는 예술 자체에 대한 박제로서 부재 증명을 이룬다. 다시 말해서 ⟨다이소에 다녀온 로니⟩에는 ‘예술’ 자체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비참함이 앞당겨져 있다. 로니 혼이 투명한 유리 안에 경험과 영감을 꼭꼭 보존해 놓았다면, 이현수는 테이프 안에 이제는 없을 예술을 칭칭 보존해 놓았다. 누군가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사랑받아왔고 앞으로도 사랑받을 작품이 이미 존재한다. 새로운 시도가 무의미해질 정도로 새로운 주제는 등장하지 않으며, 오로지 같은 주제만이 새롭게 반복된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종언은 옳다. 그러나 그 결과 작품은 역설적이게도 영점(零點)에 닿는다. 새로운 건물이 지어질 공터와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는 양쪽 모두 비어있다는 점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그곳은 천지창조가 시작되는 시점, 말하자면 아직 공간도, 시간도 없었던 시점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모든 장소와 시간을 함축하는 시점이다. 이 공허함을 마다하지 않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폐허는 그로부터 모든 형태와 색채들이 탄생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3
해변을 거닐며 바라보는 바다와, 바다 한가운데를 떠돌며 바라보는 바다는 전혀 다르다. 아무도 수심을 일러준 적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았다. 청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었을 때, 바다를 알게 된 나비는 더는 바다를 향해 가지 않게 될 것이다. 꽃은 바다에 피어나지 않게 되고, 바다가 나비의 날개엔 가혹하다는 것을 알게 된 현명함은 이제 바다의 꿈을 기꺼이 저버리게 만든다. 현명한 이들이 ‘젊은 날 혁명을 꿈꾸지 않은 자는 가슴 없는 자이나, 이때를 지나도 바뀌지 않으면 머리가 빈 자’라 한 이야기가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어째서 현명함은 가장 급진적인 것부터 앗아가는 것일까. 어찌하여 현명함은 해야 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부터 늘려가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 나는 조금 현명해졌으니 마르크스 대신 케인스를 펼쳐 든다. 그러나 그의 시작에도 역시 “금리생활자를 안락사시켜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한참을 떠밀려간 자리의 시작에도 과단이 들어가 있다면 더 이상 속지 않겠다. 영원한 사랑과 혁명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 있던 것이니 나는 이미 그것을 갖고 있는 채(체) 할 수 있다. 그러니 기다리지 않고 시작하려 한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형식의 혼잣말에 대항하려 한다. 과격을 버릇처럼 굴겠다. 경멸을 일삼겠다.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다시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역시 금리생활자를 안락사시켜야 한다.
야, 내가 많이 변했냐. 이것은 늘 가슴 속에 맴도는 말이지만, 도무지 물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내 비겁과 작음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 타인의 긴 비극보다 내 짧은 고통에 신음을 내었던, 늘 어느샌가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던, 절박한 고백보다 불편한 자리에 온통 신경을 쏟았던 내가 어느 즈음에 ‘이제 그만두어야지’라는 말을 했을 때 당신은 물었다. 네가 운동을 시작한 적이 있느냐고. 그렇다면 운동을 무엇으로 알고 있느냐고. 늘 완결로 치달아 가는 삶에서, ⟪난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EVERGREEN⟫은 시간이 쌓아놓은 현명함과 성취들엔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시작으로 되돌려 놓는다. 전시를 통해 우리는 어디로든 가고 무엇이든 되고 어떤 것도 말할 수 있는 존재임을 계시해야 하는 용기를 요구받는다. 이현수는 한성우와 쓴 서간집에서 다음과 같이 쓴 적 있다. “우리 대화도 우리 그림처럼 미완성인채로 마무리를 하자. (…) 쓰다가 지워진 나의 드로잉처럼 완성이 되지 않은 상태, 너의 그림처럼 덮이고 덮여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일단 한 꼭지를 끝내놓고 나중에 시간이 좀 더지나서 그때다시 대화를 이어가면 정말 재밌겠다.” 지워지고,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있다면, 우리는 치달은 것과 쌓아 올린 것을 잃어버릴 염려보다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아 꿈은 거기에 그대로 있다는 기쁨에 기꺼이 젖을 수 있게 된다. 나의 시작이 바닷게처럼 내 삶을 뜯어먹을지라도, 해변으로 나가는 어두운 날의 기쁨을 누리려 한다. 친구야, 맹세하건대, 어떻게든 하얗게 되리. / 조재연
참조
김기림, 「바다와 나비」, 『女性』, 1939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칠 조심」, 『땅 위의 돌들 』, 정우사, 1996
신석정, 「꽃 덤풀」, 『신석정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문학동네, 2014
이현수, 한성우, 『바보들의 회화』, 페도라프레스, 2019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아방가르드」, 『지식인의 종언』, 문예출판사, 1993
자크 랑시에르, 박기순 옮김, 『아이스테시스』, 2019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이 글은 ⟪난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EVERGREEN⟫ 도록 게재를 위해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