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거리_문학의 이유

이중섭, <물고기와 동자>, 종이에 콘테, 10.1×12.5cm, 1952

이해한다는 말은 애초에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말은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 말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이유는 “내가 너와 같아질 수는 없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는 다행스러운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같아 질수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의 간극만큼 “이해는 하지만 용서는 못한다”라는 문법이 존재하고, 그 간극에 실례를 구하며 이해를 ‘양해’라는 말로 고쳐쓰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네가 나같아 질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그래서 상대를 나와 같게 만들려하거나, 상대를 나에 비추어 평가하려고 한다. 이 망각은 단순히 너와 내가 다르다는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 망각은 처음부터 ‘이해한다는 말’과 ‘같아진다는 말’의 목적지가 행동이 아니라 느낌을 향해있기 때문에, 그러나 늘 행동을 향해 걷고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나는 네가 어떤 커피를 맛있다고 하는지 알고 있다. 네가 어떤 남자(여자)를 좋아하는지 알고, 어떤 종류의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그것은 ‘행동’이다. 나는 “느낌”을 알 수 없다. 나는 네가 쓰디 쓴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의 그것이 너의 혀를 감싸는 것을 통해서 천천히 너를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그를 먼발치서 바라보면서 콩닥거림을 멈출 수 없었던 그 느낌을 모른다. 또 네가 좋아하는 그 영화가 네게 어떤 기억을 상기시키는지 그래서 네가 어떤 느낌에서 울었는지 그것이 네게서 무엇을 바꾸었는지 나는 도통 모른다.

그래서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내가 아는 느낌은 너의 온전한 느낌이 아니다. 내가 이해한 그리고 아는 느낌이란 내가 네가 갖는 느낌을 나의 경험에 비추어 되살려냈거나 혹시 내가 그런 경험을 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추측에 불과하다. 나는 온전히 너의 느낌에 닿을 수 없다. 너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말은 나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너에게 대입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슬픔이 혹독할 수록 너의 슬픔이 혹독해보이고, 나의 슬픔이 가벼울 수록 너의 슬픔 또한 가볍게 보인다. 내가 너에게 아는 것은 너의 행동일 뿐인데-그리고 너의 느낌이라고 착각한 나의 느낌일뿐인데- 이해한다는 말은 참 쉽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제외한 우리에게 타자가 되는 세계에 살기로 했는가. 타자로 남기로 했는가. 나는 이 물음에 문학의 이유가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결코 너의 행복, 슬픔, 즐거움, 사랑이라는 느낌과 나 사이에 도달 할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곳을 끝없이 그리워하며 서있었고 그 자리는 문학이었다. 나는 네가 그립다는 느낌이 네게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너무’나 ‘엄청’, ‘무지’라는 수식어 대신 “얼굴 하나야/손바닥 둘로/폭 가리지만/보고 싶은 마음/호수만 하니/눈 감을 수 밖에”(정지용, 호수)라고 표현했었고, 나는 사랑을 잃은 나의 처연함이 네게 온전히 전달 될 수 없기 때문에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기형도, 빈 집)라고 노래하기로 했다. 이런 정서뿐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가난의 느낌을, 때로는 시대의 느낌을 전달했다. ‘너무’나 ‘엄청’, ‘무지’라는 수식어가 너에게 가는 느낌을 채우지 못할 때마다 문학은 와서 그자리를 메웠다.

그래서 삶 혹은 생명의 유지하고는 전혀 연관되지 않으면서도, 영화나 극보다 화려하지 않은 문학이 여전히 우리의 언어를 확장시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존재한다는 것은 인류가 타자를 타자로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또 낯선 것을 끊임없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증거다.

다시 이해한다는 말로 돌아가자. 이해한다의 방점은 지금까지 쭉 얘기했던 것처럼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없다는 것만에 방점을 찍지도, 의미하지도 않는다. 방점은 “그렇지만 내가 너를 도울게”에 찍혀있고 오히려 그것을 의미하기위해 존재하는 말이다. 우리는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정의 거리에서 멈추고 거리를 두는 것은 미련하면서도 몹쓸 짓이다. 같아지는 것에 강박하는 것은 누군가를 소모시키거나 획일화시키지만,  멈추기만해서도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등을 돌리거나, 소외시키는 일만 일어날 뿐이다.

그래서 이 기다랗고 지루한 글 끝에 비로소 ‘너’에게 ‘나’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너’와 같지 않지만 그래도 ‘너’를 돕고 싶다는 것이다. 오늘도 같지 않아서 획일화되거나, 소외된 ‘너’에게 아직도 도와줄 ‘나’가 많다는 “사실”을 알리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증거는 수많은 ‘나’, 인류에게 문학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으로 삼고 싶다. / 조재연

*참조
–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거리_문학의 이유”에 대한 2개의 생각

    1. 안녕하세요, 작가님.
      신촌에서 뵀었죠? 🙃
      엉성한 글을 아껴주시어 참 기쁩니다.
      앞으로도 종종 들려주신다면 더 기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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