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살아있는 인간은 빼앗으면 화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 최규석, 『송곳』 2권(2015)에서
1
초록 사과가 한두 개씩 떨어지는 일은 발붙인 존재들의 숨을 멎게 하기 위한 것. 달이 창백한 것은 짐승의 안광을 번뜩여 적당한 피부를 오리려는 출혈의 산물이기 때문. 인간의 피가 붉은 것은 자연엔 초록밖에 존재하지 않기에. 수명壽命의 끝에서 땅이 굶주림을 채우고, 그 굶주림이 시간에 따라 이뤄지지 않을 때면 부러 재해 같은 상사喪事를 지어낸다. 이 독을 찬 묘사는 자연을 향한 것이다. 오만한 인간은 자연의 일이 인간을 양육하고자 행해진다 여기어 그들의 과실만을 취하려 하고, 조금이나마 지혜를 얻은 인간은 자연의 악은 장막으로 감추고, 그 자애만을 기억한 채 교류에 나서려 하겠지만, 이 중 어느 입장으로도 자연의 존엄은 발생하지 않는다. 자연의 존엄을 바라는 일은 도무지 자연의 악을 강조할 때 그래서 그들이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 여겨질 때 가능하다고, 나는 조금씩 생각해 보고 있다. 아름답지도, 생기로 멋 부려지지도, 인간을 껴안을 너른 품을 자랑하지도 않는, 임동식이 그린 자연을 보고선 그곳에 초조히 목을 내놓고 기다리는 인간을 발견한다. 반성은 인간의 버릇. 더는 그것에 흔들리지 않으니 으름장. 그걸 써야만 한다.
존재에게 있어 폭력을 소실한다는 것은 구조 외부를 창조할 수 있는 역량을 잃어버리는 일과 같다. 공장이 멈추고, 교통의 운행이 마비되고, 행동이 겨냥한 업무뿐 아니라 그 주변 청중의 불편을 야기하는, 저마다 ‘그 방법은 틀렸다’는 소리가 유감스럽게 쏟아져나오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가시화되지 않았던 존재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현재의) 정치적 관계로는 다룰 수 없었던 사회적 관계를 정치화하는 일이 비로소 발생한다. 발터 벤야민은 ‘폭력’을 두 가지 범주로 나눈다. 구조 내부의 존재가 구조를 지키기 위해 행하는 ‘신화적 폭력’, 그리고 구조 바깥에 있는 존재가 구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행하는 ‘신적 폭력’. 그는 후자의 폭력에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순수한 폭력”이자 “혁명적 폭력”이라 덧붙인다. 돌이켜보면 새로운 주체가 출현했던 1789년과 1917년 더 나아가 오늘날 비실대진 1968년의 일은 악몽 같은 폭력이 중심 원리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나름의 몫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리를 배당받지 못한 자는 지금의 구조를 폭력적으로 제거하고 정지시키는 한에서 목소리를 지닌다. 그러니 자연에게 자리를 배당하기 위해선 그들의 행위에 소요, 폭동, 민란, 방화, 생화학전 등과 같은 폭력의 지위를 부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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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불민한 글은 비평이 작가가 작품 속에 숨겨 놓은 금화를 찾아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발견한 금화의 개수가 현명함을 말한다 하지도 않으려 한다. 외려 작품은 무언가를 은닉하기보다 물질 속에서 사라진 것을 드러내는 데 종사한다. 사라짐을 만드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물질이 놓인 세상의 형편이다. 그러니 비평이 작품에 동조한다는 것은, 작가의 삶을 따르기보다 작품 없이 가시화되지 않았던 존재에 ‘있어라’라는 말을 소리 내는 일이다. 이를테면 대리석으로 만든 계단은 대리석을 그저 통념 속에서 ‘부유함’의 이미지로 소비하지만, 조각은 작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물질의 현전 즉 대리석(물질)이 물건의 용도 속에서 사라지는 과정을 중단한다. 이러한 예술의 현전은 몫 없는 이가 생산의 한 부분, 기능으로 등록되기를 거부하고, 총체성을 정지시키는 폭력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일과 동일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로써 예술은 정치와 일치하지 않지만, 정치(의 개념)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명제에 가까워질 수 있다. 심지어 자연이 인간에 대한 피해자로 그려지는 관점조차도 자연을 어떤 용도 아래서 드러내기에 세상의 형편을 따르고 만다. 그러니 그는 총체성을 중단하는 모습으로, 이제껏 드러나지 않았던 모습으로 현전해야 한다.
임동식은 야외현장미술 ‘야투野投’를 결성한 이래 자연과 접촉, 교감, 교응과 같은 수식어와 함께 자연인, 자연예술가 등으로 호명됐다. 적어도 야투가 ‘들로 던져짐’이라는 의미인 것은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대등한 교감자로서 들에 던져지기보다는 ‘포로’로서 들에 내던져진 것으로 보인다. 공주 금강에서 진행된 퍼포먼스 ⟨일어나⟩(1981)에서 임동식은 물길에 들어가 기둥을 세운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표정은 늘 이전에 서술돼 왔듯 강물의 흐름과 교감한다든지 자연과 하나가 된다거나 하는 식의 환희와 기쁨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외려 결국 굴러떨어질 바위를 산 정상으로 영원히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처럼, 그는 결국 깊이 박히지 못하고 물의 흐름에 의해 넘어진 기둥을 영원히 세워야 하는 노역을 부과받은 것 같다. 함께 진행된 퍼포먼스 ⟨물과 함께⟩(1981)에서도 그리고 이를 화폭에 담은 ⟨1981년 여름의 기억⟩(2005)에서도 작가는 기어코 물을 채워도 뚫려 있는 밑 때문에 결국 그것이 모두 빠져나가는 페트병을 허무하게 바라볼 뿐이다. 계약이란 조건도, 할당이라는 목적도, 임금이란 결과도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노동이라기보다 노역으로 나타난다.
자연과 교감하는 행위는 결코 자연을 인간과 대등한 존재로 격상시키지 않는다. 외려 이때 강조되는 것은 언어 없는 존재에게조차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간의 역량이다. 자연을 이용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어떤 것을 원하고, 무엇으로부터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아는 인간은 분명 위계에서 다시 한번 스스로가 자연 위에 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작품은 자연에게 패배하고 노획되고 그도 모자라 의미 없는 노역까지 짊어진 인간의 모습으로,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던 자연이 자행하는 폭력을 드러낸다. 인간의 존엄 즉 인권이 빼앗겼기에 화내고, 맞았기에 맞서 싸우는 그러니까 폭력을 자행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출현하는 것처럼, 폭력을 자행하는 자연은 이 순간 비로소 자신을 두려워하는 창백한 인간의 표정에서 시작된 존엄을 누린다. 1985년 함부르크에서 진행한 퍼포먼스 ⟨거북이와 함께한 방향⟩ 그리고 이를 화폭에 술회한 ⟨거북이⟩(2005)에서 작가는 거북을 등에 올리고 땅을 기고 있다. 그리고 바다로 향해 걸음을 재촉하느라 휘둘렀던 반복된 채찍 자욱이 등에서 확인된다. 성직자와 귀족을 업은 ⟨A faut esperer q’eu jeu la finira ben tôt⟩(1789)의 농민처럼 지루하고 고단한 표정으로 그는 초원을 맨몸으로 긴다. 이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온정 어린 시선을 기다려야 한다.
통념 속에서 자연은 한때 ‘천연자원’ 최근엔 ‘지속 가능성’의 이미지로 소비됐지만, 작품에서 자연은 소비 불가능한 현전 즉 지금의 구조 속에선 배당받을 수 없는 지위를 쟁취한다. ⟨화석 캐기⟩(2019~20)에서 인간은 망치를 들고 복수를 다짐하며 돌을 깨러 같은 장소에 돌아왔지만, 그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보잘것없음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바위 앞에서, 사람보다 더 많이 화면을 채운 눈발 앞에서 인간은 차마 돌을 깨겠다고 허리를 굽히지도 못한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자연 앞에서 스스로의 비좁음(유한함)을 경험하는 인간의 모습은 낭만주의나 이마누엘 칸트,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접근하려 했던 ‘숭고’의 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숭고의 개념이 비록 인간의 한계에 방점을 찍는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작게는 규모 더 나아가서는 감성(쾌감, 경탄 등)으로 환원되거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무한에 다가서는—혹은 두려움을 상승의 감성으로 전환할 줄 아는— 인간의 고고한 지위를 확인하는 데 그치고 만다. 그러나 임동식의 자연에서 인간은 무엇을 확인하는가. 이때 시야로 확인된 것은 인간 역시 역사의 몇몇 종(種)처럼 끝내 멸절될 수 있다는 종말의 가능성이다.
1987년 노이에베르크섬에서 진행한 퍼포먼스 ⟨이슬 받아 마시기⟩에서 작가는 두 손을 가슴에 올리고 입을 벌린 채로 풀숲에 누웠다. 같은 해 이 퍼포먼스의 사진은 지푸라기가 잔뜩 올라간 채로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에 설치됐다. 그리고 1년 뒤 같은 곳에서 치러진 ⟪연례전⟫에서 점점 자라 오르는 풀은 임동식의 모습을 가릴 정도로 생장하게 된다. 이후 2019~20년 동안 작가는 이 시리즈를 ⟨풀밭에 누워 맑은 공기 마시다⟩라는 제목으로 화폭에 옮겼다. 그의 모습은 두 손을 가슴에 올린 모양과 풀어진 근육 때문에 마치 주검처럼 보인다. 네 개의 장면을 이어 정리한다면 인간은 죽음에 이르러 땅에 놓였다가 결국 대지에 잡아먹힌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인간이 먹이가 됨으로써 화폭 속에 ‘맑은 공기’가 출현하는 것이다. —한가지 예를 덧붙이자면 1984년 함부르크에서 진행한 ⟨생명의 음을 듣는 동작-심장⟩. 여기서 작가는 달걀에게 심장을 뜯기기 위한 주검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죽음, 양분의 섭취, 식물의 번성, 세계의 정화로 전개되는 시퀀스는 자연이 인간종의 멸종으로 도모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인간은 이제까지 자연의 회복이 인간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해왔지만, 자연은 도리어 인간의 비-지속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신장하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이 무슨 맛인지 곱씹으며 권리선언에 ‘자연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인간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혁명 앞에 벌벌 떨게 하라!’란 문장을 적녹의 색으로 새긴다.
3
“자연으로 다가가다 보면 미술이 없어지는 형태가 되거든요. (…)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하고 보기만 한 것, 그렇게 더 가다 보면 미술이 증발되어요.”(『일어나 올라가 임동식』, 252쪽) 하위의 질서는 상위의 질서를 반영해야 한다. 자연이 스스로가 지닌 폭력을 드러냄으로써 노예에서 주인으로 격상되고 인간이 그의 천적에서 피식자被食者로 전락한다면, 그에 속해 있는 한 명의 인간 역시 예술가에서 비-예술가로 전락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연을 다스림으로써 자연 아닌 것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가 다스림을 빼앗기듯, 예술가는 예술을 빼앗겨야만 한다. 그런 한에서 작가는 자연이 인간에 대하여 일으킨 범죄에 대하여 제3자의 눈 즉 전지적인 시점에서 결백한 척 비켜서 있다는 혐의를 벗게 될 것이다. 그제서야 작품은 수사나 비유, 상징 따위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직접 부딫치고 있음이 증빙된다. 그러니 이다지도, 결국 작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임동식은 고백한다.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하고 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뭇 현명한 자들이 선고했듯 인간의 예술은 종언되었고 이제 그것은 자연의 몫이 되어 증발해버렸다고 비명하면서.
국제 사회는 2016년 파리기후변화협정을 체결하며 지구의 온도 상승을 2도 이하, 최대한 1.5도를 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지를 표출했다. 그러나 이 목표치는 자연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탄소 배출을 감축함으로써 인간 세계가 최대한으로 감수할 수 있는 경제 성장률의 낙폭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심지어 목표치를 달성한다 하더라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개발 도상국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된다. 기후 위기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어디 이뿐일까. 코로나19로 전 세계에서 554만 명이 사망했고, 이는 1945년 유엔헌장에서 자위권 행사가 아닌 무력 사용을 모두 금지한 이후에 전쟁으로 사망한 인구와 비등하다. 멈출 수 없는 —혹은 멈춘다면 인간 스스로 질식될 것이기에 지속되는— 개발과 파괴 그리고 인간 사이에서조차 벌어지는 살상. 과연 이 앞에서 간절하게 세상의 종말을 막아야 하는 까닭이, 우리에게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 차라리 자연이 지닌 폭력의 역량을, 혁명의 지위를 그래서 인간이 끝내 진리에 의해 패배해야 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여느 때처럼, 그 결론에서 자연이 승리하는 때에, 인간도 자연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게 될 것이란 현명한 결론은 차마 내릴 수 없다. 그렇다면 비켜서 있게 될 테니까. 감히 인간의 종말을 기쁘게 받아들인다고 적는다. 불가피하게 인간은 누군가에게 적이다.
참조
김종길 김호정 백승한 등, 『일어나 올라가 임동식』, 서울시립미술관, 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올김,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다다서재, 2021
슬라보예 지젝, 이현우 김희진 정일권 옮김, 『폭력이란 무엇인가』, 난장이, 2011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폭력 비판을 위하여」, 도서출판길, 2008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이현복 옮김, 「숭고와 아방가르드」, 『지식인의 종언』, 문예출판사, 1993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칼 마르크스, 이진우 옮김, 『공산당선언』, 책세상, 2002
『Gravity Effect』 7호에 부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