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 미사일_차지량: New Home – Stay

차지량, ⟨Stay⟩, 비디오, 60분, 2021 (출처: Cha Ji Ryang)

나는 문득 자수를 하고 싶어진다. 뭔가를 자수하고 싶다. 장마철마다 대야와 바가지로 물을 푸던 양친을 잊고 지냄에 대하여, 익지도 않은 낯선 짐승을 뼈째로 허겁지겁 삼키고는 그 비가 타고 내려오던 깊은 계단에 게워냈던 기억의 부재에 대하여, 새벽 내 심장 타는 냄새를 맡던 가족의 얼굴을 모름에 대하여, 그러니까 그 어느 것도 내가 머물고 있지 않음에 대하여. 밖에서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 집에만 가져오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지. 쥐기 위해서 꺾어야 한다는 것과, 언덕을 넘어오는 바람만은 가구로 재현할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누구를 사랑하는 태도가 사실 끔찍하게 다르다 것이 내가 그곳을 기억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 누군가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갈 스스로 생성해내는 생을 살고 있다고 할 때, 그가 밤이나 폐허 같은 것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음을 더러 본다. 오일 대신 유채라 발음하고, 시침은 물론 형광등이 씨끄럽다는 것을 앎은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이 사소한 소리들을 말미암아 그곳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집으로 가는 길마저 망각할 수밖에. 차지량의 ⟨New Home⟩에 놓인 행렬과 무도회는 집을 소유하기 위한 자리이거나 집을 소유하지 못한 울화에 대한 가시화라지만, 그보다 ‘집을 잃기 위해서’라는 목적어를 먼저 떠올린다면 잘못된 것일까. ⟨Stay⟩ 속 주영이 “작은 집도 집이지”라며 한결의 말에 마지못해 똑같은 문장으로 시인할 때, 김소성이 “여기서 지금 희망을 찾기는 너무 힘들고 지금은. 그래서 (…) 세상이랑 싸우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요.”라고 말하거나 “지금은 이제 그런 에너지가 전혀 없고 저 안에 있는 나를 보면 슬프죠. 엄청”이라 고백할 때, 또 이를 이어받듯 권태현이 “구조의 무서운 점은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안쪽에 어떤 방식으로든 (…) 안착이 된다면 그 순간부터 자신이 바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쪽의 논리를 생산하게 되는”이라고 말할 때, 식은 이 말들을 생기 넘치는 이전의 몸짓에 대조하게 된다. 소원되는 집과 배반을 부추기는 집. 일련의 서사엔 두 개의 집이 나온다. 그러나 선택할 필요는 없다. 서사는 둘 중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을 모두 제거해버린다.

두 영상은 ‘집이 있다면 어떤 것이 좋을 텐데’라는 식으로 제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집이 없어 어떤 것이 좋지 않다’라는 서술 또한 함구된다. 외려 누렸던 기쁨은 집 없어 나온 이들이 밤, 폐허 같은 것들과 친하게 지낼 때였다. 걸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토지로 행렬이 지나갈 때, 연주에 종사하지 않는 벽에 소리가 반향될 때, 수면과 불화하는 찬 바닥이 동침과 어울릴 때 ‘집’의 개념 또한 지난 질서의 것과 같지 않아진다. ‘새로운 집’은 소유와 결부되지 않는다. 행렬, 무도, 동침, 세 행위는 집을 집이 아닌 곳으로 만들고, 집이 아닌 곳을 집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집의 개념은 남루하게 되었다. 행위들이 ‘집의 소거’로 의미 지어진다면 모두 그 때문이다. 소유란 노동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노동의 결과가 아닌 토지가 거래 없이 공동 ‘소유’물이 되어야 한다는 지난 논리는 여기서 비로소 쓰이지 않는다. 작업은 더 불가능한 곳으로 내려갔다. 이베타가 말했듯 “우리 사이의 가장 낮은 공통분모는 우린 정착되지 않았고, 정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 작업은 소원을 무릅쓰고 집을 소거하려 한다.

마지막에 배치된 ⟨Home Again⟩은 그 소거의 가시화다. 소원되는 집과 배반을 부추기는 집이 노이즈로써 동시에 지워진다. 행렬과 무도, 동침의 내역까지 지워버리는 것으로써, 작업은 그것을 추억의 대상으로도 삼지 않으려 한다. 추억할 대상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그러나 다시, 혹은 처음으로 집을 잃기 위해선 얼마간 소거를 연기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할지 모른다. 작업은 우리가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거라 낙관하지 않는다. 저들이 고백한 것처럼 나도 고백을 해야 한다. 나는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지만 더 좋은 곳을 소유하고 싶다. 허튼 소리를 지껄인 것일까. 내가 단 한번이라도 진정한 예술 개념을 갖고 있었던가. 그러나 작업이 더 불가능한 곳으로 내려가듯 또 예술이 믿음이 아니라 믿음 없음으로써 가담하듯 믿지 않으면서, 나는 쓴다. 세상이 간단치 않다면 기꺼이 토푸킴의 말처럼 집을 향해 “우리는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쪽으로 걷게 될 것이다. 흐린 날 미사일처럼, 우리집을 못 찾겠군요. / 조재연

이 텍스트는 차지량 ⟪🏠 New Home – Stay⟫에 부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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