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트인컬처』 2025년 7월호
일본의 ‘영 파워’ 아티스트 에가미 에츠는 무지갯빛 초상화로 소통의 본질을 탐구한다. 경주 오아르미술관 개관전으로 개인전 <지구의 울림>(4. 8~9. 21)이 열리고 있다. ‘메아리’를 주제로 신작 페인팅 17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시간과 공간, 문화를 가로지르는 목소리의 잔향을 다채로운 시각 언어로 풀어냈다. /

— 당신은 초상의 형식을 빌려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장면을 담아낸다. 당신의 말을 빌리자면 ‘소통의 회색 지대’를 수많은 선과 색으로 번역해 왔다.
Egami 내 그림에서 ‘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해’를 의미한다. 말은 언제나 오해를 낳는다. 어떤 관계에도 이해와 오해가 포개진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린 꼭 하나의 해답에 도달할 필요가 없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때 오히려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이러한 고민에서 ‘무지개’를 떠올렸다. 교차하지 않기에 공존하는 평행선. 무지개는 선마다 색이 달라 아름답다. 선 하나하나에 담긴 오해는 슬프지만, 포기하지 않고 소통을 쌓아나갈 때 꿈의 무지개는 완성된다.
소통, 오해와 이해 사이
— 당신의 그림에서 말, 언어, 목소리는 마치 하나의 재료처럼 느껴진다. 소통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중국, 일본, 독일, 미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살아온 경험이 언어와 정체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이러한 문화적 전환이 작가에게 미친 영향이 궁금하다.
Egami 내게 말과 언어, 목소리는 색, 분위기, 움직임 등과 함께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다. 아버지는 물리학자이자 서예가였다. 그는 서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숨’이라고 강조했다. 숨을 고르며 그린 선은 맥박이 뛰고 살아서 꿈틀거린다. 나는 소리를 선에 녹인다. 소리의 파형과 굵기, 음색 등이 형상화되어 선을 살아있게 만든다. 그게 바로 내가 구현하고 싶은 ‘생명의 선’이다.
나는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학교에 다니는 내내 언어의 장벽에 부딪혔다. 그럴 때마다 이 문제를 작업에 반영할 순 없는지 고민하곤 했다. 어느 날, 한 중국인 친구가 내 이름을 일본어로 어떻게 발음하는지 물었다. 나는 “에가미 에츠”라고 대답했는데, 갑자기 주변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당황하자 누군가 “네 이름을 중국 동북 방언으로 들으면 ‘쌀 포대’로 들린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때까지 나는 오해를 낳는 청각적 착오의 개념 ‘몬더그린(mondegreen)’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한자도 발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작고 사소해 보이는 ‘오청(誤聽)’의 틈새에서 무한한 상상력과 소통의 가능성을 느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해를 유도하는 <Mishearing Game>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여러 나라의 사람에게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게 하고, 그 소리를 글로 쓰고 녹음하는 리서치였다. 이 기획으로 나는 언어의 기원, 언어에서 비롯된 인간의 본능, 그리고 언어를 매개로 사회를 재사유하는 문제까지 안테나를 확장할 수 있었다. <This Is Not a Mis-hearing Game>(2016)은 바로 이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내게 소통이란 이해와 오해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소통이 어긋난 순간을 통해 오히려 소통의 본질을 드러내려고 한다.

— ‘소통’은 오늘날 문화예술 전반에서 중요한 화두다. 팬데믹 이후 소통을 갈망하는 사회 분위기가 당신의 작업에 폭넓은 공감을 일으켰다. 2020~21년 연속 『포브스』 ‘30 언더(under) 30’에 선정된 사실 또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Egami 내가 경험한 다문화 환경은 포스트-세계화 시대의 초국가적·초문화적 현실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다층적인 정체성과 감각을 포착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실제로 어떤 미술사가는 같은 맥락에서 나를 ‘전후 일본 현대미술의 3세대 대표 작가’로 언급하기도 했다. 1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직접 경험한 세대로, 전위예술 그룹 구타이나 물(物)을 탐구한 모노하처럼 무게감 있는 주제와 동양 철학을 작업에 반영하는 경향이 강했다. 2세대는 일본 전통 요소를 평면화(superflat), 상징화했다. 이 시기 오타쿠 서브컬처가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나를 포함한 3세대는 이러한 시대적 코드에서 자유롭고, 처음부터 국제적 배경을 지닌 경우가 많다. 특히 일상을 기반으로 보편성 탐구에 주력하는 경향이 있다. 3세대는 일본이라는 지역적 맥락에 한정된 미술 흐름이 아니라,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이 확장되는 동시대적 시류다. 우리는 지금 탈식민주의와 국가 정체성의 틀을 넘어서는전환점에 서있다. 나는 일본 미술 3세대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로서 동시대 미술계에 기여하고 싶다.
— 최근 당신의 회화가 고대 철학을 곡선과 평행선으로 시각화하는 과정이라고 밝혔다. 2023년 화이트스톤갤러리 홍콩에서 열린 JY와의 2인전 <Philosophers>는 그 개념이 구체화된 사례였다. 이 전시는 동양의 서예와 서양의 유화가 하나의 미적 언어로 탄생하는 순간을 보여줬다. 둘의 결합은 당신의 오랜 관심사였고, 그 뿌리에는 어린 시절부터 익힌 서예가 있다. 서로 다른 전통의 만남에서 당신은 어떤 접점을 발견했는가?
Egami <Philosophers>전은 내가 오래전부터 실현하고 싶었던 협업 프로젝트다. 당시 홍콩 아트위크에서 가장 뛰어난 전시로 꼽힐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전시는 고대 중국 철학자의 사상을초상으로 번역한 내 그림과 서예가 JY가 쓴 고전 명구로 구성되었다. 나는 이 전시로 회화와 서예, 이미지와 문자의 조화를 선보였다. 고대 철학자들은 실존 인물이지만 초상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JY는 내게 각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사상에 어울리는 서체와 어구를 골라 제안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철학자의 얼굴과 성격을 상상해 그렸다.
일본의 미술사학자 치바 시게오(Chiba Shigeo)는 내 작업을 ‘포스트페인팅’이라고 평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진정한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곱씹곤 했다. 일본 2세대 작가가 그린 회화는 정말 회화의 본질로 복귀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평면 표현에 함몰된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나는 2차원의 플랫함이 곧 회화를 의미한다고 보지 않는다. 회화는 그 자체로 고유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 그것들은 선과 색이 가진 운동성, 리듬, 에너지다. 언젠가 “서예는 회화의 마지막 보루일지도 모른다”라는 말을 들었다. 서예는 회화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생명은 살아있고, 생명은 죽는다
— 이제 개인전 이야기를 해보자. 2022년 탕컨템포러리아트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 관객과 만났다. 이번에는 오아르미술관 개관전 주인공으로 초대받아 훨씬 뜻깊다. 전시 제목은 <지구의 울림>이다. 소리, 기억, 정체성을 키워드로 신작 회화 17점을 공개했다. ‘메아리’를 핵심 주제로 삼아 시간과 공간, 문화를 가로지르는 목소리의 흔적을 시각화했다. 특히 세대를 초월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인 문화 아이콘의 초상을 다뤘다. 신작 시리즈는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는가?
Egami 내 작업을 꾸준히 지지해 주는 많은 한국 팬이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강하고 두꺼운 붓질은 내 작업의 핵심 요소다. 한국에서 처음 단색화를 접했을 때 내 작업이 한국적 미학과 깊이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러한 공감대가 한국 관객에게도 자연스럽게 전달된 게 아닐지….
지난해 출간한 책 『Lifelines: That Which Divides or Connects Us』에서 나는 “생명은 살아있고, 생명은 죽는다(우리의 죽음의 날에)”라고 썼다. 어쩌면 ‘생명선(lifeline)’은 삶과 죽음 전체의 궤적이자,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선일지도 모른다. 내 작업에서 선은 가장 중요한 조형 요소이며, 그 바탕에는 언제나 생명 의식이 깔려있다. 대상과의 공감이 신체의 움직임으로 캔버스에 발현되며, 감정 이입과 소외의 양면에서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난다. 인물을 그릴 때는 그 인물이 살아온 삶과 맥박, 호흡, 궤적,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에너지까지 함께 담아내려 한다. 그렇게 형상화된 선은 때로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가 되기도, 서로를 이어주는 연결선이 되기도 한다. 색채와 소리로 전환된 생명선은 점차 호흡과 심장의 박동처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나는 그 선이 결국 하나의 ‘리듬’과 ‘화음’을 이루며, 회화에서 하나의 ‘소리’처럼 울려 퍼진다고 느낀다.
— 비틀즈, 마이클 잭슨, 케이팝 아티스트 같은 대중문화 아이콘을 모티프로 삼았다. 그러나 인물을 직접 묘사하기보다 추상적 제스처로만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왜 이러한 접근을 선택했고, 또 이들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Egami 대중문화 아이콘을 다룰 때 나는 각각의 개인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공명과 흔적에 집중한다. 이들은 언어와 국경을 초월해 음악, 춤, 패션 등으로 대중과 연결돼 왔다. 그 존재 자체가 오해와 오청, 번역 등을 통한 메시지 전달과 맞닿아 있다.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나 비틀즈의 멜로디처럼, 이들이 남긴 것은 말이 아니라 리듬과 몸짓이다. 즉 ‘비언어’로 세계를 관통한 것이다. 나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힘을 시각화하고 싶었다. 이러한 접근은 ‘존재와 부재’라는 아이콘의 양면성을 주목하는 데서 시작했다. 나는 이들의 얼굴을 직접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공연이 끝난 뒤의 여운, 팬의 환호가 남긴 파형 같은 감각을 추상적인 붓질로 담는다. 예를 들어 케이팝 콘서트의 메아리를 중첩된 색채로 표현하거나, 비틀즈 노래의 잘못 들은 가사를 흐릿한 텍스트로 고정하는 등 이들이 사회에 남긴 ‘잔향’에 주목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신화화되고, 현실과 분리된 이미지로 소비된다. 나는 이 왜곡을 회화의 레이어링, 의도적 번짐과 지움의 기법으로 포착했다. 반복 복제되는 마이클 잭슨의 흰 장갑과 케이팝 장르의 그룹별 상징 색은 점차 원래의 의미를 잃고 다르게 재구성된다. 이 과정은 곧 ‘소통의 불확실성’이라는 주제와 닮았다. 나는 묻고 싶다. ‘우리는 스타를 정말 이해하고 있는가?’ 이들은 수많은 해석이 붙은 결과물일 뿐, 단일한 실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관객이 자신의 기억과 인식을 작품에 투영하길 바란다. 작가로서 내 역할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관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장(field)을 물화하는 데 있다.

서예는 회화의 마지막 보루
— 당신의 설명을 들으니 이전 작업에서 꾸준히 탐구해 온 ‘소통’이라는 주제가 한층 더 깊어진 게 느껴진다. 한편으론 기억과 시간에 대한 접근, 동서 미학의 접합, 그리고 집단적 기억의 형성 등에서 이전과는 다른 시도가 엿보이는 지점도 있다.
Egami 과거의 작업이 주로 목소리와 언어로 순간적인 소통 오류를 포착했다면, 이번에는 훨씬 더 긴 시간의 층위에 주목했다. 특히 레이어링과 스크래핑 기법을 활용했다. 전후 일본 사회가 서구 대중문화를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선의 쌓음으로, ‘퇴적의 이미지’로 은유했다. 기억에 대한 일종의 고고학적 접근이다. 또 이번 작업에서는 동서 미학의 경계를 물성 실험으로 넘나들려 했다. 기존 작업이 서예와 유화의 문화적 차이에 집중했다면, 신작 시리즈는 전통 가면극 노(能)와 추상회화를 결합했다. 금박과 그라피티 같은 상반된 재료를 혼합해 회화의 물성 측면에서 동서양의 경계를 해체했다.
기억의 집단적 형성과 전이 과정에 주목한 점도 또 다른 전환점이다. 먼저 소셜 미디어로 대중문화 스타에 관한 팬들의 기억을 수집하고, 이를 AI 알고리즘으로 분석한 뒤, 회화의 붓질로 전환했다. 개인의 기억이 어떻게 집단 기억으로 재구성되는지 실험했다. 나는 단순히 문화적 혼성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뒤섞이고 반응하는 ‘기억의 장’을 마련하고 싶었다. 관객이 자신의 기억을 그림에 투영하고, 고유한 감각 필터를 거쳐 작품과 마주할 때 그 순간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 솔직한 답변에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작업 계획이 궁금하다. 이 다음 전시에서는 어떤 새로운 작품과 만날 수 있을까?
Egami 지금은 <Love Letter Series> 연작을 한창 진행하고 있다. JY와 또 한 번 손을 잡았다. 시와 초상, 이미지와 서예의 관계를 탐구하는 도전이자 색다른 발견이 될 것이다. 이 작업으로 이미지와 언어, 감정과 형식 사이에 존재하는 접점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새로운 연결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