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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예술이라고 하지는 말자, 우리가 뒤샹 이후를 살아간다 하더라도. 또 모든 이들이 예술가라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때에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은 스펙터클뿐이다. 주방장은 쉐프로, 커피를 뽑는 자는 바리스타로, 이발사는 바버로 이윽고 시간제 노동자를 크루라고 부르게 될 때 사회는 집요하게 노동을 우아한 예술로 점철시키는 욕정을 드러낸다. 노동은 자신을 주입하면서 상품을 만들고 스스로는 가리어지게 되지만, 예술이 작품을 만들 때 그의 생산자는 존재를 유지한다. 상품은 그것을 누가 어떤 의도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었는지에 대한 물음들을 드물게만 허락하지만, 예술에게 그 물음들은 우연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노동과 예술 더불어 상품과 작품의 근원적인 차이였다면 사회는 삶과 예술의 일치라는 아방가르드의 오래된 소원을 부정적으로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노동자는 쉽게 명찰을 달고 가끔은 영수증에, 제품의 겉면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다. 그리고 일을 하는 동안 창의성이나 창발성 따위를 발휘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타인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을 통한 자기실현을 목전에 둔다. 이는 모더니즘에 속한 아방가르드의 과제를 부정적으로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정적 실현이기도 하다. 정신이 신체보다 우위에 있다거나 심신을 이원화하는 생각으로부터의 거부는 우리에게 생기있는 삶을 제고하고, 감성의 출소出所를 가져왔다고 전하지만 동시에 도래한 것은 고유명을 상실한 앙상한 존재다. 인간의 본질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전하면서 관계에 의해서 존재가 형성된다고 말하는 방식은 결국 그 관계가 주는 위치를 수용하게 만들 뿐, 관계나 차이로 환원될 수 없었던 초극적인 주체를 갈아버린다.
그러나 사회만 집요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예술화하고 심미화하는 것에 그가 애썼던 것처럼, 예술은 반대로 스스로를 먹고 살 수 있는 일로 만들기 위해서 집요했다. 가장 가까운 노력은 예술 노동에 관한 담론이 이를 반영한다. 예술 노동의 개념에 대한 인권적인 측면은 분명 가치 있는 논의였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정치와 경제의 타자였던 그렇기에 가장 사소한 예술조차도 세계에 적대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던 보루로서의 예술을 망각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에게 놓여진 것은 결국 죄다 상품의 세계라 말해야 한다는 것일까. ‘해방’이라는 낯간지러운 약속을 했던 것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간수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차라리 이제 ‘예술은 아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예술 또한 패배했다는 기억이 남을 뿐이다. 예술은 가해자로 여겨져서도 안 되지만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예술은, 표상해야 할 예술은 사뭇 여전히 다툼을 포기하지 않은 예술이다. 이 다툼을 기억해야만 예술은 ‘예술’로 남는다.
다툼의 지속. 모든 것이 예술은 아니지만 예술(적)인 모든 것들은 ‘있다’는 것. 그래서 『이스트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은 예술의 전사戰史에 대한 기록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2018년 12월 13일부터 2019년 2월 24일에 열린 이 전시는 1980년대 레이건 시대의 예술의 배후지였던 뉴욕 이스트빌리지를 담았다. 전시의 부제를 ‘취약하고 극단적인’이라는 수식어로 삼을 때 그것은 이제까지 적었던 그 다툼의 양면을 표상한다. 자본이 심미화를 시작한 것과 예술이 먹고 사는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 선명해진 것은 신자유주의의 개막이라고 부를 수 있는 레이건 시대였다. 예술의 자리는 수없이 패배해, 재개발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으며 슬럼화・폐허화 된 이스트빌리지로 밀려난다. 이는 하나의 취약함이자 극단적임이다. 그래서 거기서 기입된 작업들의 표정에는 그러한 고단한 취약함이 느껴진다. 그들은 취약했기에 끝에, 극단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피해자의 얼굴이라는 것은 아니다. 예술이 취약한 것은 정치와 경제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로 끝까지 환원되지 않고 타자로 남아서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서 예술은 정치와 경제를 응시한다. 이때의 취약함은 예술이 적대라고 불릴만한 다툼의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의 극단은 지금의 낡은 시대의 경계를 넘으려는 장소의 극단이자, 낡은 시대를 편들지 않는 중용을 저버린 극단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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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스트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은 이른바 사회에 개입하려는 몸짓이었던 사회적 예술의 일반적 실천과는 다르다. 간과하거나 소홀히 여겨졌던 타자에 대한 공감, 전이, 감정이입, 나아가 주체화는 전시에서 눈에 띠지 않는다. 주되게 전달되는 것은 삶에는 예술(적)인 장면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삶을 둘러싼 장소에도 역시 예술(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참여한 작가들은 새로운 작업을 만들고 이스트빌리지에 그것의 의미나 개념, 서사 등을 부여함으로써 예술을 창조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 것은 그곳에 잔류하여, 버티어 다툼을 지속하고 있는 예술인 것들에 예술의 이름을 기입한 것이다.
하나의 토지 위의 벽은 소유주의 주문에 따라 세워진 상품에 불과하며 그래서 그곳에는 어떠한 정신도 자유도 들어가 있지 않을 것 같을 때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SAMO(same old shit, 흔해빠진 쓰레기)’라고 태그를 기입한다. 단 이로써 불러일으켜 지는 것은 바스키아의 예술성이 아니다. 그때 보는 자는 찾게 될 것이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표식들, 벽을 지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오차들이 어쩌면 노동자가 찰나에 발휘했던 자유와 정신이라는 것을. 바스키아의 기입은 기입 스스로를 예술화하는 것이 아니라 기입의 주변에서 예술이 될 수 있는 것, 예술적인 것을 상기시킨다. 이때의 효과와, 모든 것은 예술이라고 찬미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심미화는 자본과 상품의 주문에 따르는 것을 예술화하지만 여기서 벌어지는 효과는 ‘인간’인 노동자가 작업했기 때문에 우연적이지만 반드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원래라면 노동의 실수나 비숙련의 산물 그리고 주문(명령)의 위반으로 여겨질 것들이 예술임이 불러일으켜 진다. 그런 후에야 예술은 아직 다툼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스트빌리지에서도 예술이 지속되며, 이스트빌리지니까 예술이 지속된다. 자본에 예속된 몸에서도 예술은 예속을 거스름을 지속한다. 그러니 이때의 사회적 예술은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사회적 예술은 사회적인 것과 관계를 맺고 사회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와는 결별하고 사회와는 섞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써 성립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예술은 오직 반反-사회적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버스터 클리브랜드Buster Cleveland는 콜라주라는 기입의 형태로 사회적 예술을 도입한다. 그는 거리에서 이스트빌리지 작가들의 사진, 담뱃갑, 거리에서 주운 쓰레기를 잡지의 표지와 함께 콜라주했다. 콜라주는 사물의 연접을 통해서 차이를 질료로 한 의미를 생산해내는 것이지만 전시는 그것을 초과하는 범위를 상정한다. 작업은 작업을 초과하는 방식으로 일상의 사물에 흐릿해진 예술을,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을 상기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담뱃갑의 독특한 로고는 그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Art For UM 이브 클랭(Art For UM Yves Klein)」), 젖어 보이는 비닐 쓰레기(「Art For Um 메이플소프(Art For Um Mapplethorp)」) 또한 그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계기는 바스키아의 태그처럼 부재한다고 여겨졌던 예술을 상기하게 한다. 담배 럭키스트라이크의 검은색과 적색의 조합은 담배의 수요를 진작시키고자 하는 주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주문에 거스르는 반동일 수도 있다. 그것을 입증하듯이 저 로고는 작업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오히려 상품에서보다 스크린에서 확고하게 있지 않은가. 비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콜라주에 적확한 역할로서 혼합될 수 있다는 것은 비닐 어딘가에 부유하는 예술(적)인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콜라주 작업들 역시 클리브랜드의 예술성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작업은 오히려 일상에서의 주변 사물에 대한 제고, 상기를 주선한다. 거기서 발견되는 것은 다시 아직도 지속될 다툼이다. 사회의 논리에 따르는 것 속에서도 거스름은 반드시 존재하고 그것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예술은 다툼하는 자신의 자리를 바로 새긴다.
한편 존 에이헌John Ahearn의 「쥐잡는 아이들(The Rat Killers)」의 모습은 결코 쥐를 잡고 있는 모습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두 명의 아이는 쥐가 있는 곳을 내려다보지 않으며, 쥐의 민첩한 모습을 쫓느라 긴장된 몸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의 모습은 오히려 들고 있는 장대로 가로대를 넘는 올림픽의 선수와 닮아 있다. 다시 말해서 두 아이는 사회의 위생이나 진열된 상품을 갉아 먹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주문 따위는 염두에 놓지 않고 있다. 에이헌이 포착한 모습은 외려 그런 주문 위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문을 거스르는 찰나들이다. 제인 딕슨Jane Dickson의 작업 역시 비슷한 효과를 지닌다. 「도망자(Runaways)」에서, 쫓기는 상황에 처한 두 인물은 보는 자와 마주친 눈을 피하지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그들을 보는 자와 가까워지고자 하는 것 같다. 위반과 처벌 그리고 그로부터 도망이지만 그들은 거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더욱 있으려 한다. 삶을 지배하려는 것에서 회피하는 것이 세상의 형편에 따른 선택이라면 에이헌과 딕슨이 포착한 인물의 선택은 그곳에 기어이 들어가 다른 이질적인 것을 만들어내려 한다. 감성적 차원에서 그들이 만들려고 하는 것의 이름이 희망이라면 여기서 붙이고 싶은 것은 그 희망을 만들기 위해서, 과정에서 점철된 다툼으로서의 예술이다. 여기서도 보는 자는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패배한 순간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실 패배의 순간조차도 다툼의 연속이었고 패배 속에서도 때때로 주문을 거스르는 모습으로 이기기도 했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 모순을 가리키는 이름, 예술(적)인 것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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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게 들릴지도 모른다. 예술은 그 어느 시대보다 창궐하고 있다. 가장 많은 문학, 가장 많은 전시, 가장 많은 공연 등이 지금에 있다. 그러나 그만큼 미적인 세계라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예술을 존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적어도 예술을 실천의 맥락 위에 놓는 자라면 예술의 ‘있음’들에 대해서 마땅히 상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가장 사소한 예술조차도, 도구적이고 동일성만을 좇는 자본제적 합리성에서 맞선다는 점에서 예술은 분명 정치와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다. 분명 그렇게 믿고 헌신해 온 역사가 있다. 그러나 그 타자들이 창궐하는 지금 세계는 왜 미래가 되지 않았는가.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예술이 예술이 아니게끔 여겨진다는 것에 있다. 예술(적인 것)은 널려 있지만 그것이 예술로 여겨지는 일은 드물게만 일어난다. 그것은 모든 것이 다 예술이 되어서 예술이 무뎌졌거나, 예술도 알고 보니 상품이었다는, 먹고사는 논리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패배의 기억만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급한 작업들에서도 또 그렇지 않은 작업들에서도 전시는 예술이 예술로서 사고되지 않아 희미해졌던 것들을 다시 복원하는 데 힘쓴다. 거기서 복원되는 예술은 큐브에 배열된 작업들이 아니라 인간이 놓여진 일상을 구성했던, 주거 공간을 구축했던 그리고 거리에 통합되어 있던 예술이다. 미술관이나 예술가의 무용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전시가 그랬던 것처럼 흔해 빠진 것들 안에서 예술이 상기되기 위해서는 제거할 수 없는 불변항이자 경유지로서 그 둘이 필요하다. 늘 그곳은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 상기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다툼을 지속하고 있는 예술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다. 모두가 싸움으로부터 도망쳤거나 회피했다고 생각하던 취약한 곳에서 극단을 향한 다툼은 하염없이 지속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 점이다. 술집 앞 새벽 두 시, 기울은 가로등 아래에서 그 엉성함이 빛이라는 주문을 초과하는 태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내 남아 삶을 보호할 것이다. 모든 것이 예술은 아니지만 예술(적)인 모든 것들은 ‘있다’. / 조재연
미술비평잡지 『Gravity Effect』 제3회 비평공모전 1위 당선작
( 『Gravity Effect』 Issue. 5: Technology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