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진은 먼지로 감각의 지도를 다시 그린다. 보이지 않던 입자, 폐기된 감각, 잊힌 신체의 흔적을 따라 미술을 ‘재배치의 정치’로 전환해 왔다. 여기서 ‘먼지’는 은유이자 실재다. 은유의 관점에서 먼지는 체계에서 추방되고, 터와 이름을 잃어가는 존재를 대변한다. 논문이 되지 못한 텍스트, 작업실 구석에 쓸려나간 안료, 폐기물로 남겨진 장갑…. 작가의 작업 세계에서 먼지는 예술로 환기될 두 번째 생의 기회를 부여받는다. 한편 실재의 관점에서 먼지는 예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이미 우리를 이루고 있는 존재 그 자체의 형식이다. 모든 것이 먼지로 사그라지고, 그로부터 다시 출발하는 세계에서, 먼지는 소멸을 가리키는 동시에 불멸을 지시한다. 존재는 먼지로 흩어지지만 먼지 그 이상으로 마멸되지 않고 끝내 다른 무엇이 된다. 따라서 그는 개인전 《공기색 입자》(2024, 12. 10~29 10의n승)를 구현하기 전부터 먼지를 쓰고 있었고, 먼지는 이번에 제 팔자만큼 우주가 되었다. 사그라든 것과 무엇으로든 출발해야 하는 것 사이에 먼지의 진동은 있다. 그리고 의미 없는 것과 그럼에도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 간에 삶이 흔들린다. 둘은 다르지 않다. 폐허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무의미에 패배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어찌해야 하나. 기어이 무의미를 향해 걸어가야 한다. 먼지가 되어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을 때까지 바닥을 전락한 후에야 비로소 의미는 다시 움트기 시작한다. 의미란 싸움 그 자체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무의미에서 발버둥 치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얻는다. 따라서 신용진의 예술은 꺼진 것처럼 보이는 사투에 불을 붙여 다시 생을 불어넣는 일이다. 어차피 사라질 일, 그러나 먼지는 그친 적 없는 일. 방랑과 유랑을 쉴 수 없고, 생을 찌꺼기까지 마신다.
네 개의 먼지로 된 사전
존재가 제 모습을 흩어 먼지가 되는 것, 그리고 먼지가 제 처지를 뭉쳐 존재가 되는 것. 이 사이를 오가는 일로 우리는 먼지에 대한 네 개의 사전을 갖게 된다. 첫 번째 먼지. 그것은 언제나 버려진 자리에서 시작된다. 신용진의 작업은 늘 프레임 밖, 제도 아래, 완성 이후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그가 붙잡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그 곁에서 떨어져 나간 것, 즉 잔여와 파편의 미학이다. 그리고 잔여는 무의미가 아니라 외려 의미의 부재에서만 감각되는 (재)탄생의 실마리다. 두 번째 먼지, 그것은 존재의 형이상학이다. 먼지는 존재의 본질이다. 무엇이든 먼지가 되며, 세계는 다시 먼지에서 출발한다. 이 순환의 감각에서 먼지는 사라짐이 아니라 지속의 은유다. 세 번째 먼지, 그것은 몸의 기록이자 노동의 흔적이다. 신용진이 미화원으로, 박서보의 어시스턴트로 살아낸 시간은 작업이 출현하기에 앞서 그의 몸 자체를 조형화했다. 그의 작품은 캔버스를 향한 행위가 아니라, 캔버스가 그를 통과한 기록이다. 신용진은 몸으로 예술을 관통했고, 그 경로에 먼지가 남았다. 네 번째 먼지, 그것은 언어로부터의 이탈이며, 제도에 대한 질문이다. 학문과 예술, 정답과 오답, 공식과 낙서 사이에서 그는 통용되지 않을 언어를 써 내려간다. 등재되지 않는 논문, 전시장에 걸 수 없는 회화, 아무도 읽지 않을 자기 고백…. 이 모든 것은 오히려 예술이 되지 못한 패배의 전적이면서, 예술 아닌 것의 예술‘화’를 시도하는 사투의 전황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비예술을 향해 예술을 영토를 넓힐 때 예술은 급진적이다. 그는 제도(예술)가 되지 않았기에 전위로 살아있는 작업을 짓는다. 이 글은 네 개의 먼지로 된 사전이다. 네 층위를 차례로 살핀다.

잔여와 파편의 미학
사물은 늘 명령과 주문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과 관계하지 않는다면 사물은 터와 이름을 잃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물은 이 체계에서 탈주할 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대리석 ‘조각’은 대리석 계단이 지닌 쓸모와 부유함 이외의 것을 드러낸다. 그때 대리석은 비단처럼 투명해지고, 사막보다 거칠어지면서 제 존재의 표정을 처음으로 펼친다. 따라서 창작에서 질료는 단순한 마티에르가 아니라, 사물을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방의 사투다. 랑시에르가 말했듯 기왕의 미적 체제가 감각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질서를 정한다면, 신용진은 이 체제를 역류해 새로운 미학을 그린다. 프레임에 포섭되지 못한 것,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감각에 주목하면서 예술 아닌 것의 자리에서 그 잠재성을 실험한다. 예술이 체계에서 탈락한 사물의 본질을 찾는 일이라면, 예술의 지위마저도 탈락한 사물 아닌 존재를 다시 예술로 돌이킬 때 이는 어떤 전위에 설 수 있을까. 《이미지 되지 못한 이미지》(2020)에서 작가는 작업실 구석에 떨어진 안료 찌꺼기, 해체된 책상, 물감 묻은 천, 쓰다 만 화판을 끌어다 작업의 주인공으로 세웠다. 《이것은 논문이 아니다》(2024)는 논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텍스트를 예술의 형태로 고정하는 시도였고, 《객화》(2021)는 눈 없는 사물과 눈 마주치는 프레임 재배치였다. 신용진은 《공기색 입자》에서 먼지를 직접적인 재료로 가져왔다. 화면으로 재구성한 먼지부터 오랫동안 그가 축적한 쓰레기 더미까지. 어쩌면 그는 자기 자신보다 먼지를 더 내세우려 했는지도 모른다. 명령을 탈주한 자리에, 작가의 통제조차 벗어나 자신의 결과 겹을 펼치는 먼지가 있었던 까닭이다. 운명의 사투에 예외는 없다. 이 순간 예술(먼지)은 작가보다 먼저 예술(먼지) 스스로를 그려낸다.
모나드, 먼지의 형이상학
일반적으로 먼지는 시작이 아니라 결과로 여겨진다. 먼지가 된다는 말은 그것의 소명이 끝났다는 말이다. 그러나 신용진은 먼지를 끝이 아닌 출발점으로 되돌려 놓는다. 먼지는 생성과 재구성의 낟알 ‘모나드’다. 이 점에서 먼지는 단지 미시적 물질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 상태다. 형태 이후의 잔존이자, 형태 이전의 원형이다. 《객화》(2021)가 모티프로 삼는 프레임은 예술을 예술이도록 성립시키는 마지노선이다. 때때론 액자나 캔버스, 더 크게는 화이트 큐브라는 프레임이 예술을 예술로 인식되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예술에서의 더 이상 흩어지지 않는 결정체는 작품의 중심인 화면이 아니라 프레임에 있다. 예술 그 최소한의 조건은 그것을 둘러싼 ‘파레르곤’ 곧 경계다. 이러한 사유는 예술에서 더 이상 해체되지 않는 것, 무한히 미시적인 존재의 ‘핵’을 상상하는 실험으로 진입한다. 《유일무이의 수》(2022)는 기억을 화학식이나 가상의 수로 붙잡으려는 시도였다. 물질적으로는 먼지 또 형이상학적으로는 소수素數처럼 그 이상 쪼개지지 않을 기억을 식式에 대입해 망각이 불가능한 기억을 구현했다. 이번 전시의 〈원형의 양각〉(2024)과 〈원형의 음각〉(2024)에서 이 은유는 완결된 원圓으로 구성된 원자 구조와 연결된다. 〈공기색 입자_입체〉(2024)는 공기, 폐기물, 홀로그램 입자를 동심원 구조로 얽어 ‘보이지 않는 색’을 조형화했다. 공기 색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름 붙일 수 없으면서도 세계를 구성하는 그 어떤 것. 작가는 이 감각을 조형의 언어로 환기하고,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그들의 파동을 아로새긴다. 먼지가 세상의 일부라면, 세상 어디든 작품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착시…. 전시 동안 먼지는 공간 어느 편이든 도착했고, 그와 동시에 작품은 제 부피를 키웠다. 그렇다면 세상은 이곳에서 매일매일 태어난다.

몸의 기록, 노동의 흔적
먼지는 늘 몸을 통과해 쌓인다. 먼지를 만든 것도, 그것을 덮은 것도 결국은 몸이다. 신용진은 미술씬 한복판이 아니라, 늘 한 걸음 비켜나 있었던 ‘몸’으로서 예술을 살아냈다. 그는 미화원으로, 전시 설치 노동자로, 그리고 무엇보다 단색화의 대서사 아래에서 묵묵히 축적과 반복을 수행한 어시스턴트로 살아냈다. 먼저 《563》(2023)은 그가 미화 노동자로 근무하던 당시의 기록이었다. 〈오륙삼의 양〉(2023) 연작은 신용진의 먼지가 시간과 존재, 노동과 감각의 층위에서 어떻게 시각화되는가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여기서 그는 ‘1년’을 거꾸로 읊은 ‘563’을 통해 시간의 관습적 흐름을 교란하고, 24절기를 ‘이종교배’된 기호와 장갑의 흔적으로 대체한다. 화면에 녹여낸 미화원의 장갑은 그가 직접 체화한 밤의 노동, 낮의 정화, 세계 유지의 은밀한 조건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의 낮은 밤의 이야기 위에 있다.” 이 문장은 존재의 재정의이자, 예술의 재위치다. 예술은 때때로 완성된 작품보다, 그것을 만들었던 몸이 통과한 경로로 남는다. 그렇다면 예술은 예술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삶이 그랬듯 거리에서 노동에서 밀려온 것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개인전의 <gg칠 줄 모르는 수행자>(2018)는 수행이 수행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가시적 예술노동의 기록이다. 이는 랑시에르가 말한 기계적 수행과 예술적 감각의 경계가 무화되는 순간과도 통한다. 신용진의 손은 말 없는 기계와 같지만, 그 손끝의 감각은 분명히 예술의 언어를 지닌다. 그리고 세상이 다시 태어났듯 되묻게 만든다. 거리의 수많은 발자국과 손길이 스친 먼지 자욱은 어째서 예술이 될 수 없는가.
제도에 대한 질문
신용진은 말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텍스트로 규정된 질서를 믿지 않는다. 그가 《이것은 논문이 아니다》(2024)에서 쓰고 말했던 텍스트는 논문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문장의 잔해다―그리고 같은 지점에서 이 텍스트는 명령과 주문에서 탈락(주)한 텍스트라는 점에서 ‘텍스트 아닌 텍스트’ 즉 먼지다―. 전시는 그의 작업 중 가장 직접적으로 제도를 겨눈 실천이었다. 그는 실제로 대학원 과정에서 논문이 탈락됐고, 그 문장들을 퍼포먼스와 현수막의 형식으로 다시 꺼내 놓았다. 여기엔 논증도, 인용도, 학술적 설득도 불가해하다. 대신 어딘가 흔들리는 문장, 완결되지 못한 생각 그래서 살아 있는 감각이 남았다. 이 비非 ‘논문’은 불가해하다는 점에서 텍스트가 아니나, 진정 위대한 텍스트가 지시 대상을 뚜렷하게 규정하기보다 그를 규정에서 자유롭게 한다면 그 활자는 감각을 흔드는 언표가 된다. 그에게 진실한 언어는 표현이 아니라 탈락의 증거이며, 동시에 탈락 이후에도 여전히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진정 되묻는 것은 이것이다. 무엇이 예술인가? 누가 예술을 정의하는가? 그리고 예술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시작되는가?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이미지가 되지 못한 것, 쓰이지 못한 글, 전시장에서 ‘작품’으로 명명되기 어려운 사물을 반복해 제시했다. 공기 폐기물 족자 모빌 홀로그램 현수막 낭독 먼지…, 이 모든 것은 어떤 기준으로도 ‘예술’이 아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장자리에 서있다. 들뢰즈는 진리를 담아야 하는 모든 표현이 외계어로 쓰여야 한다고 말했다. 진실이 진실인 한해서, 진실은 표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예술은 제도에 속하지 않는 순간에서야 살아있는 질문이 된다. 신용진의 작업은 예술이 아니라, 예술이 될 수 있는―감각의―조건을 묻는 일이다. 그 질문은 먼지처럼 가볍지만, 가장 부서지지 않은 채 오래 머문다.

신용진은 《공기색 입자》를 열면서 창작이 “고통스러운데 그 속에 희열이 있는 것 같다”면서도 “이 감정이 굉장히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희열이 나오지 않을 날을 상상한다” 토로했다. 하물며 그가 “열심히 미술을 하다가 먼지가 될 것”이라 털어놓을 때, 우리는 그가 자기변명을 늘어놓지 않기 위해 고투하는 먼지의 고백을 듣는다. 모든 것이 먼지와 같고, 먼지는 파괴와 생성 사이를 진동하며, 또 그것이 외따로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특히 김수영의 의미로―온몸으로 뚫고 나가야 하는 것일 때, 신용진은 이런 먼지의 운명을 고스란히 예술(가)의 숙명과 겹친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을 위해 허공으로 나아가고, 끝끝내 사라지기 위해 나락으로 돌진했다. 기왕의 예술엔 언제나 되돌아가 기댈 수 있는 이념이 있다. 그러나 오늘을 부정하고 새로운 정의를 길어내려 하는 이념은 지금 이 순간 전위적일지 몰라도, 답이 이룩된 순간 그 행렬은 이후의 체제를 지키는 바리케이드가 된다. 단 한 번 세상을 뒤집는 것이 아니라 빠짐없이 세상을 뒤집기 위해선, 찰나가 아닌 끝까지 예술이기 위해선 우리는 영원히 흩어졌다 뭉치기를 거듭하는 먼지가 되어야 한다. 배신자의 한숨을 내쉬면서 완성된 의미를 부수어야 한다. 그 역설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치열하게 모순을 동어 반복한다. 이들이 배신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영원히 다른 곳으로 향하면서도, 그 장소의 윤곽을 마지막까지 발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고통의 절대성만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온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고, 김훈은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라고 적었다. 그렇다면 신용진은 오직 먼지의 편이라고 말할 것이다. 단지 먼지의 편이라면 그 다음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 세상이 먼지… 때론 구체적이고 완고한 이념보다 이것이 우리를 미래로 데려갈 줄을 믿지 않으면서 믿고 있다.
참조
신형철,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문학동네』 제14권 4호, 2017, pp.1~13.
자크 랑시에르, (박기순 옮김), 『아이스테시스』, 길, 2024.―――, (오윤성 옮김), 『감성의 분할』, b, 2008.
테오도어 W. 아도르노, (홍승용 옮김), 『부정변증법』, 한길사, 1999.
Gilles Deleuze, Translated by Daniel W. Smith and Michael A. Greco, Essays Critical and Clinical.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
◼︎ 신용진 개인전 《공기색 입자》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