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은 어떻게 오지_강원제: 선택되지 않은 그림

강원제, <Unselected painting>, 60x310x70cm, 2020

1
완제품으로서의 작업은 한 사람의 작가’임’을 증명하기보다는 오직 그가 작가’였음’을 증명한다. 작가는 자신을 증빙해 줄 예술이 등록된 재직 증명서도, 월급명세서도 그리고 명함조차 쉽게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 그는 작업 이후에 외부에서 스스로를 증명할 그 어떤 것도 동원할 수 없다. 작업 이후 작가는 그 어떤 것도 증명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내 소등의 시간을 맞는다. 작업은, 그것이 완성되자마자 작가를 자신이 초대한 한 명의 손님 내지 관객으로 만들고 말았다. 작품이 늘 작가보다 말이 많음은 바로 이런 까닭일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의 작가’임’은 오직 생성으로서의 작업, 즉 완료되지 않은 작업으로써 증명된다. 작가의 정의가 ‘문학 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일 때, ‘하는’이라는 현재형 시제는 이다지도 엄격한 조건을 이른다. 그래서 작가는 —그가 작가임을 유지하려는 한— 많은 시간을 작업을 완료시키려는 자기 스스로와 다투며 보낸다.

따라서 작업의 완성이 말하는 것은 그의 승리가 아닌 패배다. 그러나 그의 패배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데 성공한다. 작업의 의미란 소등의 시간을 저지함으로써 다툼에서 승리하여 얻게 되는 노획품이 아니다. 의미는 그저 다툼 그 자체 속에서만 존재하다 사라지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삶이 의미를 가지는 일이란 오직 그리고 겨우, 작업을 시도하는 그 중간의 순간이 된다. 그런 한에서 강원제는 가장 마지막까지 작가이기 위해서, 스스로의 작가’임’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사력을 기울이는 작가이다.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전시가 또 더 많은 상영이 그러니까 비로소 역사상 최대의 예술이 존재하는 시기가 되었으나 그만큼 세계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자, 의미는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술이 지속되는 것은 아직 찾지 못한 의미가 남아 있기 때문이고, 필요한 의미가 발휘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 전하려 한다. 그가 예술 안에서 가장 첫 번째일 리는 없다. 그러나 그는 가장 마지막까지 작가일 것이다.

2
완벽한 회색은 마치 은회색이나 목탄회색, 올리브회색과 같은 ‘어떤 회색’이라는 호명들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그저 ‘회색’이라고 일컫는 단 하나의 회색일 것이다. 그러나 색이 그저 빛의 반사로 얻어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라면, 그리고 —빛의 양과 시점의 위치는 늘 이동하는 것이기에— 찰나의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완벽한 회색은 도무지 도착할 수 없는 지대이다. 그럼에도 작업은 완벽한 회색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말하려 하지 않는다. ‘완벽한 회색’이 정지된 성취의 대상임이 부정된다고 하더라도, 경유의 대상으로서 가능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찰나들을 지속한다면 완벽한 회색은 어쩌면 벌써 존재했거나 혹은 앞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완벽한 회색을 향해⟩ 연작은 어느 순간에 완벽한 회색에 도달했거나 도달할 것이다. 이 작업의 의미는 배치된 완제품에 있지 않다. 의미는, 징검다리 사이에 끊임없이 흐르는 개울이 있는 것처럼, 이 연작의 배치들 사이에 완벽한 회색을 향한 흐름 속에 놓여진다. 작업은 도착하지 않고서 마지막까지 과정으로서 지속되는 것이다.

60kg의 성인으로 가정했을 때, 한 명의 인간은 산소 38.8kg, 탄소 10.9kg, 수소 6.0kg, 질소 1.9kg, 칼슘 1.2kg, 인 0.6kg, 칼륨 0.2kg의 총합으로 구성된다. 이 질료들은 시장에 가면 아이들의 용돈으로도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무게’가 60kg의 수치나 그 질료의 값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60kg만큼의 측정은 오직 그 무게와 값만으로는 그것의 의미를 도출할 수 없다는 것만을 말할 뿐이다. 측정은 가능하지만 그 측정이 무엇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모순에서 의미는 비로소 출현한다. 인간의 무게, 즉 의미는 수數로는 늘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무거운 그림⟩은 각각의 작업의 구성과 형상을 모조리 배제한 채 집적되어 그것의 무게만을 남긴다. 그러나 20~30kg에 해당하는 무게를 측정하고도 수는 어느 것도 말하지 않고, 예술의 무게는 밝혀지지 않는다. 인간처럼 예술은 수에서 벗어나 있다. 거래의 대상이 되어 수가 따져진다 하더라도, 산술적으로 늘어나는 시간의 수를 상대한다고 하더라도, 미술은 수를 영원히 모르기에 의미를 마지막까지 지켜낸다.

데카르트가 합리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합리주의가 데카르트를 만들었다는 말에 동의한다. 동시에 이 말이 예술의 경우라면, 어떤 작가가 예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어떤 작가(작품)를 만드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작가는 작업을 계획에 따라 통제하려고 하지만, 계획은 때때로 작가의 손을 계획보다 부족한 것으로 또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일정한 지경을 벗어난 것이 예술적이란 수식어를 얻듯이, 홈 패인 공간을 그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탈주함으로써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이 계획으로부터의 미끄러짐은 예술이 종용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작업이란 작가의 계획과, 그 계획에을 초과하는 예술이 지어낸 탈주 간의 공모일 것이다. ⟨선택된, 선택되지 않은 그림⟩이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모이다. 예술이 종용한 것보다 작가의 의도를 최대한 따르는 것이 전시의 구성으로 선택된 작업이라면, 선택되지 않은 작업은 작가보다 예술의 종용이 큰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작가의 의도가 ‘더’ 반영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의 의지가 ‘더’ 반영된 것이다. 전자는 작가의 역량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후자는 예술의 역량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타의 작업이었다면, 전자는 성공의 산물로서 선택되었기에 전시를 향해 오려져 탈각되고, 후자는 실패의 산물로서 선택되지 않았기에 오려진 빈 곳을 감당하며 정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된, 선택되지 않은 그림⟩에서 둘은 동시에 혹은 섞이어 전시를 향해 나선다. 다시 말하자. 작업의 완성이 말하는 것은 그의 승리가 아닌 패배다. 그리고 이 패배는, 의미란 작업의 완성이 아닌 작업 중에서만 겨우 존재하다 사라지는 것을 입증한다. 모든 작업에는, 모든 시도가 결국 완성을 향해 가진 못했다는 작업 중의 패배가 또 한 번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강원제는 이를 감추지 않는다. 실패만이 작업의 종결을 미루고 의미의 지속을 연장한다면 실패는 더더욱 드러나야만 하는 까닭이다. 작가’임’이 멈춰지는 작업이 완성된 순간에 그는 도로 실패한 작업으로 돌아가 다시 작가’임’을 지속한다. 이것이 그가 가장 마지막까지 작가일 연유이다.

3
상품과 예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상품에게는 물음되지 않는, 누가 그것을 제작했는지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 어떻게 제작되었는지와 같은, 과정에 대한 물음이 던져진다는 것이다. 이때 모두는 예술에서 결과된 것으로 도착한 물질이 결코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결국 일부에 불과하다는 이 짐작은, 결과가 전부라고 전해지는 상품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가장 서정적인 예술도 최소한의 사회적인 성격을 지닐 수 있는 여지를 지켜낸다. 인터뷰에서, 강원제 작가는 삶과 예술이 어떻게 일치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고 했다. 삶과 예술의 일치라는 구호는 예술로서 세계를 변혁하고자 했던 아방가르드의 옛 구호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고민과 다르게 사회적 사건을 다루고 있지 않으며, 사회적(일상적) 사물조차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급진적일 수 있다면, 그의 구호가 사건이나 광장과 같은 투쟁의 처소가 아닌 일상에서 번지기 때문일 것이다. 투쟁의 처소가 아니더라도, 저녁을 기다리는 창문 곁에서 그런 구호가 번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앞 선 이들이 아니라 가장 마지막에 우물쭈물 나서는 이들조차도 꿈을 꿀 수 있도록 하지는 않을까. 다시, 저녁은 오고 소등의 시간은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저녁을 어떻게 지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 조재연

이 글은 ⟪BE TRUE⟫ 도록 게재를 위해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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