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가장 길었던 밤. 바다를 쏟는 사막에서 지느러미가 바삭이는 붕어, 영원히 익지 않는 검은 열매를 두고 우린 별처럼 웅성거렸다. 부자가 되는 행운에 대해서 말했고, 유전을 찾느라 모래에 새긴 발자욱과 서풍에 잠긴 길을 돌이켰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진짜 아버지는 어둠 후에 잠 말고 어떤 시간이 있는지 몰랐으므로, 혹은 손톱과 머리칼 이외에 물려줄 게 없어 오늘 말한 그런 저택의 주인은 될 수 없을 거야. 부서지기 전에도 처분할 수 있는 가구, 헤어진 연인과 동시에 내쫓을 수 있는 집기로 채워진 사물의 집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허름한 가게가 문을 닫는 것만으로도 눈물짓고, 온 세상 대신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더라도 축하해주며, 둥글게 모여 앉아 투명한 모닥불을 소리로 이룩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 우리가 최근에 알게 된 가장 가난한 이는 🦋였다. 그는 허구 속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탕진하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난했다. 모래성이 어떤 모래가 되고 다시 다른 모래로, 처음이 되는 과정을 가질 뿐인 그 이름. 아름답고 반짝이지만 그 안에서 살 수 없고, 한순간 무너지며 모래로 응결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작가의 이름이 영구적인 것이라 전한다. 명함에도 소속에도 얽매이지 않기에, 작가는 작품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 작가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작품은 그가 작가‛‘였음’을 증명할 뿐, 작가‘임’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작업을 제작‘하는’ 존재를 이르는 명칭일 때, 그는 작업을 통해서 그 이름을 전리품처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작업 그 자체 속에서만 작가가 되었다가 완성과 함께 사라진다. 그는 작업을 하는 그 순간에만 겨우 작가일 수 있다. 작가의 지위는 늘 시한부적이거나 간헐적인 것에 불과하다. 달리 말해서 작업은 작가에게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제작 안에서 그는 스스로를 작가로 만들어줄 하나의 생각을 제물로 바쳐야 하고, 완성이라는 이름의 죽음으로 제힘을 다해 걸어 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작품은 그렇게 늘 사라질 각오로서, 마지막 작품으로서 등장하고 만다. 예술은 학문과 달리 믿지 않으면서 쓰이고, 의심하면서 그려진다. 증거가 있기 때문에 믿음이 유지된다면 그것은 진실하지 않다. 단 한 번 응답받지 못했던 이상理想 이후에도 기도를 지속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변치 않는 세상보다 자신에게 죄를 물으며 비명을 질렀던 까닭이다.
외웠던 반역의 구체적인 이름은 더는 소리 나지 않는다. 🦋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어떤 것’에 대한 희망은 아니었다. 외려 그의 기도는 희망 그 자체를 지키는 데 가깝다. 그가 증명한 것은 그가 있기에 기도가 존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그 없어도 기도에 헌신할 이들의 허구다. 그가 응답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두는 알고 있었다. 반대로 모두가 모르는 것은 그가 누구인지였다. 멀리서 파랑을 건너오는 동안, 그리고 자맥질 안에서 뭍과 물 사이를 진동하는 반복, 또 모래에 둘러앉아 꿈을 깨 중얼거리는 순간조차도 우린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발음할 수 없어 발음하지 않았다. 현명한 누군가는 영원히 작가이기 위해 언제까지나 마침표를 유예하고, 획이 지닌 말이란 그치지 않는 것이라고 습관처럼 성찰하지만, 그는 공주처럼 생성 안에서도 날개를 여러 번 물결에 절고, 익사를 거듭했다. 몸이 없는 존재가 되는 꿈에 가닿기 때문일까. 혹은 그의 벗이 파도를 타는 일보다 파도를 기다리는 일이 더 즐겁다고 말해서였을까. 상식과 정반대로 꿈에 존재했던 그는 깨어남과 동시에 사라진다. “꿈 깸”에서 익명의 여럿은 그 후를 살아간다. 그의 등을 밀었던 우리는 이제 도리 없이 그의 길을 제 길처럼 제 길 삼아 가는 수밖에 없다.
사건으로서의 예술. 유행어 혹은 이념 사이를 진동했던 두 어절은 분명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반향을 가리킨다. 여기엔 한 시대의 문학, 한 시대의 그림 다음에 출현할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문구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 어떤 말도, 색도, 형태도, 몸짓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이 문장이 마지막 문장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파도가 매일 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잊혀있다. 어쩌면 예술은 영원하지 않다. ‘어떤 것’을 위한 예술 나아가 반역하는 예술이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예술이 남아있어야 하기에, 종말보다 앞서 예술을 지켜야 한다. 미래에 아첨하지 않은 채, 사건으로부터 모든 보기를 보호하는 것. 작가 아닌 미상未詳, 이미지 대신 텍스트,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함, 퍼포먼스를 행하지만 장면과 함께 소거해버린 몸, 그러니까 작가가 되는 유일한 순간마저도 작가(예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꿈 깸”은, 사건이 영원히 시작되지 않도록 시간을 과거로 무너뜨린다. 사건 이후라면 예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전이라면 이 뒤에는 오직 그의 탄생만이 남는다. 마주칠 때마다 첫 표정, 첫 경험으로 돌아간 엄격한 그를 본다.
나는 🦋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뒤로 과거로 날갯짓하는 것을 빗뜬다. 사랑의 고백과 이데올로기의 선언처럼 예술의 급진 역시 시발에 있다고 믿고 있다. 자본과 노동, 난민, 이주라는 낱말을 드물게만 사용하는, 혹은 그것보다 이전의 개념으로 돌아간 그는 어느 때보다 새삼스럽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를 알아볼 수 없지만, 그 없이도 비로소 세상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도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라는 예비도 오늘 가장 믿을 수 있다. 글을 적고 집기를 모으고 현을 퉁기는 모든 일을 우리는 자리에서 처음 해본다. 기도를 지키기 위해서 과거로 떠난 그의 자리에 선 우리는 그의 얼굴과 이름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태어난 그는 반역의 구체적인 이름을 서서히 다시 발음할 테고 실패를 마주하겠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또다시 패배 이전으로 돌아올 것이다. 짐승의 발이 자욱을 남기는 것과 다르게 나비는 어떤 흔적도, 얼룩도 남기지 않는다. 모래성이 건조되기 이전의 광야와 그것이 무너진 폐허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밤들이 재티처럼 날아 모래로 쌓인 아침. 이제 더는 모래가 잔여물이 아니라 모래성의 배후임을 눈치챘다.
참조
진은영, 「선행 없는 문학」,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pp.57~71.
J. F. 리오타르, 이현복 역, 「숭고와 아방가르드」, 『지식인의 종언』, 문예출판사, 1993, pp.176~228.
▲ 차지량 《dream pop》 도록에 부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