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하강을 추락(墜落)이라 일컫고, 그 운명을 제 힘으로 받아들이는 하강을 낙하(落下)라 부른다. 그리고 기어이 부딪쳐, 가로막은 것을 부수고, 스스로 부서지길 결단할 때 하강은 투신(投身)으로 뒤집힌다.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던지는 것. 추락이 ‘겪는’ 것이고 낙하가 ‘들이는’ 것이라면, 투신은 ‘행하는’ 것이다. 홍성준의 그림은 이 일련의 서사를 따른다. 추락이 낙하로, 낙하가 마침내 투신으로 전복되는 순간에 나아간다. ‘회화’가 세계의 진실을 포착하는 것일 때, 그는 겉모습뿐 아니라 세계의 방향과 크기 즉 벡터 전부를 이행해야 한다. 이곳은 늘 떨어지고 있다. 빛이 떨어지고, 사물은 가라앉고, 생명은 땅속 깊이 흩어진다. 따라서 붓이라면 하강의 이름으로 풍경을 담아야 한다. 그러나 회화는 또한 세계의 진실과 싸우는 일이기도 하다. 거스를 수 없는 질서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그 질서보다 한 발자국 더 빨리 내디디면 된다.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 물결에 맞추어 물장구를 치는 것. 이때 그림은 누구보다 앞질러 세계에 도착하고, 표면을 깨트려 본 적 없는 세계를 연다.
홍성준 회화에 안정적인 서정의 틀과 불안정한 과잉적 감각이 뒤섞여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범박한 일상의 비범함을 발견하는 일로도 충분히 작품을 읽을 수 있지만, 여기에는 불편하거나 고집스러워 보일 감각의 향연도 허다하다. 매력은 후자에 있고, 그 매력이 문제적이다. 이 불편하고 고집스러운 대목이 우리에게 하강을 감지하게 만든다. 명료한 실마리를 제시하진 않지만, 정지와 부양을 멈춘, 떨어지려고 하는, 혹은 속도를 이미 초과한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2010년대에 그렸던 그림을 먼저 살핀다. 시점은 대지로부터 멀어져있고, 중심인물은 마치 인형처럼 작다. 이는 원경의 풍경이기보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일종의 조감(鳥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주변은 조감처럼 한눈에 질서정연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이들은 색 면과 기하학으로 환원돼 있다. 단축 아닌 환원. 단축이 부양의 길이라면, 환원은 하강의 문법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회화에 대한 회화, “평면과 환영이라는 본질을 구성하는 물리적 가능성과 개념 사이의 관계망을 탐구한다”고 말했다. 하강의 절대적인 속도가 실재를 또 회화를 이다지도 납작하게,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그림에는 상승이 먼저 있었다고 읽힌다. 자신의 환경을 뒤로하고 솟아오른 높이가 지상의 굴레를 잊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승이 해방적이라 하더라도 모종의 상실감은 해갈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그림의 눈높이는 현실의 굴레에 제 몸을 붙잡힌다. 반면 상공의 풍경은 도피의 알리바이다. 자유를 쟁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을 상실한다. 그림은 이 순간 잠시 낙하를 결심했다가 투신을 결행했다. 구체적인 현실을 지니면서도―일상의 인물과 풍경―, 현실보다 앞서는 것―색 면, 기하학―. 현실의 표면과 함께 부서져 그 너머에서야 비로소 가장 현실적인 추상에 다다른다. 분명 그림의 바탕에 놓인 결과 겹, 그리고 이 사이를 수놓은 웅성거림은 그렇게 느껴진다. 설치작 〈무제〉(2012)와 〈[Fn art space] 50people〉(2012)는 그 투신의 충격으로 산산조각 난 세상의 파편이다. 전자에선 하강의 궤적대로 흩뿌려진 거울 조각이 부서진 세계를 반사해 내며, ‘지금 여기’가 (재)조립되기 이전의 날것의 실재―현실보다 앞선 현실―를 중얼거린다. 후자에서는 조각난 얼굴이, 깨진 표면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비인칭의 시선을 읊조린다. 이 구성은 붕괴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과 세계의 출현이다.
2020년대에 들어와 작가가 표현하는 하강은 달라진 호흡을 보인다. 과거의 하강이 한 존재가 세계로 투신하는 장면을 드러냈다면, 근작의 하강은 세계 자체의 투신, 그러니까 세계가 자신을 향해 몸을 던지는 사건으로 포착된다. 전자가 세계의 진실에 나아가려는 주체의 운동이었다면, 후자는 세계가 스스로의 진실에 도달하는 자기 갱신의 과정이다. 〈Study Layer〉 연작은 캔버스가 점차 바탕으로부터 분리되고 떨어져 나가는 이미지가 중심을 이룬다. 세계를 담은 화면이, 즉 세계 전부가 바닥을 향해 투신을 시작한다. 한편 〈Layers of the Air〉 시리즈에서 세계는 물방울에 담겨있다. 세계를 품은 물방울이, 이번에도 세계 전부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그렇다면 이즈음의 회화는 어떤 인식을 생산하는가. 서두에 했던 말을 바꿔 말하자, 회화는 세계를 포착하면서도 세계를 거슬러야 한다. 여기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지금’의 세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득히 지지 않는 태양도 영원히 뜨거운 상태로 식어간다. 멈춘 것처럼 보이는 세계조차 끊임없이 생성하는 과정에 있음을 인식할 때, 비로소 세계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야 바뀐다―바꾼다―. 겉으로는 정지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추락 중인 세계. 그 내밀한 운동을 드러내는 일. 그의 회화는 하강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렇게 견고한 세계를 ‘다시’ 떨어지게 만든다.


추락, 낙하, 투신. 홍성준 회화는 한 주체의 하강이 현실 전체의 하강으로 확장되어 온 여정이다. 누군가 세계와 함께 부서지고자 투신했고, 부딪친 그곳에서 하강은 또다시 시작돼 마침내 세계의 투신을 목격한다. ‘하강’이라는 개념으로 묶었지만,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의 그림이 사유 이전에 감각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사유를 재료로 출발해 감각으로 향하는 동시대회화의 흐름에서 그는 거꾸로 감각을 통해 이념에 도착하는 길을 선택했다. 상징과 내러티브가 하강의 의미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하강의 감각이 상징과 내러티브를 생성한다. 여느 그림처럼 인물, 자연, 기호가 자리하지만 이들은 유기적으로 화면을 조직하기보다, 외려 그 연결 고리를 풀어버림으로써 각자가 더욱 빨리 떨어지도록 부추길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홍성준 회화에서 하강의 사유를 인식했다면, 그것은 감각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사유를 빚은 일이다.
하나의 일반론으로 마무리하자. 1882년 여름 니체는 “모든 것에 대하여 그저 ‘그렇게 되었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사랑이다.”라고 쓰면서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Amor fati)’는 명제를 제시했다. 인생의 파도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물결에 적극적으로 들어가 합류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온전한 힘을 실현한다. 인식이 있든 없든 하강이 현실의 질서라면, 작가의 자발적인 하강은 아마 누군가에게 어떤 타협의 산물처럼 보일지 모른다. 어차피 모든 것은 떨어질 테니까. 그러나 어디에 도달할지에 대해 묻는다면 결과는 달라진다. 추락과 낙하 그리고 투신. 여기서 스스로 제 몸을 던지는 자만이 가장 깊이 닿을 것이다. 그렇다면 홍성준이 발견한 것은 회화의, 세계의 온전한 힘이다.
◼︎ 호반문화재단 멘토링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