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나 고맙다라는 말과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고지식하게 같은 의미로 응답되기를 요청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요청하냐는 물음은 단순히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동어반복으로 해소될 수밖에 없으며, 또다시 왜 사랑하냐는 물음 또한 해답을 얻기는 대부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물음을 우리는 언제나 사랑에 빠진 후에야 역으로 던질 수밖에 없으며, 그런한 그가 기꺼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말로밖에 풀릴 수 없는 동어반복에 우리는 다시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관점을 사랑한다는 말에 응답하는 자의 몫으로 돌려야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들은 그가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원인을 타인에게 제공했다고 사고하며,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다라는 인정에 그친다면 그가 요청에 응답하는 일이란 요원할 것이다. 그의 맘속에 샘솟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부심이란 감정일테니까. 그러므로 사랑에 응답하는 놀라운 일은 그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만한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사고하면서, 그것이 자부심으로 향하는 인정으로 향하지 않을 때라는 조건 위에서 일어난다.
이 조건은 사랑받을 원인도 없는, 그것을 자부하지도 못하는 ‘나’ 즉, ‘결여’된 나를 필연적으로 확인하게 만든다. 그렇게, 사랑받는 ‘나’는 새삼스럽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해야한다. 그리고 그 확인이 존재 내부의 결핍으로 연결되었을 때, 타인에게 받은 사랑이 나를 더 사랑하게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의 비어있으며 부족한 부분으로 이끌었을 때 그런 후에야 타인의 사랑에 나는 응답하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원한다는 말보다 필요하다는 말에 더 닿아있으며, 사랑의 시작 앞에서 작아지거나 무쓸모한 자신과 제법 마주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디판(Dheepan)>은 근래에 유일한 형태로, ‘사랑’의 논리를 대체 불가능하게끔 정확하게 현상하는 유일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되는 한 가족의 아비와 어미 그리고 딸은 가장된 존재들이다. 남자는 타밀의 반군으로 활동하다가 가족과 동료 그 모든 것을 상실했으며, 여자는 내전의 폐허란 공포 위를 탈출하기를 희망하고, 소녀는 내전으로 부모를 잃어 그 눈에는 초점이 없다. 그들은 처음 만났지만 브로커에게 산 여권으로 ‘가족’으로 가장되어 파리 외곽의 이민자가 된다. 그렇게 남자는 디판이라는 이름의 아비가, 여자는 얄리니라는 이름의 어미가 그리고 소녀는 일라얄이라는 딸로 서로에게 그리고 새 터전에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밤마다 울리는 총소리와 그들을 경계하고 위협하는 눈초리에서 그들의 새 터전조차 갱들이 지배하는 무법지대임을 직감하며, 그들은 다시 또 다른 위기 위에 서게 된다.
이 위기 속에서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위기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위기를 맞아 변화하는 세 명이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대응은 변화가 택한 형식 후에서 드러난다. 위장된 가족이 처음 파리로 대피했을 때,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어도 일라얄을 제외하고는 각자는 스스로 살아나갈 수 있으며 어떻게든 일라얄을 떠넘기고 싶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의 타자로서 세계와 불화하며 파열음을 일으키고 이윽고 깨닫는다, 그들 스스로는 결핍된 존재이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랑을 (응답)해야한다는 것을. 그들은 지켜야할 이가 생긴 후에야 또 스스로의 자리를 보존해야할 이유가 생긴 후에야 즉, 그러니까 사랑한 후에야 더 단단하게 세계에서 버틸 힘을 갖게 된다. 영화는 이 과정을 설득력있으면서도 상투적이지 않게 또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 묘사는 어쩌면 당연히 나올지 모를 “그들이 처한 위기라는 불가항력이 타인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끔 만든 것은 아닌가”라는 그래서 진정한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감히 제기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타인의 제공을 이용하는 경제적 관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셋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제공하지 않은채 오직 존재하게끔한다. 위조된 이름으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서 디판으로의 코스프레를 통한 ‘생존’이 아니라, 남자는 오롯이 디판이 되려하는 ‘존재’를 목적으로 둘 때 일라얄과 얄리니는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다. 그리고 스스로가 스스로이게끔 본질적 의미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타인을 설명하는 단어를 우리는 ‘사랑’말고는 가지고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이야기가 있다면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어째서 보통의 사랑의 논리를 현상하는데 이민자라는 주체가 필요했을까라는 사유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사회의 타자나 하층을 다뤄왔지만 한사코 정면으로 무언가를 고발하는 의식적인 영화로 해석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디판>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디판>이 아름다운 사랑을 담은 영화로 받아들여지길 기원했으며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통인-보편적인 가치를 표상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의식적인 영화로 해석되길 거부한다고 해서, <디판>의 결론이 의식의 진보로 진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의식적이기를 거부함을 통해서 의식에 도달하는 거대한 전략을 실행하는데 가까울 것이다.
이해라는 것이 분석학적으로 공통의 지평에서 타자와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면, 공통의 지평은 특수하다는 것이 의미하는 차이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공통의 지평은 오직 사실은 타자와 나는 동일하다는 ‘보통’들의 발견에서 도달되며 형성된다. 이것은 마치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얼마나 특수한 사랑와 특수한 문화를 가졌는지에 대한 인식보다,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랑을 나누는 존재라는 인식이 성소수자 차별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의 특수성과 그런 특수성에 얽힌 고통과 설움들을 고발하는 것은 타자들을 확실히 부각시킬지는 모르지만 그들에 이해를 성사시키고 그것이 궁극에 -타자에 관한 언어로 말하면-주체화시키는 과정에는 왜곡이 발생하거나 실패할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한사코 특수한 모든 것을 주변부에 밀어내고 중심부에 ‘보통’의 사랑만을 보존한다. 또 그렇게 영화는 의식적이기를 거부하는 듯 보여도, 이민자에 대한 그 어떤 정밀한 고발/르포보다 타자를 더욱 우리의 지평 안으로 도달하게 만듦으로 의식적이지 않을 수 없게끔 한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는 이민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외칠지 몰라도 영화 후에는 모든 인간의 생존을 보장해야한다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 조재연
*참조
– 신형철,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정확한 사랑의 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