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판이 아니라고 반하고 싶었지만, 인상착의도 그림자도 없이 체포되는 그를 보게 된다. 아무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물을 수 없다. 찾아온 이가 들을 수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저지르지 않은 죄와 그래서 어떤 혐의인지도 알지 못할 죄에 대해서 혐의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법정은 이 체포만큼이나 맹목적이고 불가항력이어서 소(訴)는 심판이 아닐 길이 없다. 한 치도 순결하므로, 그는 법정에 회부되었음에도 법으로 들어가 출구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출입은 마냥 지연될 것이다. 법이 알려지지 않은 선에서 또 어떤 죄인지 모르는 선에서 그러니까 영원히 맹목적인 한에서만 심판은 공평한 까닭이다. 다시 말해서 심판이 공평한 연유는 어떤 조건도 없이, 어디도 살피지 않고 공평히 유죄만을 언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은 어디에도 없을 것만 같지만 또 어느 곳에도 없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삶의 내내 선명히 있는 심판이다. 미심쩍고 유감스러운 이 법의 이름은 늘 섭리로 불렸다. 매일 새로운 소식에 포함된 무죄한 약자, 타자, 소수자 따위들의 고통도 늘 그런 것이다.
이다지도 조건 없이 유죄를 추정하며 난입하는 이에게 결국 신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심하고 서늘한 이 허무 앞에서 신은 비로소 탄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승리도 패배도 없이 초래된 선고를 감당하기보다, 이 모든 일에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섭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차라리 의미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니 ‘왜 무죄한 이들이 고통받는가’라며 신에게 따져 묻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도 또 사고(事故)의 물리법칙과 인과관계 그리고 이와 얽힌 인간의 법과 이해관계를 추적하면서도, 세계의 참혹에 눈물을 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왜 끝끝내 신은 인간의 불행을 방관하는지에 대해 역전된 기소를 실행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를 기소하는 순간 티끌만 하게 남아있는 의미조차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을 기소할 수 없게 되자, 우리는 그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기소 역시 어려워지게 된다. 무엇이 섭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면, 섭리가 아닌 것 역시 구분할 수 없는 까닭이다. 세계 자체가, 이 전부가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변혁을 요구하는 의식을 함구하고 부분적인 것과 수정에 천착하는 앙상한 인식은 그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섭리는 영영 모를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 모든 것을 모두 가능하게 하기 위해선, 소거할 수 있는 모든 부조리를 모두 소거하기 위해서는, 유죄추정원칙을 고수하는 신마저도 기소해야만 한다. 최수련의 《태평선전》(인천아트플랫폼 윈도우갤러리, 인천, 2020)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선다. 그가 작성한 기소장의 명의는 마땅히 심판에 반하는 악마의 이름으로 적혔다. ‘여종’의 이야기든 ‘채모’의 이야기든, 작업 속에 인용된 죽음은 언제나 죄목도 사인(死因)도 없다는 데서 부조리하며, 그 부조리만큼 신이 주관한 섭리에 닿아있다. 신은 이처럼 늘 부피를 고려하지 않고 전부를 죄인으로 대우한다. 그러나 악마는 오로지 죄 가진 이만을 미워한다. 오직 죄악을 저지른 이만이 그의 나락으로의 수용이 허락되고, 신이라면 가담하지 않으려는 형벌에 악마만이 죄를 미워하기에 죄인에게 고통을 준다. 악마가 악행에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부조리가 만들어낸 소문에 불과하다. 그가 악행을 사모했다면 볕이 들지 않는 곳에서 죄인의 비명을 제작하고 있을 리 없다. 악마(를 인용하는 것)만이 부조리를 해소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영원히 포기했던 참극과 불행에, 영원히 맞서기 위해서 《태평선전》은 “(권선)징악의 세계관과 그에 대한 비관적 인식을 담고 있”는 “귀신이 하는 말 혹은 귀신에게 하는 말”들로 기소문을 작성할 수밖에 없다. ‘네 잘못이 아니야’에서 그치지 않겠다. 그러니 네가 아닌, 너를 제외한 전부를 바꿔내겠다. 전시는 그렇게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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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담기 힘든 전시의 규모와는 다르게 《태평선전》은 단지 하나의 작업의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거기에는 기존의 작업에서 옮겨진 것도, 이 전시를 위해 출생한 것도 있지만, 그것들은 독립으로서의 상태도 부분으로서의 지위도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의 파노라마로서만 자신을 존립시킨다. 이 하나 됨은 전시가 종료된 이후에도 분리되거나 분할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불가역적이다. 그리고 이는 섭리와 섭리 아닌 것을 구분 짓고자 하면서, 전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 체하고 부분만을 상정하려는 앙상한 인식에 대한 비판에 가닿아 있다. 이 과정이, 개별적인 것이 인위에 의해서 하나로 산적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외려 파노라마가 보여주는 것은, 전체란 분할되어 있던 부분의 집산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아니라 분할할 수 없는 연접과 연결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개별은 스스로의 출처로 전체를 늘 망각하지 않고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분할된 것으로 보이는 이후에도 총체성은 소실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렇게 이 작업이 하나의 그림이듯, 세계 ‘전부’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은 가능해진다.
하나의 그림이 공시적으로 총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에서 그림의 제재는 통시적으로 세계의 총체를 드러낸다. 작업은 레퍼런스로 『Pictures for Use and Pleasure: Vernacular Painting in High Qing China』(2010)라는 청나라의 풍속과 문예를 소개하는 동명의 책을 경유했다. 이방인의 입장과 근대라는 시선에서, 책 속에 함유된 전통은 삶을 포괄하는 맥락이 아니라 삶에서 유출된 이물(異物)로서 드러난다. 이 전통은 당대의 문화가 아닌, 신화와 실재가 구분되지 않았던 시원(始原)의 시간대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이물감에도 불구하고 시원에 함유된 부조리와 근대의 부조리는 내용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또한 현대라고 명시된 지금에 여전히도 통약된다. 구분되지 않음으로써 시원의 이야기는 시간 위에서 근대를 지나 현재마저 질주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 지속된 향방이 증명하는 사실은 시대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공시적일 뿐만 아니라 통시적으로도 세계가 하나인 전부로서 밝혀지게 된다. 그로써 부분의 수정이 아니라 전부를 변혁하는 실천의 조건은 언제나 어디서나 가능해진다.
두 개의 민담이 전시를 통해 제시된다. 하나는 ‘여종과 수징’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여자와 채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여종은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사자의 명부에 있었기 때문에, 수징은 그의 여종을 집에 두었기 때문에 죽는다. 다른 이야기의 여자는 그냥 죽으며, 그것을 본 채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어쩐지 죽는다. 두 이야기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가 인물들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에만 있지는 않다. 외려 더 중요한 것은 두 이야기의 죽음이 하나같이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의 인물성을 묘사하거나 규정할 수 있는 인상착의, 행적, 성격 등을 죽음과 결부시켜 죽음의 원인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인물에 속한 어떤 것도 도무지 개연을 맺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 민담의 일반적인 주제는 권선징악을 향하지만, 최수련은 무죄한 이가 고통을 겪는, 죄 없이 죗값을 치르는 부조리가 강조된 이야기를 선택했다. 민담에서 권선징악이 일반적인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일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조리한 실재가 그러한 방향으로 이동하기를 바라는 기원에 기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죄한 이가 심판을 받는 것이 실재와 더 가깝다.
채모의 죽음을 전하고 있는 서술자는 “드디어 죽었다”라며 종결을 짓는다. “드디어”는 어떤 것을 말미암아 바라던 결과를 나타내는 말 앞에 쓰임을 갖는 부사이다. 이 죽음들에서 말미암을 원인이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라던’이라는 서술의 주체를 설정할 수는 있다. 그 주체란 부조리라는 말로 형용할 수밖에 없는, 이해할 수도 감지할 수도 없는 섭리 즉 ‘신’이다. 신의 무능이나 부재를 증명할 무죄한 이가 겪는 고통은, 외려 그가 어떤 존재자에게도 공평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거대한 섭리란 결국 이해할 수 없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만다.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보다 차라리 어떤 식으로든 의미와 의도가 있다는 것이 숨 막히는 허무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면 인간은 이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참극에서 그 참극을 초래한 진실을 얻는 것은 드문 일이다. 진실을 성취할 수 없게 되자 인간은 진실은 존재하지 않다거나 알수없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축소시킨다. 이 축소에는 섭리란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이 전제되어있다.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자이든 결국 세계란 이해할 수 없거나 교정할 수 없다며 포기할 때 그것은 신에 대한 증명에 가담하고 만다.
그러나 이 증명은 역설적으로 악마의 존재 또한 증명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악마 역시 존재할 것이다. 공평히 모든 이에게 죄를 언도하는 신이 아니라, 오직 죄를 미워하여 유죄한 이에게만 고통을 언도하는 악마. 양 이야기의 중앙에 놓인 “Your life on earth is exhausted but your life in hell is unfinished”라는 문구는 존재자들이 지옥으로 이동한 이후의 시간대에 벌어지는 사건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실재의 세계를 지옥으로 바꾸어놓겠다는 선언이다. – 그러하기에 현재형 시제로 쓰였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 이루어지는 것처럼 “Devil is here”, “Pluto is here”이라거나 더 급진적으로 과거형으로 “King evil, you won”이라는 말로써도 선언된다. 무죄한 이가 고통을 겪어야 하는 세계로부터 유죄한 이만 고통을 겪는 지옥으로의 현실에 대한 전복은 예정되어있거나 지금 실행되고 있다. 이로써 《태평선전》이 악마의 말과, 악마에게 하는 말을 인용하는 것은 이 부조리한 세계 전체에 대한 기소문으로써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We will become the king of evil spirits”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 신의 세계가 아닌 악마의 세계 위에선, 우리는 섭리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일보다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에 또 전부를 교정하는 일에 가담할 것이다. 그런 한에서 악령들의 왕이 되고 무죄한 이들이 고통을 면하는 세계가 될 터이다.
미술은 작업에 영역 위로 모든 요소들이 동시에 드러나도록 스스로를 펼친다. 이 동시성은 그림 안에 대상들의 순서를 제거함으로써 어떠한 공평함을 만들어낸다. 그림을 보는 이가 각 부분을 살피는 데 스스로 순서를 정하거나 어느 한 부분에서 시간을 더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림이 동시에 모든 것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대상들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신이 그가 만든 세상의, 죄인과 무죄한 자를 바라보는 태도와 같다. 《태평선전》은 그 시선에 반대하기에 반드시 순서를 가질 수밖에 없도록 스스로를 구성했다. 그 구성으로 선택된 것은 ‘문자’이다. 문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든 그 반대이든, 혹은 위에서 아래로이든 반드시 순서를 가지고 만다. 작업이 모든 것을 동시에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문자가 있는 탓에 우리는 각 부분의 순서에 따르는 관객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작업은 창조에 순서마저 깨트리는 것 같다. 신의 창조는 “빛이 있으라”는 말을 통해 빛을 선두로 실행되었다. 그러나 《태평선전》은 빛보다 먼저 도착했을 것이다. 전시장 외부에 설치된 작업은 늘 볕에 노출되어 바래짐을 더해가지만, 사실 작업은 그 시작부터 볕보다 먼저 도착했다. 그렇기에 시간이 만들 수 있는 바래짐보다 더 바래진 상태로 스스로를 항시 드러낸다. 창조의 위계마저도 여기선 존재하지 않았다.
3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소중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때가 있다면, 그것은 이 말에 진심이 모자라기 때문은 아니었다. 외려 그것은 이 말이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어떠한 돌이킴도 변화도 없이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을 함께 가리키기에 서글퍼 위로가 되지 못했다. 저 말은 어느새 ‘그러니 잘못한 이를 찾아야 한다’라거나 ‘이 결론에 맞서야 한다’며 저항하는 편이기보다는 ‘삶이란 원래 그런 거야’라며 세계의 현재를 합리화하는 편에 서게 되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우주로, 달로 몇 명이나 인간을 보낼 수 있는 지식을 갖춘 이후에도, 몇 백 명이 물속에 어떻게 가라앉아야 했는지를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죄인 자들의 고통 앞에서 인간은 늘 축소되고 만다. 어쩔 수 없는 것, 결국 전부는 바꿔낼 수 없는 것이라는 규약이 인간들을 작아지게 만든다. 전시는 ‘신’이라는 가담항설을 좇는 형이상학적인 층위에서 형성되지 않았다. ‘신’은 유물론적 언어로, 세계의 부분에 수정만이 가능하다고 여길 뿐 전부를 변혁하는 것을 영원히 포기하게 만드는 인간의 겸허하지만 나약한 규약을 가리켰다. 반대로 ‘악마’는 그 규약을 함구하고 전부를 변혁하겠다는 태도를 상징했다.
또 한 번, 신을 기소하는 법정에 오직 예술만이 앞서 출석한다. 어떤 증인과 증거물 없이, 누구도 유감할 수 없었던 신을 기소함으로써 그리고 인간의 경계를 분쇄함으로써, 예술이 왜 없어선 안 되는지가 증빙된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어떤 실험과 증명도 없이, 유물론이 형이상학으로 깊어지는 일은, 서정이 세계에 관한 이야기로 농도를 갖는 일은 그리하여 구원이 변혁으로 완성되는 일은 예술에서만 일어나고 만다. 세상의 형편은 가능한 것들의 가능성을 현시하지만, 예술만은 불가능한 것들이 어떻게 가능‘했었’는 지를 현현한다. 최수련은 전시 제목의 일부인 ‘태평(泰平)’ 혹은 ‘Use and Pleasure’를 반어적 의미로써 사용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반어는 반대의 뜻을 의미하면서도, 제자리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소망을 멈추지 않는 한에서 사용된다. 소월의 ‘잊었노라’가 잊지 못하였음을 말하면서도, 상실에 설움에 젖어 망각하기를 멈추고 싶어하지 않듯이. 그러니 제목은 쓸모도 기쁨도 갖지 못한 세계를 비관하면서도 그 둘에 가까이 가기를 멈추지 않는 길이 된다. 우리, 지옥에서 살아요. / 조재연
참조
최수련, 「작가노트」(2020)
신형철, 「선생님, 신과 싸워주십시오—신경림의 『낙타』」, 『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1
신형철,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 한겨레, 2016. 9. 30, A13
함돈균, 「이토록 문학적인 삶, 당신은 지금 기소되었다」, 『얼굴 없는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9
*2020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비평 프로그램
(이론가 매칭)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This manuscript was written as part of Incheon Art Platform
Artist-in-Residence program – criticism program 2020